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쌍소 -프랑스 폴발레리대학에서 철학 및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저서로는「민감한 프랑스」「공원」「도시의 서정」등이 있다. 삶에 대한 진솔한 지혜와 철학적 성찰을 담은 저자의 에세이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많은 프랑스인들로 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변화를 따라잡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위협하는 현대를 느림의 시선으로 다시 살펴봤다. 저자는 느림을 통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을 얻었다고 고백하며, 느리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그것은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꿈꾸기, 글쓰기, 포도주, 모데라토 칸타빌레' 등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게으름이나 무력감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활력으로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한 방편으로서의 느림이다. '빨리빨리 살면서 놓쳤던 삶의 의미,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가 있다. 그것은 갑자기 달려드는 시간에게 허를 찔리지 않고, 허둥지둥 시간에게 쫓겨다니지도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로
알수 있는 지혜이다. 우리는 그 능력을 '느림'이라고 불렀다.
서구 유럽인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같을 수만은 없을 게다. 그럼에도 삶의 속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발걸음만큼은 한결 여유로워진 나를 발견하는 기쁨은 포기할 수 없는 듯 하다. 어차피
우리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시험 답안지를 메워가는 학생의 시간과 감독하는 교수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는 않을진대, 그 흐름을 내가 주도하리라는 마음의 사치도 잠시, 이를 어쩌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앉은 자리에서 읽어치웠으니….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내 연구실 벽시계는 오늘도 10시 35분에 멈춰 서 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한 학기를 단위로 시간이 흘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한 주일도 모자라 하루하루를 단위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 와중에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시간이 늘 10시 35분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 만큼 큰 위안이 된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로부터 터득한 지혜 탓일까.
확실히 자본은 삶의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요즘 나보다 안 바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는 말이 유행이라는데, 70년대의 바쁘다 바빠가 허세의 상징이었다면 오늘날 바쁘다
바빠는 위세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으니, 진정 시간 속에 침투해 들어온 자본의 위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늘 시간에 쫓겨 앞으로는 기필코 이렇게 살지 않으리 다짐하는 중에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일 수 있다는 쌍소의 글은 신선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했다. 한가로이 거닐기,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고급스러운 권태, 늘 꿈꾸기, 넓고 커다란 가능성을 열어둔 채 기다리기, 존재의 퇴색한 부분 간직하기, 마음의 진실을 형상화한 글쓰기, 지혜를 술에 담가 마시기, 그리고 모데라토 칸타빌레라. 책을 덮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소중한 체험을 안고 여행길에서 돌아온
마음이 되어 흐뭇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물론 서구 유럽인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같을 수만은 없을 게다. 그럼에도 삶의 속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발걸음만큼은 한결 여유로워진 나를 발견하는 기쁨은 포기할 수 없는 듯 하다.
어차피 우리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시험 답안지를 메워가는 학생의 시간과 감독하는 교수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는
않을진대, 그 흐름을 내가 주도하리라는 마음의 사치도 잠시, 이를 어쩌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앉은 자리에서 읽어치웠으니….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