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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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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행 4:32-35; 요 20:19-31 본문 : 욘 4:6-8 제목 : “하나님의 준비” |
하나님의 준비
물리학에는 “카타스트로프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1970년대 초 프랑스의 과학자 르네 톰(R. Thom, 1923-2022)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표된 이론인데, ‘파국’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에서 따온 이론입니다.
대략적인 이 이론의 내용은, 이 세계 속에는 무언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돌연한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담배 연기를 생각할 수 있는데요......담배연기가 처음 똑바로 올라가는 것은 유체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허공 속으로 완전히 확산되어 사라지는 지점에서도 역시 통계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담배연기가, 처음의 한 가닥으로 올라가던 지점에서, 어느 순간 돌연 몇 가닥으로 갈라지거나 혹은 약간 휘날리면서 원래의 진로를 벗어날 때, 과학적으로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이론을, 파도에 부서지는 바닷물이나,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순간, 또 얼음판이 깨질 때, 화산이 폭발할 때, 심지어는 주식시장의 붕괴나 혁명이나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에도 적용하여 설명하려 했습니다.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렇습니다. 제아무리 구조적으로 안정된 공간 안에서도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급격하게 넘어가는 불연속점, 곧 카타스트로프의 점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태는 왜 발생하는지, 또 언제 일어날지, 현재의 인류의 과학과 지식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은 이런 복잡한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제아무리 발전된 과학의 세계를 살고 있어도 사실은 이 세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거나 대비하더라도 갑작스레 생기는 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그런 일화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유능한 피아니스트가 한 연주회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거기 누구나 존경해 마지 않는 피아니스트 교수가 자기 연주 시간에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 주겠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황송했지만 감사히 여기고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한참 연주가 절정으로 치달아가던 즈음,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던 교수가 악보 넘기기를 멈춥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데 안 넘겨줘요. 그래서 돌연 연주는 멈춰버리고 맙니다. 연주가 멈추자 이 노교수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말합니다. “연주회에는 언제나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네.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연주할 수 있게끔, 한 곡 내지는 악보의 다음 한 두 장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하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압니다. 이런 정도로 준비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준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카타스트로프의 점이 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갑자기 덮치며, 추이가 어디로 갈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지점! 우리는 인생에서 자주 그런 지점을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 카타스트로프의 점이란 그저 ‘우연’인 것입니까?
내 삶에,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돌발적인 일이 발생하면, 그것은 우주의 어떤 성분들이 제각각 부딪치다가 어쩌다 보니 생긴 일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돌발의 상황, 곧 내 삶에 종종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카타스트로프의 점들은
사실은 내 편에서 이해되지 않을 뿐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사실은 모두 계획된 일일 뿐
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조율! 그것이 우리네 인생에는 항상 관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하여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준비
요나서를 벌써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뱃사람들과 요나의 이야기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쳤고, 뱃사람들은 요나를 살리려 했지만, 결국은 바다를 향해 요나를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예비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하려 하는 사실은 1장 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17절은 이렇게 선원들이 어쩔 수 없어 요나를 바다로 집어 던졌을 때, 바로 그 다음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준비하셨다, 야웨께서, 큰 물고기를, 삼키기 위하여, 요나를
그리고 있었다,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세 번의 낮, 그리고 세 번의 밤
17절 말씀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부분은 야웨께서 물고기를 “준비하셨다”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질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이고, 그에 대해 그 다음 수순을 미리 대비하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준비하다”라는 단어(히. 마나)는 원래 ‘수를 세다’라는 말에서 나왔기 때문에, ‘계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도 매우 여러 번, 계산과 관련된 문맥에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이 말이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비하다’, ‘준비하다’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습니다. ‘준비’나 ‘예비’라는 것은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계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활동이니까요. 그래서 “야웨께서 물고기를 예비하셨다”(1:17)라는 말의 배후에는, ‘미리 계산했다’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지정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곤 합니다. 즉
세다, 계산하다
준비하다, 지정하다
와 같은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2. 다른 예비들
그런데 사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 속에
그러고 보니 요나서에는 이 외에도 여러 번의 하나님의 준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요나서는 전체가 다, 하나님께서 각본하시고 그 계획을 따라 움직여가고 계시는 어떤 커다란 무대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성경입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겁니다.
앞에서 보았던 말씀들을 이 주제에 맞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무대 공연 연출자가 되셔서, 일일이 소품들을 점검하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장면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자, 제일 첫 장면을 보십시오.
요나서는 이 성경이 시작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신 것, 곧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명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도망쳤습니다. 이때 이 장면을 유심히 보십시오. 1장 3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이 장면을 보세요! 마침 배가 있습니다!
그렇죠? 이건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요나가 가려고하는 딱 그 코스에 맞춰서 배가 대기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때는 지금처럼 5분에 한 대씩 지하철이 지나가는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배가 언제 있을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침 가는 배가 없다면, 항구에서 몇 달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딱! 갔는데 마침! 딱 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여기 “예비하다”라는 단어가 굳이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를 준비해 놓으셨어요. 요나가 정확하게 다시스로 갈 수 있도록! 요나가 마음 속에 계획한 대로 술술 일이 풀려 그 방향으로 잘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2)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장면은, 지난 설교 때 우리가 주목했던 바로 그 구절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4절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어떤 점을 주로 말씀드렸습니까? “내리시매!”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바람이 불었다”라는 방식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야웨께서 바람을 던지셨다.” 제가 저 “내리시매” 단어의 의미를 말씀드렸죠? 칼이나 창을 집어던질 때 쓰는 표현입니다. 즉 “야웨께서 폭풍을 내던지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시 여기에서도, 이 바람을 보내시는 주체를 보게 됩니다.
요나의 진행 방향에 배를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배의 항로에 무엇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까? 그렇죠! 폭풍! 큰 바람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또한 “예비하다”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여기에서 ‘예비하다’의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3)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우리가 처음 주목한 17절 말씀, 곧 이 “준비하다”라는 주제가 단어로서는 처음 등장하는 1장 17절 말씀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던 두 가지, 곧 배를 준비하신 것과 폭풍을 준비하신 것에는 “예비하다”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직접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미 커다란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세 절에 걸쳐서, 이 “예비하다”라는 말이 매 절마다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읽어보시면, 야웨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이 요나서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4장 6절, 7절, 8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절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4장의 “준비”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나? : 하나님의 준비의 이유와 목적
요나서의 시작부터 계속해서 이 모든 일들을 “준비”해 오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마지막 부분 4장의 6절과 7절과 8절에 집중적으로 계속해서 “준비”하셨다는 것을 읽으면, 우리는 이 사건 속에 실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항상 준비하시는 일의 어떤 방향과 목적’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게 됩니다. 4장 6절과 7절과 8절의 준비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의 손길
우리는 6절에서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셨다”는 것과 7절에서 “벌레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이 두 언급은 짧지만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박넝쿨도 벌레도 그때 즉시로 준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물을 키워보신 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식물은 하루에 몇 센티씩 쑥쑥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죠. 심지어 담쟁이 같은 종류의 넝쿨 식물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 모종의 ‘작위’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작대기를 세워준다거나 벽을 받쳐 준다거나......이런 종류의 ‘우리가 개입하는 작위’가 있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나가 마침 그날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고 성 동편 언덕에 가서 앉았을 때(4:5) 거기에 매우 적합할 만한 장소를 미리 마련해 두시고, 햇빛을 가릴 박넝쿨을 미리 준비해 두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정원사가 물을 주고 햇빛의 방향을 만들어주면서 정원의 식물을 가꾸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데, 하나님은 마침 거기 요나의 앉은 언덕에, 오래 전부터 한 박넝쿨의 씨앗이 날아가 싹이 돋게 하시고, 그것이 자라 우거지게 하시고, 거기 넝쿨이 사람이 쉴만한 그늘이 되게 하도록 정원사처럼 일하셨던 것입니다.
벌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벌레는 뿅 하고 생기지 않습니다. 벌레도 알로부터 유충, 성충의 과정을 거칩니다. 거기 알을 누군가가 낳아야 하고, 그 알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 박넝쿨을 갉아먹을 만한 크기로 자라야 합니다. “벌레가 마침 거기에 있었다”는 것 역시 어느 날 문득, 하필이면 그 장소에 뿅 하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앞에 수많은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건데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마침 거기에 박넝쿨이 있었다”, “마침 거기에 벌레가 있었다” 이렇게 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스스로 말합니다. “어쩌다보니 마침 거기에 박넝쿨과 벌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다!”
2. 하나님의 준비의 이유 : 요나의 악, 때리심, 긍휼히 여기심
하나님께서 이 “준비”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인생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고, 그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은데, 이런 우리의 인생에서, 오늘 요나서 본문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요나의 격노(악)와 기쁨
첫째는 6절 말씀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의 마지막 부분은 히브리어 순서를 따라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였다, 요나가, 그 박넝쿨을 인해, 심히 큰 기쁨으로
그런데 이 말씀은 1절과 구조에 있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읽는 독자들이 6절을 읽으면 “응?”하면서 다시 1절로 가서 보게끔 되어 있습니다. 1절 역시 히브리어 순서를 따라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하였다(싫어했다), 요나가, 심히 큰 격노로
그리고 요나의 이런 감정의 기복은 한 번 더 나타나는데, 8절과 9절에서입니다.
8절에는 요나의 감정 기복 자체는 나오지 않고 그저 “죽기를 구했다”라고만 되어 있지만,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하시고 요나가 이에 대해 답하기를 “내가 성내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격노”인데, 이 “격노”라는 말이 1절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이 구도를 보면 4장에서는 요나의 감정 변화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격노 – 기쁨 - 격노
이 비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박넝쿨과 벌레, 그리고 동풍을 준비하신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는지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 비교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준비, 곧 요나에게 “큰 기쁨”이 되었던 그 하나님의 준비는
요나의 큰 악, 요나의 격노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박넝쿨을 준비했고, 이것은 요나의 “격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금 그 큰 기쁨이었던 박넝쿨을 가져가 버리시자 요나는 다시 “격노”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준비”를 통해 알려주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네 인생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친절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는 때가 있지 않나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의 표현을 빌어보겠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대한 여호와의 행동을 악하게 여기면서,
자신을 위한 여호와의 행동을 매우 기쁘게 여긴다.
여기 아주 심오한 딜레마가 있지 않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박넝쿨”을 귀히 여깁니다. 자기의 일신에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저 많은 성읍들”은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의 일신에 해로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준비들을 통해 무엇을 일깨워 주시나요? 이것은 앞의 모든 준비들, 그러니까 다시스로 가는 배를 준비하신 일과 바다에서 폭풍을 준비하신 것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준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상황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무언가를 깨닫는 사실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이 어떤 마음을 갖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중”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동일한 마음을 갖느냐, 그렇지 않으면 일신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갈길대로” 마음대로 가 버리느냐, 그것이 하나님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준비”를 통해 백성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 감정들을 움직이는 여러 도구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볼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마음이 기울 것을......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나는 자신의 급격한 감정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준비들을 통해 무엇을 알려주려 하시는지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근심이 나의 기쁨이 되는 삶에 대해, 이 깊은 하나님의 준비를 통해 깨달았어야 합니다.
2) 때리심, 깨우치심
그리고 8절의 “동풍”에도 유의해 보십시오.
8절을 보시면 이 절 앞부분은 두 개의 문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뜨거운 동풍을”이 앞문장이고,
“해가 쬐었다, 요나의 머리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앞 문장의 “준비”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풍을 준비하셔서 발생하게 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동풍 준비’로 일어나게 된 일은 “해가 요나의 머리에 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쬐었다”(히. 나카)라는 말은 원래는 ‘치다’, ‘때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동풍 준비’가 한 일은 ‘요나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루아흐’를 준비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1장에서의 하나님의 ‘루아흐 준비’는 ‘폭풍’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1장 말씀을 들을 때, “폭풍을 보내셨다”라는 말은 ‘전투에서 창을 집어던지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1장에서도 ‘루아흐’를 던지셨는데, 4장에서도 ‘루아흐’를 던지십니다. 물론 4장에서는 정확하게 말하면 “루아흐를 준비하셔서, 햇빛을 던지신 것”이긴 하지만, 둘 다 같은 ‘바람’, 곧 ‘루아흐’를 통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즉 우리는 8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준비”가 요나에게 깨달음을 줄 때, 그 방식이 ‘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나는 1장에서도 하나님의 ‘치심’을 받았는데, 4장에서도 하나님의 ‘치심’을 받습니다. 이 ‘치심’을 통해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서 들은 말씀, 곧 하나님께서 박넝쿨과 벌레를 준비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방식으로 종종 ‘치심’, ‘때림’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화를 내고, 격노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자주 우리에게 ‘치심’, 곧 자녀를 때리시는 회초리를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요나서 4장의 “하나님의 준비”는 이런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이 메시지를 통해 말씀하려고 하시는 바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준비의 목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마지막 부분을 통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4장에서 6,7,8절에 각각 한 번씩 모두 세 번이나 “준비하다”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문맥에서의 의미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일이 결국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이유가 무엇으로 결론지어져 있습니까?
요나서 4장의 하나님의 준비는 이 요나서 전체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셨나요? 왜 벌레를 준비하셨나요? 왜 동풍을 준비하시고 따가운 햇빛으로 치셨나요? 요나가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요? 하나님의 마음을요. 그러면 이 요나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10절과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아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들을 아낀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제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낌”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는 또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실지!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준비”의 모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의 아낌”입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