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박사 국제정치학] "공한증 (恐韓症)과 공중증 (恐中症)"
"공한증 (恐韓症)의 역산적 유래는 1978년 12월 16일에 시작됐다. 태국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중국 대표팀이 한국 대표팀에게 0대 1로 진 것이 시작이었다. 이 패배 이후 중국 국가대표 축구 남자팀은 A매치에서 32년간 한 번도 한국에 승리하지 못했다."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는 '공한증'을 이렇게 규정해 놨다.
2010년 2월 동아시아 4강전에서 한국 대표팀에게 3대 0으로 승리함으로써 공한증은 일단 끝이났다. 그러나 진정한 공한증은 1992년 1월 30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경기장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중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때까지 전적에 따라 한국팀과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중국 국가대표팀은 휘슬이 울린 지 9분 만에 한국팀에 세 골을 먹고 1대 3으로 패해 탈락했다.
그 경기 이후 중국 국가대 (國家隊. 국가대표팀)는 국제대회이건 친선 경기이건 한국팀에게는 이기지 못해 중국 축구팬들은 "커다란 마음의 병 (一大心病)"을 앓게 됐다고 바이두는 고백해 놓았다. "이 병증은 중국 축구팬들에게 오래 계속된 심리적인 마법의 저주로 자리 잡아 지우기 힘든 고통이됐다는 것이다. 바이두는 공한증을 영어로는 '코리아포비아 (Koreafobia)라고 한다고도 소개했다.
중국 축구의 공한증은 2010년 2월 10일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4강 전에서 한국팀에 3대 0으로 완승함으로써 일단 악몽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2017년 3월 23일 중국 후난성 성도 창사시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에서 1대 0으로 승리한 것을 전후로 한국팀과 붙었다 하면 지거나 비기게되다 중국 축구의 공한증은 다시 살아나 "중국 축구 팬들에게 불쾌함과 무기력증, 심지너 억울해서 잠이 안 오는 불면증까지 안겨주는 심리 증세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필자는 1992년 한. 중 수교 이후 한신문사의 특파원으로 베이징에서 일한 기간에 베이징시 동쪽 차오양취 궁런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한국 국가대표팀과 중국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취재했다. 이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먼저 실점하고도 경기를 역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우리 대표팀의 한 선수에게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공한증을 앓고 있는 걸 아느냐?"고 물어 봤다. 대답은 "에이, 중국팀한테는 안져요"라는 것이었다.
우리와 중국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서기 6세기 무렵 벌어진 수나라와 당나라의공격을 고구려가 격퇴함으로써 승전한 기록이 남았다. 그러나 이후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1636년 12월 시작된 병자호란을 비롯해 중국의 침공을 받아온 역사를 기록해왔다. 최근에는 1950년 6월 25일에 개전한 6.25전쟁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개입한 이후 '인해 (人海)전술'이란 이름으로 기억되는 피해망상증, 다시 말해 공중증 (恐中症)을 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 측 전쟁기록에 보면 6.25전쟁 때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중국측의 병력이 한국과 미국, 유엔군의 병력보다 적었던 기록도 있다. '쏘고 또 쏴도 중공군은 끊임없이 밀려온다'는 6.25전쟁의 기억은 일종의 공중증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전체 인구가 14억 명이 넘는다지만 현재 중국의 군인 숫자는 불과 200만~300만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