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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凡草
2017년, 6월 19일, 월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789회) 죽을 약 옆에 살 약도 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 고장에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체면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 우리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졌다. 구멍 가게도 하고 행상도 하고 노점상도 하고.....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해서 우리를 굶지 않게 했다. 그 시절에는 나라 경제가 전체적으로 안 좋을 때라 하루 세끼를 마음 놓고 못 먹었다. 잘못하면 굶을 판이었다. 쌀이 다 떨어져서 온 식구가 굶을 지경까지 몰렸을 때 어머니는 여기 저기 쌀을 빌리러 다녔다. 그러다가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간신히 쌀을 빌려왔다. 그럴 때 어머니가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죽을 약 옆에 살 약도 있다" 그 말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몰려도 반드시 헤쳐나갈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늘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몇 년 전이었다. 예술대학에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하러 다닐 때였는데 이유없이 빈혈 증세가 자주 와서 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낼까 봐 몹시 불안했다. 혹시 강의하다가 쓰러지면 어쩌나 하며 강박 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공황장애 비슷한 증세를 겪었는데 어머니 말씀을 떠올리며 나를 다잡았다. 힘들었던 시기를 잘 보내고 나니 이제는 운전도 편안하게 하고 외부에 강의하러 갈 때도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토요일에 계곡물이 바닥 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루 자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무슨 조화인지 계곡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비도 안 내렸는데? 알고 보니 범초산장 앞에 있는 저수지 말고 저 위쪽 높은 산 속에 또 하나의 저수지가 있는데 도라지 집에서 산골짜기 밭에 물을 댄다고 그 저수지 수문을 열어 놓아 그 물이 아래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범초산장 계곡에도 물이 채워졌다. 야, 이 정도면 한 달은 버틸 수 있겠다. 어머니가 생전에 가끔 하시던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 죽을 약 옆에도 살 약이 있구나! 거짓말처럼 불어난 계곡 물을 보자 힘이 났다. 그래,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절대로 실망하지 말자. 내가 최선을 다 하고 있으면 무엇이든 저절로 채워질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도 지나고 보면 별 게 아니었다. 그걸 그리 걱정하고 고민하다니! 이 가뭄 또한 지나가리라.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나는 쉬지 않고 밭에 물을 대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그냥 놀면서 말라죽일 수는 없었다. 내 손에 여러 생명이 달려 있다. 힘이 들었지만 조금 쉬고 계속 일했다. 고단한지 코피가 났지만 별로 놀라지 않았다. 미니 연못도 물이 바짝 말랐다. 몇 번 물을 부어주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말라죽지 않을 정도만 물을 적셔 주었다.
그래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상추! 내 손에 저들의 생명이 달려 있다. 저들은 하늘 대신 나를 믿고 있다.
땅이 돌덩이처럼 굳었는데도 초롱꽃이 한창이다. 너희들은 뭘 믿고 그리 많이 피었냐? 그래, 나도 열심히 일했으니 호사를 한 번 누려야겠다. 잠시 쉬고 또 일해야지. 점심은 초롱꽃 밥이다. 접시 위에 초롱꽃이 피었다. 일년 중 요때 해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밥이다. 고등어조림에 명아주 나물 반찬이다. 양파도 내가 가꾼 것이라 달달하다.
혼자 밥을 먹고 있으니 산장에 놀러왔던 큰딸이 생각났다. 지수와 같이 여기 이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큰딸은 한 번 왔다가 갔지만 내 마음 속에는 이 장면이 오래 자리잡고 있다. 큰딸이 준 돈으로 사서 심은 월계수 나무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미처 보여주지 못했다. 월계수가 잘 크고 있으니 언제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어야겠다. 미국으로 돌아간 딸이 소식을 전해왔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사슴이 나타났단다. 허어, 거기도 범초산장 못지 않구나. 범초산장에도 고라니가 뛰어다니는데... 작은 딸은 결혼을 하고 이탈리아 남부로 신혼 여행을 갔는데 패션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촬영지인 마테라에도 가고 좋았단다. 벌써 8일이 지나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건강하게 잘 다녀온 딸과 사위를 보니 반가웠다. 나 혼자 매실 효소를 담았다. 아내는 진드기가 나온다고 산장에 하루만 온다. 나도 진드기에 물리기는 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몇 번 물렸으니 면역력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만은 하지 않는다. 계피물을 뿌리며 조심하지만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진드기보다 몇 배 더 즐거운 일이 많다. 올해 심은 들메나무가 잘 크고 있다. 말라죽지 않도록 갈 때마다 물을 뿌려주고 있다. 화장실 앞에는 미나리와 속새가 잘 크고 있다. 물이 부족한데도 내색하지 않는 저들이 고맙다. 천궁과 당귀도 물을 뿌려주어야 하고... 느릅나무는 이제 산처럼 자랐다. 저 한 그루면 내 염증은 문제 없겠지. 먹지 않고 보기만 해도 몸이 건강해진다. 내가 차고 다니는 동화팔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염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일 차고 다닌다. 제자들에게도 제법 많이 만들어주었는데 차고 다니는 걸 별로 못 보았다. 올해는 잘 차고 다니는 제자들에게 또 만들어주어야지. 감사는 감사를 부른다. 캐일을 배추벌레가 엄청 갉아 먹어서 할 수 없이 천연 농약을 만들어서 뿌려주었다. 물에 막걸리와 EM효소를 타고 미국자리공을 짓찧어서 즙을 우려낸 다음에 섞어서 뿌렸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는지 다음 주에 살펴봐야겠다. 엄지 손톱만 하던 깻잎이 거름을 뿌려주고 난 뒤에 조금 더 자랐다. 이제 물만 자주 뿌려주면 잘 크겠다. 깻잎은 언제 따 먹남? 풍선덩굴이 볼 때마다 쑥쑥 크고 있다. 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을 뿌려준 보람을 느낀다. 다음주에 또 보자! 바이~~ 오늘 오전에는 신양초등에 가서 학부모 강의를 했고 오후에는 오봉산에 올랐다. 월요일에는 꼭 산에 가야 한 주를 제대로 보내는 기분이다. 날씨는 무더웠어도 산은 푸르고 시원했다.
지난 주에 우리 아파트 부근에 있는 잔디밭을 지나가다 보니 조뱅이들이 씨앗을 달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가서 따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깜빡 잊고 지나가 버렸다. 오늘 등산 갔다 오다가 보니 조뱅이를 공공근로 하는 분들이 예초기로 싹 밀어버렸다. 아차, 미루면 결국 못 하고 마는구나! 시기를 놓친 것이 안타까워서 풀 벤 자리를 뒤적였더니 아직 씨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남들은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조뱅이 씨앗을 한 봉지 주워 모았다. 이것만 해도 부자가 된 느낌이다. 산장에 물이 넉넉해져서 기분이 좋고 이 조뱅이 씨앗들을 금요일 오후에 산장으로 심으러 갈 생각을 하면 지금부터 기쁘다. 이 씨앗 덕분에 이번 주도 가슴 설레이며 살 수 있겠다. 참으로 감사한 씨앗이다. (*) |
첫댓글 식물과 같이 사는 모습이 진하게 와 닿는군요.
가뭄이 산과 들 모두에게 아픔을 주고 있어요.
빨리 비가 와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주말에도 제주에만 흠뻑 온다는 소식이니 답답하고요.
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