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막막한 바다를 보고 나는
당신 열두 자 깊은 눈빛을 보고 있네 당신은
쓸쓸한 바다의 맥을 짚고 나는
당신 울멍울멍한 고독을 살피네
동백은 지고 동백 지고
물새마저 흰 날개를 접은 삼양
검은 바다는 창백한 등대 불빛을 감추고
떨기나무 불온한 그림자를 감추고
벼랑 같은 고독을 감추고
아득해져서는
어찌해 볼 수 없도록
아득해져서는
나는 당신 불경한 맥을 짚고
당신은 내 아찔한 심장소리에 눈을 씻네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2024.12.17. -
당신도 동백이 지는 것을 보고 있었군요. 내 눈빛 속 너울거리는 바다가 막막한 줄을 알고 있었군요. 물새도 함부로 날 수 없는 바다인 것을 알고 있었군요. 내 불온한 눈빛 속 벼랑 같은 고독을 읽고 있었군요. 바다의 맥박인 줄 알았더니 당신의 심장소리였군요.
불온이 때로 정의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불경이 때로 최대의 예의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아득한 상념의 소실점을 여기로 당겨준 당신, 동백 진 자리엔 씨가 여물겠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
이리 슬픈 노래 들어보셨나요
나는 당신의 기타줄
나는 당신의 악보
고개 들어 나를 퉁겨봐요
강물은 출렁출렁 춤추고
산맥은 넌출넌출 두 팔 흔들고
아침 햇살은 관목숲 조율공
바람은 공중에 조율사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기타줄
나는 당신의 슬픈 악보
나는 커튼 새로 스미는 달빛
나는 들창문을 두드리는 찬비
자 고개 들어 나를 퉁겨봐요
심장은 쿵덕쿵덕 춤추고
바람은 훨훨 두 팔 흔들고
나는 당신의 손끝에서만 울리는 기타줄
나는 당신 영혼을 훑고 가는 눈물 속에 악보
저 하늘의 별들도 잘그랑잘그랑
기타줄을 울리고 있는 걸요
우리는 저마다의 기타줄
고개 들어 우리의 기타줄을 울려봐요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
이리 신나고 슬픈 노래 들어보셨나요
- 시집〈우리는 저마다의 기타줄〉지혜 -
사진〈Pinterest〉
소리쟁이 풀꽃
이 순 화
바람도 없는데 꽃무늬 커튼 흔들리고
찬장 삐걱이고 바람도 없는데
크리스털 화병 바스락대고 전등갓 흔들리고
바람도 없는데 바람이 이불 속으로
나는 파래져서는 퍼레져서는
축축한 뒤뜰 뱀 구멍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못 볼 걸 본 거지
당신 휘파람 불며 푸른 장화를 신고
소리쟁이 풀을 한 아름씩 베어내고
악머구리 끓듯 퍼런 냄새가 뒤뜰을 뒤덮었지
뒤뜰은 터질 듯 터질 듯 배가 불거져서
못 볼 걸 본 거야
누가 자꾸 내 발목 칭칭 감는 거야
바람도 없는데 시퍼런 바람이 바람은 갓 태어났을 때는 연둣빛이랬어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 돼 퍼렇게 독 오른 거라고 당신 푸른 장화 시퍼렇게 풀독 오른 것처럼 그렇다고 파충류라고 생각하지 않아
바람이 파충류라니
뒤뜰을 돌아 나오는 바람 소리
우물 옆에서 처마 밑에서 창살에
어리는 저 서늘한 소리
쉬
그때 당신 휘파람 불며 어두운
플랫폼에서 깃발처럼 나부꼈어
나는 말뚝처럼 박혀 눈구멍
물이 흐르고 귓구멍에서
쉬쉬
덤불 풀이 휘파람을 부는 거야
내 아름다운 꽃밭에 소리쟁이 풀꽃
아무도 없는데 서늘한 바람이
내 가느다란 종아리로 살찐
허벅지로 허리로 늑골을 타고 뇌수로
옷장 밑에서 싱크대 안에서 전등갓 뒤에서
내 일기장, 오래된 내 일기장
속에서 쉬쉬
당신?
나는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들어
쉬
- 시집〈우리는 저마다의 기타줄〉지혜 -
사진〈Pinterest〉
나, 온전히 서리 찬 가을이어라
이 순 화
조금 남은 햇살이 마당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네
그제는 동쪽 담 노란 국화꽃을 피워 보이더니 오늘은
푸른 가을 꽃나무가 있는 서쪽 담 쪽으로
갓난아기가 한 발 한 발
걸음마 떼는 속도로 가상하게
구순 눈 어두운 노모가 뜰로 내려서는 속도로
극진하게
자상도 하여라
손 한번 잡아줬을 뿐인데
머리 한번 쓰다듬어줬을 뿐인데
맥이 뜨거워지고 귓불이 발개지고
서쪽 꽃마저 피우고 나면
나, 온전히 서리 찬 가을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