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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3-17>
13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는 말 그대로 하면, 은화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황제의 것이니 황제에게 돌려주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이 됩니다.
곧 돈은 황제에게 돌려주되, 자신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요구하니,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상을 요구하시니,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동전에는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곧 황제의 초상이 자신에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누구의 초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압니다.
곧 하느님의 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은화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황제에게 팔아 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팔려 넘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소유,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자라야 할 일입니다.
진리가 자라게 하는 일,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 그것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속한 이들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진리에 속해 있기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까닭에, 불의 앞에 눈감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진리에 속하도록 빛을 밝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제한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르며, 당신의 말씀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빛이 빛나며, 당신의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당신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저는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마르 12,17)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당신의 생명이 흐릅니다.
돈은 자신에게 새겨진 초상을 알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안에 새겨진 형상을 압니다.
돈은 새겨진 이의 것이 아니라 가진 이에게 잠시 맡겨지지만, 저는 영원토록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것입니다.
돈에는 인간이 새겨져 있어 인간에게 돌아가듯, 제게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당신께 돌아갑니다.
주님,
빛이 되어 비추는 그 어떤 힘이나 권력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새겨진 저는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발적 결핍이 주는 선물 : 경탄과 감사의 삶>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이에겐 돈도 하느님의 것이고 황제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과 황제는 하느님과 상반되는 무엇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것이지만 하느님은 당신께 합당한 것만 챙기십니다.
‘세금’은 무엇일까요?
나라의 보호, 나라의 복지와 모든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만약 탈세하는 사람이 외국에 나간다고 여권을 달라면 나라에서 만들어줄까요?
주지 않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정부가 자신의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금은 이렇듯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 알려줍니다.
나라가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그러니 나라 덕분으로 버는 것의 일정 부분을 나라의 유지를 위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금은 내가 그 나라에 속해 있고 나라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세금을 낼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듯이 하느님께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 나라에서 바쳐야 했던 세금은 선악과였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않자 그 나라에 살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나라가 아니면 우리는 살 곳이 없음을 고백하는 세금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탈세가 이어지고 주님께 십일조의 세금도 내지 못할까요?
문제는 자신이 받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 이야기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못된 소작인들은 세금도 내지 않기 위해 세금을 받으러 온 왕의 외아들을 죽입니다.
리지외의 아기예수의 성녀 소화데레사의 평전, 『빈손』에 타고르의 우화가 있습니다.
한 거지가 왕중의 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무슨 큰 보화를 주겠거니 마차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임금은 내려서 오히려 거지에게 손을 내밉니다.
거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자신이 주운 낟알 한 개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냥 떠나버립니다.
집에 돌아와 바랑을 쏟아보니 한 알이 황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애타게 울며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임께 바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거지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만 가난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 땅에 살며 낟알을 주워 먹게 한 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거지는 요구만 합니다.
나라를 잃어봐야 나라의 소중함을 알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잃어봐야 십일조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를 통해 더 봉헌하게 되고, 더 봉헌하면 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기 족 인디오는 안데스 산맥 북쪽 끝,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 산 해발 5,900미터 높이에 살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을 피해 오랜 세월 동안 외부 세계와 접촉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마마’라고 불리는 코기 족 사제들은 신점을 쳐서 장차 사제가 될 운명을 지닌 존재가 태어날 시기를 알아냅니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 위쪽의 동굴로 옮겨집니다.
젖먹이 때는 어머니가 동굴 옆에 머물면서 젖을 먹이고 보살피지만, 이후에 아이는 사제들에 의해 양육됩니다.
사제에게 선택된 아이는 9년 동안 일절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해와 달조차 볼 수 없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 깨며 버섯, 호박, 콩 등 소박한 음식만 먹습니다.
사제들은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어머니’인 알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와 종교의식을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아이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갈지, 동굴에 남아 배움을 계속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다시 9년의 교육이 동굴에서 이어집니다.
희미한 빛밖에 없는 동굴 안에서 아이는 자기 내면의 영성과 대화하는 법, 하늘과 땅의 비밀, 인간 세상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나무와 산이 어떤 모습이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바닷물이 몸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투시력이 생겨납니다.
마침내 18년의 혹독한 수련이 끝나는 날, 아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시에라 산맥의 새벽빛 속으로 나옵니다.
그때까지 관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온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나뭇잎들의 초록색 수런거림, 바위에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와 닿는 햇빛,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
경외감에 압도되어 아이는 무릎을 꿇고 위대한 어머니 알루나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대지에 깃든 신성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부족의 사제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부족 사람들에게 그 신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이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일깨우고 모든 것의 창조주께 당연한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된 사제들입니다.
사제들에게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나무와 꽃들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제를 통해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인장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그룹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하고 한 그룹은 뒤쪽에 있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건을 흘립니다.
어느 쪽이 더 물건을 흘리고 넘어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까요?
당연히 대자연에 경탄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마음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이 경탄은 약간의 절제에서 옵니다.
약간의 절제는 물에 대한 감사, 음식에 대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친구에 대한 감사 등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약해서 절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받지 않은 것에 불평하게 됩니다.
경탄하기 위해 절제합시다.
그래야 선악과를 감사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국가 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많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되지만 결국 갚아야 할 빚입니다.
보편복지를 외쳐도 실질적으로 재원 마련 대책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때는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눈앞의 것만 보아서도 안 되고 기금을 악용해 먹어도 안 됩니다.
주택 문제에 특공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서민에게는 상처입니다.
재정 건전성은 생각하지 않고 선거를 위한 선심성 재난지원금은 결국 국민의 부담금으로 되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 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 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을 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르 12,14)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내지 말라”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여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진짜 주인은 누구입니까?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황제도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오직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사랑)의 신비, 삶(사랑)의 기적 -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의 신비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하루하루가 신비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선물같은 하루입니다.
도대체 너무나 다른 우리들이 이렇게 한 수도가정을 이뤄 살고 있다는 사실도 하느님 신비의 섭리 은총이 아니곤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행복감입니다.
절로 생각나는 행복기도 두 연입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새롭고 좋은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며 때로는 읽다가 울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선물 대신 기적을, 신비를, 은총을, 섭리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실망, 절망, 원망의 삼망은 있을 수 없고 감사-감동-감탄의 삼감의 삶에, 진실-성실-절실의 삼실의 삶, 유쾌-상쾌-통쾌의 삼쾌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기분 좋았던 5월의 성모성월이 끝나자 오늘은 장미꽃 사랑처럼 화사한 6월 예수성심성월의 시작입니다.
성모성월을 아름답게 장식한 어제 5월의 마지막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이 저에겐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제 하루 많이 묵상한 말마디가 ‘영적도반’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주님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영원한 영적도반처럼 생각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1독서 토빗도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매일이 영적도반의 방문 축일입니다’, 바로 어제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따라 면담이나 고백성사차 오전 오후 뜻밖에 방문했던 분들이 아주 많았고 저는 주저없이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입니다’ 라고 기분 좋은 덕담을 드렸습니다.
어느 자매와 나눈 문답도 생각납니다.
“판단과 분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판단은 미움에서 나온 편벽된 생각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정적 일부분만 볼 때 판단입니다.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분별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을 지닌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고 사람이든 삶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람 눈에 기적이지 하느님 눈에는 일상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천상적 지혜가 바로 그러합니다.
인간적 지혜로는 세상적 지혜의 극치인 이들의 함정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라 해도 걸리고 내지 말라 해도 걸립니다.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참 대답하기가 막막합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사면초가의 위기의 순간, 기적같은 분별의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상쾌하고 통쾌하고 유쾌한 장면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런 위기에 순간에도 예수님께는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깊고 고요한 내적 평화를 지닌 예수님이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데나리온의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사실 데나리온의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아들’이란 각명이, 또 다른 쪽에는 황제의 존칭 ‘대제관’이란 각명과 함께 대비 리비아 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에 이들은 크게 감탄했다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적대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천상적 기적같은 지혜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눈에는 일상일뿐입니다.
결코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은 황제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시야를 보는 지혜를 지니고 각자 세금을 낼 것인지 내지 말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조용히 세금을 낼 것입니다.
문득 조선시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때 실리를 추구한 주화파(최명길)와 명분을 추구한 척화파(김상헌)의 대결이 생각납니다.
결국 생존이 절박한 절체절명의 순간 인조 임금은 주화파의 손을 들어 줬고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우연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본회퍼의 옥중서간에서 읽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구절도 생각납니다.
오늘 토빗의 사건이 그러합니다.
전개되는 토빗의 고난이 욥과 흡사합니다.
죽은 이를 묻어 준 선행 후 닥친 토빗의 불행이 정말 이해 불가합니다.
뜻밖에 뜨거운 참새똥이 떨어져 잠자던 토빗의 눈을 멀게 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이 또한 하느님 섭리 손길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당장은 몰랐지만 삶의 뒤안길에서 회고해 볼 때 굽이굽이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임을 깨닫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을 향한 아내의 말이 오늘 우리게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믿음의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이 그대로 토빗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시편 12,7ㄴ)
믿음의 어둔 밤을 묵묵부답(黙黙不答), 믿음으로 통과해 나가는 토빗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성월 첫날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세기 뛰어난 평신도 신학자이자 호교론자였던 유스티노 역시 ‘신의 한 수’ 같은 교회에 주신 하느님의 선물같은 성인이였습니다.
참으로 평생 가열차게 치열하게 하느님을 찾았던 구도자의 모범 성 유스티노입니다.
마침내 철학의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한 유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오래 머물며 설교와 저술로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다가 165년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새삼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이런 순교자의 삶을 통해 환히 빛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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