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리(銅湖里)
지금으로 부터 꼭 40년이 지났다.
군 생활을 시작 한지 1년을 좀 넘겼을때 이다
우리 부대가 해안 경계를 위해 철책 근무에서 해안 근무로 역할을 바꾸고 근무지도 바꾸었을때 이야기다.
당시 내가 맏은 임무는 통신병인데 우리 부대가 맏았던 구역이 양양군 지역 해안을 커버했던 것으로 기억이된다
그리고 우리는 군 통신 시설이 고장이 나면 복구를 위해 양양군 해변을 누비고 다녔는데 그깨 우리가 제일 많이 다녔던 지역이 남대천과 낙산사 해수욕장 일대 였던 것으로 기넉이 된다
그리고 남대천의 경우 비가오고 나면 통신선이 끊어져 애를 먹였는데 남대천으로 가는 길은 동호리를 경유 해서 수산리 오산리를 거쳐 남대천으로 가야 해서 그때 마다 동호리를 지나서 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그랬다.
외부에서 동호리로 갈 수 있는 길은 손양면 소재지에서 산길로 들어 가는 길이 있었고 또 하조대에서 들어 가면
부산에서 원산으로 연결되던 동해선 철길이 철거된 선로길을 따라 여운포리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여운포리에서 동호리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호 했고 그때는 참 조용한 해변으로 반농 반어 마을 정도로 기억이 되는 곳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 보면 동호리 하면 망망대해 수평선이 바라다 보이고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른 바다 그리고 끝없는 백사장과 울창한 솔슾이 기억에 남는데 역시 이번에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동호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의 트레이드 마크는 맑고 푸른바다 울창한 송림의 청정 자연 환경 동호리 이다.
40년 전의 소나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으나 나이는 40을 더했을 것이고 제법 노송의 운치를 풍기기도 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는 해변이 되었다.
凉風蕭蕭吹我起(량풍소소취아기)
시원한 바람 우수수 불어 나를 일으키고
東峯月吐雲松林(동봉월토운송림)
동산 달 솔숲 위에 두둥실 떠올랐네.
松枝側垂蔭屋瓦(송기측수음옥와)
기울어 처진 솔가지 지붕을 가렸고
月影橫飛過庭陰(월영횡비과정음)
달 그림자 뜰 그늘 가로질러 지나간다.
- 丁若鏞 / 夏夜對月 중 -
지금 까지 그 소나무가 베어지지 않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러기 까지에는 먼 미래를 내다 보는 안목을 가진 마을의 지혜로운 아른이 계셨음일 것인데 그 중심에 족헝인 석일씨 백부님과 부친이 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족형인 석일씨가 이곳에 살고 있단다.
옛날 그시절에야 당연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 왔지만 나이들어 종친회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 소통을 하며 지내 오고 있다.
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있으면 천리밖에 있어도 만날수 있지만,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도 만나지 못한다.
인연이 있으니 이렇게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파랑길 걷기 코스에서 이곳을 지나게 되어 있는 것도 또 이곳에 태어나서 이곳 동호리에서 지금껏 살고 있으면서 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인연 이었지만 어찌나 살갑고 다정 다감 하게 챙기고 배려해 주시는지....
어디 그 뿐인가 인장 청장년회 장세완 회장님 대구에서 양양까지 플랭카드 까지 제작해서 5시간 반을 직접 운전해서 그 먼길을 격려차 방문 해 주시고...
너무도 고마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인복이 터졌다
그 인연에 감사하고 그 인연이 고마울 따름이다.
참으로 분에 넘치고 과분한 대접과 환대를 받았다
첫날은 줄돔회 둘쨋날은 가리비를 비롯한 조개 세쨋날은 가자미 회 아침도 역시 섭국 물곰탕 조림등으로 하루도 중복 돠지 않은 매뉴로 우리의 입맛을 만족 시켜주었다
참으로 하기 힘든 일임을 나는 잘 알고있다.
뿐만 아니고 본인의 개인 사업도 있고 또 동호리 해수욕장 운영 관리도 해야 하는 바쁜 시간 임에도 불구 하고 매일 아침 주문진이다 속초다 공현진이다 그 바쁜 시간에 우리가 걸을 수 있도록 태워다 주고 태우러 오고 ...
모든 것이 마음이 시켜서 했을 것이다.
누가 부탁 한다고 할 일도 아닐 것이고 누가 시킨다고 하지 않을 일일 것이며 이 귀찮은 일이 돈을 위해서라면 했을 것인가?
우리 친구들 모두들 그의 조건 없는 환대와 융숭한 대접 그래고 배려와 헌신에 감동이란다.
나는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부담이 없지 않지만
오롯이 정으로 받아 들이고 정으로 느낄 것이다.
옛날 군생활 할때 그때만 해도 막 스무살을 넘긴 나이로 신체적으로 성장이 완성되고 혈기 왕성한 청넌일 뿐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문중일 이나 집안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어디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같은 일가가 산다해도 그냥 그런갑다 정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가면서 가치관이 헝성 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모양이다.
나 또한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정체성을 확인 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 족형 석일씨 이고 그 족형이 양양 동호리에 살고 있단다.
동호리(銅湖里)
옛날 군생활 할때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을 한 것 만큼 발전했는데 양양 국제 공항이 생기면서 왕복 6차선의 도로가 생겨나 낙산 해수욕장을 거쳐 속초로 연결 되었고 해변의 고운 모래 백사장과 송림숲이 만들어 낸 빼어난 자연경관은 지금은 관광 자원이 되기도 했다.
또 해변에는 팬션과 맛집이나 커피숍이 생겨나 관광이나 생활 편리성이 개선 되기도 했다
동호리는 강원도 양양공항 동쪽 해변 마을로 약 500여년 전에 큰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의 빛이 구리빛과 같다하여 구리개, 굴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일설에는 이곳에서 구리(銅)가 많이 나서 동호리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동호리는 장전리와 통합을 거쳐 현재의 동호리가 되었으며 손양 어촌계에 소속된 마을로는 수산,오산, 동호리의 세 마을이 하나의 어촌계를 형성하고 있단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만 하나로 묶여 있고 재산권은 각각 독립되어 있단다.
동호리 마을이 생겨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에는 염전도 많았던 곳으로 넉넉한 생활을 한 마을이란다.
풍설이기는 하나 굴개가 울면 비가 온다고 하며, 멸치후리가 이 고장의 중요 민속놀이로 정해져 있다
여지도서 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굴포진리로 불렀다고도 한다..
첫댓글 좋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부럽습니다. ^^
덕분에 귀하신 분들의 그리운 모습을 뵙습니다.
모두 만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무탈하게 잘 지내시죠?
제가 해파랑길 걷다 보니 또 일가 만나서 분에 넘치는 귀한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회장님 먼길 마다 않고 대구에서 와 주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