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기도하되 끈기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끈기 있는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불의한 재판관보다 못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틀림없이 우리의 청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정성이 담긴 기도는 끈기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끈기 없는 기도도 문제고, 아예 기도를 멀리하는 것도 또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기적이나 치유, 수많은 생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신자들 각자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들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통해서 많은 은총을 길어내고, 이 은총의 힘으로 우리의 삶이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는 청원기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고는, 제대로 매일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기도해야 힘이 나고, 기도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이 사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 하면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또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니, 이 크고 깊은 뜻을 실천할 힘은 당연히 기도를 통해서 길어내는 것이며, 기도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중요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어(루카 5, 16), 혼자서(9, 18), 산에서(9, 28-29), 때로는 밤을 새우시며(6, 12), 십자가 위에서도(23, 34. 46),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배우고 새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을 주님으로 진정으로 믿게 되고, 참되게 섬기게 됩니다. 기도해야만 주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고요하게 주님 앞에 머무는 침묵이 어렵게 느껴지고, 바쁘게 경쟁하면서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이, 마치 기도하는 시간을 현실과 맞지 않는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의 도시생활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이 도도하고 세찰수록 기도로 정신을 차리고 정말 깨어 살아야겠습니다.
강종석 베드로 신부 / 염포성당 주임 출처 : 부산주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내가 의지할만한 어떤 대상을 찾게 마련이지요.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통로가 되어줄 것들 말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에 의지한다거나, 모든 인맥을 동원한다거나, 골똘히 고민도 해가면서 무언가를 통해 이 절망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되어 버리고, 그래서 어디 하나 의지할 대상이 없어져 버리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것들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루카 18,2) 여기며 나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내 주변 사람들, 또 내 자신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온갖 형태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한낱 나약하고 초라한 ‘과부’가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완벽하게 주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존재,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존재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런 우리들 마음을 건드립니다.
복음 말씀에서, 이런 우리네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절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닌 아버지를 보여주시고자 애타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놓치지 않는 항구함을 몸소 드러내시려 우리네 삶의 고뇌를 똑같이 살아내시며 십자가의 길로 가신 분이십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매달리면서 ‘내가 절망에서 벗어났느냐’하는 결과를 따지기 이전에, 차라리 ‘과부’의 처지가 되어서라도 홀로 주님 앞에 서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 그 자체가 아버지께는 더 없이 귀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그러한 항구함이 간절해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절망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봅시다.
질그릇 같은 우리들, 언제나 내가 숨 쉴 수 있고 시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잠들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임을 잊지 맙시다(1독서에서 모세를 통해 내리는 주님의 은총 속에 있을 때만이 아말렉족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우리는 듣습니다). 자꾸만 내 자신에게로 기울고 그래서 나약함에 무너져 좌절하고 울부짖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으려 노력합시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위해 투쟁하고 거짓 교사들을 대항할 것을 가르치며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독서, 2티모 3,15ㄴ-16)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말씀으로 친근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하루하루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상록수성당 보좌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출처 : 수원주보
참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짐
“우리의 다짐과 소망이 올바르고 그것을 진정 바라고 있다면, 주님 안에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주 기도 성월이 벌써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매 성월마다 그 의미를 새기며 열심히 생활하고자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사라져 감을 느낍니다.
돌아보면, 수많은 다짐을 했고 또 그 다짐을 다 실천하지 못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기에, 우리에게는 그 다짐들을 실천하며 변화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기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일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의 나태는 자기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만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 3,14-15).
우리 각자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미 배웠고 매 미사 때마다 성경 말씀을 들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짐들이 자주 빛을 잃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항구한 의지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재판관이 가장 보잘 것 없는 과부의 끈기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졸라댄다고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다짐과 소망이 올바르고 그것을 진정 바라고 있다면, 주님 안에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팔이 끝까지 들려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영적 승리를 위해서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의지의 팔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무디게 합니다. 하지만 천 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 년같은 주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라고 걱정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세례 때의 첫 믿음을 항구한 의지로 지키고 키워 나가야겠습니다.
박순호 도미니코 신부 가산본당 주임 출처 : 춘천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