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7년,올라프 1세는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웨이 원정을 강행한다.
두 아들인 올라프와 에릭을 데리고 노르웨이로 출전한 왕은 그곳에서 예상외의 저항에 직면한다.
240명의 바이킹들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한 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고,왕은 자신의 일기에 이 날의 전투를 상세히 기록했다.
[300 對 240,충분히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투였고 우리가 이겼다.
하지만 우리는 예상외의 피해를 입었다.모두가 내 실책이었다.
저들은 도저히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전진을 명령했고,숲을 지나자마자 반란군의 바이킹 1개 대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바이킹 수는 240명,저들과 같은 숫자였다.
게다가 이쪽으로 오는 바이킹은 60명,충분히 격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난 여기서 실책을 범했다.
우리의 왕실기사대를 너무 앞으로 보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반란군의 바이킹 2개 대대는 뒤따라내려오면서 왕실기사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나는 내 아들 올라프와 에릭이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해 보기도 전에,아들들은 죽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다시 한번 깃발을 들었다.
덴마크 왕국의 상징......백색 바탕에 붉은색 사자가 그려진 깃발을.......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었고,우리는 갑자기 사기가 충천.
결국 185명을 죽이고 55명과 적의 대장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우리도 127명의 사상자를 냈다.
정말 아쉬웠다.무엇보다도 아들들이 죽은 것이.......
오늘로 결심한다.내 아들들을 절대로 전장터로 보내지 않겠다고........
전쟁을 할 때는......내가 진두지휘할 것이다.......]
1099년에 북방은 평정되었고,올라프 1세는 예상 외의 관대한 조처를 내렸다.
반란군 포로를 전원 석방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원도 나중에 다시 쓰기 위해.......
그리고 왕은 새로운 국가 경영책을 구상했다.
덴마크와 스웨덴,노르웨이는 북방 해상무역의 전진기지가 될 만한 위치였다.
그랬다.북방 해상무역.
그것이 덴마크 왕국을 번영하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올라프 1세의 국가 경영책은 20여년이 지나고 나서야 결실을 맺었다.
국가 경영책이 시작된 1099년에 5천 플로린의 국고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 왕국은,
24년이 지난 1123년에 국고가 1만 플로린을 넘김으로서 결실을 맺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시도.
올라프 1세는 저 멀리 동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덴마크의 새로운 거점이 될 슬라브.그곳을 올라프 1세는 노리고 있었다.
더불어 올라프 1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갑작스레 아이들을 많이 낳기 시작했고,
그것은 덴마크 왕국에게도 좋은 미래가 되었다.
삼남이었던 크누트가 40이 넘도록 아내를 얻지 못하면서,
왕은 젊은 발데마르와 하데크누트를 노리기 시작했다.
과연 이들은......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
첫댓글 잉글랜드.. 프랑스. 양시칠리아를 점령한.. 노르만 제국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