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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운명(運命)-10*
"혜정아. 죽변에 다 왔다. 준비하세요."
"벌써 온 거예요. 에이~ 더 할말이 많은데…"
아쉬워하는 혜정의 어깨를 안고 어항이 보이는 바닷가 앞 식당으로 갔다.
"제임스. 정말 게 찌개 맛있게 잘 먹었어요. 이제 다시는 맛보기 어렵겠지요."
"아니? 혜정이 먹고 싶다면, 허드슨 베이에서 게 잡아 끓여줄께. 나는 해산물을 아주 좋아하거든. 혜정이도 해산물 좋아하면 먹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 절대 안 해도 좋아. 내가 책임지니까."
"와우~ 진짜? 저도 당신이 좋아하면 다 좋아요. 잘 먹을 거예요. 기대해도 되지요?"
"그래. 덕분에 나도 자주 먹게 되어서 좋다."
길곡은 깊은 산 계곡의 작은 언덕들 사이에 있었다. 울진에서 7번 도로를 타고 서북쪽으로 가며 왕피천 대교를 지나고 원남면 보건소를 지나 69번 도로를 바꿔 타고 가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눈이 내려 경치는 좋았지만, 맞은 편에서 오는 차가 있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비켜주고 다시 나아갔다. 혜정은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100미터 앞에 69번 도로가 끝난다는 팻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좌측 옆에 10가구 정도의 동네로 들어가는 눈길이 보였다. 험난해 보였다. 그러나 우린 캐나다 해드무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제임스. 여기는 어디예요?”
불안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던 혜정이 물었다. 차 안은 히팅이 잘되어 오히려 더웠다. 혜정은 점퍼를 벗고 면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걱정되지? 그의 다 온 것 같다. 이 동네가 길곡이야. 혜정아. 잠깐 기다려. 내가 동네에 가서 장선희를 찾아보고 오겠다.”
“제임스. 저도 같이 가면 안되요?”
이미 혜정이 캐나다 구스(브랜드 이름) 점퍼를입고 털 달린 후드를 쓰고 있었다.
“왜 안돼? 같이 가자. 장갑 잘 끼고, 신발 제대로 신고… 시동은 켜 놓고 갈 거다.”
당연한 말을 하였다. 겨울의 해드무스에서는 가능한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시동을 켜 놓은 채로 일을 한다. 나는 조수석으로 가서 혜정이 제대로 잘 내려오도록 부축했다.
자동차 계기판의 시계는 오후 3시 40분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어두워질 것이다. 조급하였다. 동네길은 눈을 치우지 않아 발목까지 눈이 쌓여 있고 조금씩 내리고있었다. 첫번째 집에서는, 뒤로 네번째 집에 장선희가 살고 있다 하였다. 열 집이 작은동네를 이루고 살면 이웃의 아침 상위에 올려지는 숟가락 젓가락 숫자를 다 알게 된다 하였다.
네번째 집을 찾아 가는 동안 혜정은 내 곁에서 팔을 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이해가 되었다.
나는 혜정을 옆에 꼭 끼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네번째 집으로 가는 길은없었다. 눈으로 온통 덥혀 있었다. 아무도 출입한 흔적이 없었다. 우리가 걸으며 길을 만들어 나아갔다.
앞에 낮은돌담 울타리가 둘러 처진, 작은 마당을 가지고 녹색 기와를 지붕으로 올린 아담한 단층 슬라브집이 장선희가 살고 있다는 집이었다.
낮은 나무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힘주어 밀자 눈과 함께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계십니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계세요? 장선희 아줌마. 저 김혜정 이예요. 캐나다에서 왔어요.”
잠시 후 인기척이 나며 집안의 출입문이 열렸다. 50대 중반 정도의 아주머니가 후드가 달린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 장화 같은 가죽 부츠를 신은 채 나왔다. 안으로는 들여 오게 할 것 같지 않았다.
“누구라고?”
혜정이 그녀 앞으로 한발 나서며 말했다.
“저는 캐나다에서 온 김혜정이라 해요. 장선희씨를 찾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는 나진희 이예요.”
그녀는 한참이나 고개를 올려 혜정을 쳐다보며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혜정이 앞으로 다가와 장갑 낀 손으로 혜정의 장갑 낀 손을 잡았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캐나다 든 어디에 든 겨울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좋은 날이다.
“너가 혜정이라고?”
그녀는 확인하고 싶은 지 다시 혜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 제가 나진희의 딸인 김혜정 이예요.”
“그래. 내가 장선희가 맞다. 그래. 뭘 도와줄까? 이 눈 오는 밤에 어떻게 찾아 왔는지 이유는 모르겠다만, 괜찮다면 잠깐 쉬었다 가라.”
“네. 고맙습니다. 저희는 지금 어머니를 찾고 있어요.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어머니의 마지막 하신 말씀이 ‘길곡의 장선희를 만나라’ 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제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어서 들어와. 너에게 확인하고 줄 것도 있다.”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물러서 나를 올려다 봤다. 내가 주저하자 혜정이 나서며말했다.
“저의 남편이예요. 캐나다에서 같이 왔어요.”
이건 참 곤란한 행동이었다. 이제부터 사회적으로 공개되고 하나 하나 공인과정을 밟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괜히 의심받을 짖은 하지 않는 게 더 좋다. 판단은 장선희에게 맡겼다.
작은 거실은 특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티비를 앞에 둔 쇼파에 앉았다. 장선희라고 말한 아주머니는 곧 뜨거운 커피를 끓여 우리 앞의 탁자에 놓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혜정은 무안하여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잠옷을 걸쳐 입은 50대 중반의 172cm에 약 80kg 정도 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가 007가방을 두개 아래위로 포개 놓은 것 같은 부피의 가죽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그 가방 앞에는 전자 패드가 붙어 있었다. 그는 패드가 위로 올라가게 하여 가방을 탁자위에 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우리 맞은 편에 앉았다.
“저는 장선희의 남편인 고진환입니다. 한 주 전에 나진희 회장님께서 김혜정이라는 따님이 오면 이 패드를 여는 것을 보고 맞으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밀번호는 따님의 첫 생리 일 월 년인 8개 숫자라 하였습니다. 열어 보십시요. 그 전에 김혜정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자동차 운전면허증이나 여권 등 이런 것 좀 보여주셔야 겠습니다.”
우리는 놀랐다. 이렇게 치밀할 수가… 나는 혜정을 봤다. 그리고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했는가 의문이 되었다. 내가 물었다.
“그 전에, 나진희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연락이 되지 않아서 여기까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진희씨는 어떤 관계입니까? 또 하나, 우리가 오기 전에 다녀간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나는 말을 마치자 혜정이 빽쌕에서 꺼낸 여권을 받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펼쳐서 한장 한장 넘겼다. 그리고 나는 IBNS가 발행한 평생회원권 카드를 같은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한참을 보든 그들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혜정이 가방을 앞으로 당겨 패드에 손가락을 대고 눌렀다. 패드의 잠금 장치는 ‘핑’하는 소리와 함께 해제되었다. 절묘하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첫 생리일을 잊고 살 것이다. 그러나 혜정과 진희는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하여 서로 교감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혜정은 내 얼굴을 봤다. 열어도 되는가? 이다. 나는 좀 더 혜정이 곁으로 움직여 가방을 열었다. 작은 손가방 하나와 앨범 같은 두꺼운 케이스 10권이 있었다. 꽤 무거웠다. 그것들은 수집한 화폐들이었다. 얼핏 봐도 고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일성의 싸인이 있는 견양은 특별하다. 그때 장선희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저 위 언덕의 휴양팬션에 박회장님과 함께 있을 건데… 지금도 계시는지 모르겠네. 자주 왕래를 하지 않으니. 며칠 째 연락을 하지 않아서 우리도 걱정하고 있는데…”
“가 보지는 않았습니까?”
“안 갔지요. 전화가 와야 가니까요. 도착한 첫날과 그 이틀째 날은 청소며 음식재료 준비를 하느라 갔다 왔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내일은 아침에 가 보려 해요.”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주십시요. 제가 해 보겠습니다.”
“저희는 없네요. 필요할 때 먼저 전화가 옵니다. 내 전화에는 그 번호가 찍히거나 남기지가 않아요. 전화 걸 일도 없이 잘 해 주시니… 일년에 한 두 번 내려오셔서 며칠 지내다 가시니 전화번호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어요.”
“박회장이라 하셨는데, 정확히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십시요.”
“저희도 성함을 몰라요. 그냥 박 회장님이라는 것 밖에는 몰라요.”
“요 며칠동안 본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예. 검은색 벤츠인데 도착한 후 주차된 차는 보았는데, 그 후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겨울에는 눈도 오고 길이 험하고 우리 동네 앞에서 아스팔트 길이 끝나므로 더 이상 들어 가는 차는 없어요. 박 회장님 차와 가끔 저희 남편이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줄 때 외에는. 앞 집에서도 보면 우리 집에 달려와 회장님 지나간다며 알려 주세요. 그런데 어저께부터 눈이 조금 왔는데… 왔다 갔다 한 흔적이 없네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보며 말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들이 누구든 몇 명이든 이곳에 온지 4일이 지났는데 두문불출하고 있다니. 그러면서 혜정의 전화를 받지않다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 들었다.
이 좁은 동네의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시설이 발달한 이 현대에.
“혜정아. 일어나. 우리가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지금 당장.”
내 말에 모두가 놀라서 나를 쳐 다 보았다.
“한국의 비상 전화번호는 아직 114가 맞지요?”
“예. 맞아요. 그런데…”
“제임스?”
“아하~ 너무 걱정 마십시요. 이왕왔 으니 늦었더라도 당연히 가서 만나 보는게 순서지요. 혜정이 놀라고 걱정되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나오질 못했다. 안다.
“혜정아. 혹 비상시를 대비해 확인하는 것 뿐이야. 자. 우리가 가 보자.”
우리가 장선희씨의 집을 떠나 엔진소리를 작게 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벤츠에 돌아 온 시각은 밤 6시 20분이었다. 혜정이가 받고 그리고 내가 들고 온 가방을 뒷 트렁크에 두고 좌석에 앉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임스. 카티지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어머니는 그곳에 계실까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궁금하고 걱정되어요."
나는 그런 혜정의 왼손바닥을 오른 손바닥으로 꼭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길을 덮어 길가와 길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약 15분정도 올라가니 작은 개울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나타났다. 좌측은 길이 없었다. 우측도 길이라 생각되지만 사용된 흔적이 없었다. 다리도 역시 건너간 흔적이 없었다. 나는 미리 지도를 보고 기억한 위치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우측으로 핸들을 틀어 나아갔다. 눈은 타이어가 구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좁은 길 같아서 차를 돌리기에는 위험이 따를 것이었다. 서 너번의 힘든 커버를 돌자 하얀 눈 언덕위에 물체가 나타났다. 2층 집이었다. 도로 길은 여기서 끝이었다.
앞은 낮은 산이 시작되었다. 우측에는 언덕이지만 집 앞으로 들어가는길은 있었다. 1미터 높이의 은행나무가 길 양 옆에 서 있어서 그 사이로 갈 수 있었다. 아마도 도로는 포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30미터 정도 더 들어가니 측백나무로 울타리한 넓은 앞 마당이 보였다.
대문은 없었다. 나는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집 현관 앞에 10미터 사이를 두고 들어 온 길 쪽으로 자동차 전면을 두고 주차하였다. 불은 거실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