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 영적 예배
창 4:6-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제사의 의미입니다. ‘지어 입히다’에서 ‘지어’는 히브리 원어(아사)로 ‘만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에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고서 옷을 만들어 입히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죽옷'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가죽이라는 재료가 나오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죄가 없는 동물이 희생되어 죄를 지은 인간의 수치를 덮은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제사는 모세 때 이르러 율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법으로 규정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가죽옷을 입히신 이유에 대해 율법을 통해 설명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덮어주다’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동물의 희생이 전제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덮는다는 것은 단순히 희생의 대가를 넘어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가는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불순종, 인간을 정죄하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에 모세는 돌판을 집어던졌고 결국 하나님이 써 주신 돌판을 새로 받아야 했습니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을 대하는 종교인들의 태도입니다. 저들은 분명 하나님을 믿었고 눈으로 그 기적을 목도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잠시 틈을 타서 자신들이 원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를 그들은 야웨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심었더니 하나님께서 재물을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번창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복으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종으로 만들어 놓고, 도깨비 방망이로 만들어 놓고 복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축제를 벌려놓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예배라고 합니다.
350명이 되는 중등부와 150여명이 되는 고등부에서 10여년간 교사 및 총부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찬양의 재능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찬양 예배를 드리거나 수련회에서 저들이 열광적인 모습은 정말 성령께서 뜨겁게 임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열기는 1주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정말 변화된 아이들의 모습은 열광적인 찬양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차츰 변화되어 태도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목이 터져라 찬양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라면 그것은 금송하지 앞에서 춤추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집회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며칠이 되지 않아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민 11: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어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불로 진멸하려고 했을 때 모세의 중보기도로 멈췄습니다. 그곳을 '다베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저것들을 다 베어버리라"고 천사들에게 명령하셨던 곳입니다. 백성들의 불만은 기껏 광야에서 굶어 죽이려고 끌고 나왔냐는 것이죠. 그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을 넣어 준 것이 만나입니다. 하지만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장막 문 앞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고기 생각이 나서였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는 건넜지만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구원은 받았지만 저들의 영혼은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육신의 침례와 세례를 받고 구원받았다고 안일한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습니다. 기껏 홍해를 건너고서는 마치 요단강을 건넌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착각을 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 바로 설교고 복음이며, 성경공부를 하는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제도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기에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설교자들도 범하는 오류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면 진정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창조이래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있었도 잔치에 참여한 자는 없습니다(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에 소속이 되었다고 구원은 따놓은 당상인 것처럼 거짓으로 속이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에서는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약혼을 합니다. 즉 결혼을 위한 중매가 일단락되면 뒤이어 약혼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약혼과는 달리 훨씬 더 구속력을 갖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약혼한 남자의 경우,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군 징집에서 면제가 되었습니다(신 20:7). 약혼은 공식적인 선언으로 이루어졌으며(삼상 18:22), 법적인 처리에 의해서만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약혼이 파기되는 것은 실제적으로 이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약혼기간은 대략적으로 1년 정도 지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남자는 집을 준비하게 되고, 여자는 결혼 예복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 집에서는 결혼 잔치를 준비한다.
남자는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짓거나 기존 집을 보수하거나 해서 신혼방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집이 준비되면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것입니다. 이때 신부 친구들이 신랑을 맞이하러 가는데 등을 들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슬기로운 다섯처녀의 예를 든 것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정혼한 우리들을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밤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바로 그러한 밤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거처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실 때 신랑을 영접할 수 있는 자는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정혼한 사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침례를 받음으로 법적으로 정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식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식 부부로서의 합방은 마지막 구름타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이 땅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몸과 마음이 정결한 가운데 성령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항상 말씀과 기도 가운데 있으면서 세상의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간음을 한 자는 자동으로 약혼이 파기되는 것입니다.
요 6:48-5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육신의 만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생명의 떡,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복음의 양식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고 말았지만 영혼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 자손의 반란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하나였던 고라자손이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모세가 마치 왕노릇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형인 아론까지 대제사장으로 집구석에서 통반장을 다 해 먹느냐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로로 염병으로 만 오천여명의 죽게 됩니다. 이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대제사장의 권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 열둘의 지팡이에 이름을 쓰게 하고 증거궤 앞에 두게 하여 다음 날 싹이 난 지팡이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버젖이 앉아 있는 거짓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갔지만, 저들을 추종하는 자들 역시 고라를 편들었다가 염병으로 죽은 만 오천명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귀한 은혜를 받고 염병할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모두 불순종을 의미하는 율법의 예표인 것입니다. 이 언약궤를 덮어주는 것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속죄소라는 덮개로 덮어놓으신 것이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 제물의 피를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에 부었습니다. 이 피가 1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덮개의 보호, 아니 정확히 말해서 덮개에 부어지는 희생 제물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소에 부어짐으로써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유 얻었고 너 자유 얻었으니 할렐루야, 놀렐루야 기뻐 찬양하면 끝입니까?
베드로전서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속죄소를 덮으신 주님의 피를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신다면 그 자유로서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 하십시외. 이것이 바로 썩어질 가죽 옷이 아닌 세마포 두루마기를 입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행할 바인 것입니다.
<옮긴글>
[출처] 제사와 영적 예배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