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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신명기의 말씀 4,32-34.39-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 제2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8,14-17>
형제 여러분,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 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으로 살기를 기대하며 또 살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분이십니까?’ 하는 질문에 ‘세 개의 등불이 가까이 있다면, 그 사이에는 빛이 하나로 섞여 세 개의 빛이 뭉쳐졌다고 하지 않고 빛이 밝다고 하듯이 신성(神性)도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 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바치신 분으로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 (까롤로 까레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 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예레미야 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탈출 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십시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합니다.
물론 동상이몽(同床異夢)인 분도 계시겠지만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한마음(일심)이 되고 한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동체)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집에 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 관계는 부부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부자 관계도 사제 관계도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사랑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혼란과 많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명하신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서로 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삼위일체와 영원한 생명>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와 영생(영원한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세례받은 사람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실현되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실현하는 사람이고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플라나리아’란 동물이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 하천, 강 등에서 서식하는 편형 동물입니다.
플라나리아는 뇌, 눈, 신경관, 창자, 입, 정소, 난소, 생식선 등을 갖춘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플라나리아는 어느 부위를 잘라도 다시 온전한 플라나리아가 됩니다.
몸통을 다섯 부분으로 자르면 다섯 마리의 플라나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대학교에서는 한 마리의 플라나리아를 잘라서 2만 마리까지 늘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나리아는 영원히 사는 동물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플라나리아는 자신의 몸을 자손에게 이어주며 개체 수도 늘어날 뿐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멸종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삽니다.
몸을 자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개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영원히 사는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플라나리아는 세포마다 눈과 머리, 창자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설계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자르더라도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플라나리아를 믹서기에 갈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잘게 잘리면 재생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원형’을 회복할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길이로 자르면 플라나리아는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이 말은 플라나리아를 자르면 그와 비슷한 거머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플라나리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플라나리아만 이런 능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영원히 살려면 끊임없이 플라나리아로 재생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잘리지 않거나 혹은 생식하지 않으면 그 플라나리아의 생명은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잘리거나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는 생식을 멈추면 그 플라나리아는 영생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통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도 없고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는 생명체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의 피 흘림으로 탄생합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사라져도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생명체를 보며 적어도 두 개는 자신 안에 품고 있어야 함을 봅니다.
그 첫 번째는 정체성과 원형, 혹은 설계도이고, 그 다음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생식 능력, 혹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나리아는 원형과 생식능력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것입니다.
플라나리아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원형과 생식 능력, 이 둘과 하나가 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본성적으로 영원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하실 수 있는 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만약 위 플라나리아의 예와 비교하자면(물론 하느님을 동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송하기는 하지만) 은총과 진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형’과 ‘생식력’입니다.
아버지와 성령을 담으시는 그릇과 같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설계도’와 ‘피땀’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설계도대로 다시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설계도대로 누군가가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은 ‘피땀’, 즉 ‘사랑’의 에너지를 의미하고, 진리는 ‘설계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아니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형’인 ‘진리’를 품고 계신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에너지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행동하고 말하고 듣고 사십니다.
아버지의 모습대로 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는 진리이시고 원형이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녀의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리라고 종용하십니다.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하셨습니다.
플라나리아가 플라나리아로서의 ‘원형’, 즉 ‘설계도’나 ‘진리’를 자신 안에 품고 끊임없이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자기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며 자손을 낳으려고 하는 ‘사랑’을 지녔기에 영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려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 자신과 같은 자녀를 탄생시켜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부모들이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을 볼 때 그런 희생이 생명의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위해 죽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플라나리아라는 한 작은 생명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바로 자신 안에 은총과 진리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를 품고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하고 살과 피를 내어주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려 할 때 우리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여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영원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형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기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죽겠지만, 이렇게 죽으려고 하면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영생의 비밀은 삼위일체 사랑에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또 다시 저희 사제들에게 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만 돌아오면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제발 이번 주일 미사가 내 차례가 아니었으면...
다른 형제가 주례하면 편안히 앉아서, 어떻게 강론을 풀어가나 흥미진진하게 들으면 좋을 텐데...’
지난 시절 돌아보니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냥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삼위일체와 관련된 교부들의 가르침이라도 소개해드렸으면 좋을 텐데, 나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며 별의별 논리들을 다 동원해서 신자들을 헛갈리게 만든 죄, 어찌 보속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레네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해석도 신선합니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로부터 사랑의 성령께서 발출하셨습니다.”
성삼위에 관한 윤주현 신부님의 설명 역시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삼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세 위격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며, 성자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성부께서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사랑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내적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세 분과 더불어 사랑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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