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여정 - 전례와 믿음; 믿음의 은총, 믿음의 훈련
2023.8.4.금요일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1786-1859) 기념일
레위23,1.4-11.15-16.27.34ㄴ-37 마태13,54-58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시편81,2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모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하고도 결정적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사랑에서처럼 믿음의 여정에서도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에 읽은 교황님의 리스본에서 젊은이들에게 한 강론중 두 말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미래도 없다.”, “젊은이들여 너희들 손을 더럽히는(dirty)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인들의 삶에서, 우리 신자들의 삶에서 하느님을, 믿음을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허무와 무지의 제로일 것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마음의 병중 가장 큰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라 합니다. 역시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품위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의 지론입니다. 하느님 믿음 빠지면 건강과 돈만 남고 이 둘이 절대적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믿음이 빠진 그 자리에 탐욕이나 허무가 자리 잡을 것이고 인간 품위의 상실이 뒤따를 것입니다.
또 하나 오래전부터 강조한 예가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라는 말마디입니다.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관계는 얼마나 많습니까? 혈연관계 역시 이해관계 앞에는 참 무력합니다. 정말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믿음 역시 부모로부터, 선배나 이웃으로부터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평상시 몸에 밴 믿음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뼈가 시리도록 밤낮 늘 외롭다고 했습니다. 외로움, 그리움은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텅빈 외로운 마음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남편한테 자녀들한테 올인했다 합니다. 남편이, 자식만 있었지 그안에 하느님이, 내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믿음의 관계가 참으로 허약했던 것입니다. 궁극의 믿음, 희망, 사랑은 하느님뿐임을 잊었던 것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믿음의 성장도 없습니다. 믿음의 은총이지만 부단한 자발적 믿음의 훈련도 필히 뒤따라야 합니다. 평생 믿음의 훈련입니다. 역시 죽어야 끝나는 믿음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회개하는 것도 바로 믿음의 훈련에 속합니다. 제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일어나자마자 쓰는 강론도 믿음의 훈련에 속합니다.
소리없이 노화되는 모습처럼 소리없이 성장하는 나무들의 모습입니다.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2009년 애목이었는데 14년 지난 지금은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성장하는 믿음의 나무에,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관계인지 묻게 됩니다.
우연한 갑작스러운 믿음의 성장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날마다 정성을 다해 돌보고 가꿔야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훈련에 결정적인 것이 바로 교회의 전례입니다. 전례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온통 이스라엘의 축일들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의 전례력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믿음은 구체적 전례 수행의 훈련을 전제로 합니다. 믿음의 훈련에 이은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우리 천주교 역시 전례력이 있고 전례력에 따라 공동체가 지켜야 할 축일들이 즐비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공동전례 축일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축일들입니다.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로 시작된 레위기 23장은 온통 이스라엘 축일들이 얼마나 견고한 믿음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자주 되풀이 되는 말마디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에 주력한 축일들인지요!
오늘 복음은 지금까지 하늘 나라의 비유를 멋지게 설파하신 주님께서 고향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예화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무지의 편견은 바로 믿음 없음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우리 신자들의 보편적 부정적 모습들이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이처럼 철벽같은 무지의 편견입니다. 과연 이런 무지의 편견에서 자유로울자 몇이나 될런지요? 이 고향 사람들은 믿음 부재의 반영으로 하느님 중심의 축일들의 수행에 소홀했음이 분명합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축일들에 마음을 다해 참석하며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았다면 이런 무지의 편견은 없겠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편견에 눈멀어 예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한 고향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못했다 합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선행할 때 비로소 가능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편견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요 믿음없이는 기적도 없습니다.
오늘은 프랑스 리옹 출신의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믿음의 여정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믿음의 대가, 성 요한 마리 비안네입니다. 부진한 학업에 여러 어려운 환경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의 믿음의 노력으로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41년동안 한결같이 전력투구한 믿음의 성인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마리 비안네 사제가, 훌륭한 목자가 되는데 결정적 모범을 보인 분이, 비안네의 롤모델이 아르스 본당의 전임 사제 발레리입니다. 비안네는 발레리 신부의 온유함과 굳은 신앙심, 사제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성인의 말년시 감동적 일화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1855년경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2만명에 달했다. 하루 단위로 하면 매일 60명이요 그후 죽을 때까지 10년동안 하루에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냈고 하루 평균 두세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마침내 1859년 8월 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41년 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아르스에서 선종하니 향년 73세였다. 그가 선종한 날에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울었다.’
비안네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25년 시성됐고 1929년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성 요한 마리 비안네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참된 모범”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살아있는 보물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믿음의 전사인 우리를 분발케 하는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해줍니다. 믿음의 훈련과 습관에 날마다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고해인생을 믿음의 축제인생으로 바꿔 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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