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봄비 속에도
생물학에 적산온도라는 용어가 있다. 식물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해 생육 일수 동안 일일 평균 기온과 기준 온도 차이를 누적시킨 합산이다. 모든 풀꽃과 나무는 이 적산온도에 따라 성장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벚꽃 개화에는 ‘600시간의 법칙’이 있다. 2월 초부터 일 평균 기온을 누적해 600시간이 채워지면 벚꽃이 핀다고 예측하는 가상학자들의 경험칙이다.
올해 진해 군항제는 예년보다 다소 이른 삼월 하순에 개막했다. 우리 지역 벚꽃 만개를 대개 사월 초로 잡아 군항제 기간을 정하는데 올해는 1주일 정도 앞당겼다. 개막을 앞두고 아침 기온이 살짝 내려간 날이 며칠 있긴 해도 600시간 법칙을 적용한다면 군항제를 당기기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군항제가 개막되고 보니 벚꽃은 아직 덜 피어 언론 구설에 올랐단다.
벚꽃 개화에 맞춰 군항제가 열려야 하기에 당국에서는 해마다 개최 기간을 정함이 고심이지 싶다. 행사를 준비하고 홍보해야 하기에 상당 기간 여유를 두고 군항제 일자가 결정한다. 올해 군항제 개최일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벚꽃이 개화하려는 낌새로 봐 적절한 시기에 열릴 듯했다. 그런데 삼월 들어 흐리고 비가 잦았던 관계로 일조량 부족으로 벚꽃의 개화 예측이 빗나갔다.
지난겨울에도 그랬고 봄이 와도 비가 자주 내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이웃 동 초등 친구 꽃대감은 뜰에다 여러 꽃을 키워 입주민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철마다 피고 지는 꽃을 유튜브 영상으로도 올려 늘어가는 구독자에게 꽃씨와 모종 나눔으로 여가를 잘 보낸다. 해마다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히말라야바위취인데 올해는 방송 소재로 삼기에 부적절해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히말라야바위취는 시베리아나 몽골 원산 범의귓과 여러해살이 초본으로 설화로도 부른다. 원산지가 증명하듯 내한성이 강해 아파트단지 북향 응달 꽃밭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아 초봄에 분홍색 꽃을 피워 눈길을 끌었다. 그러함에도 올해 히말라야바위취는 잎줄기나 꽃잎이 생기를 띠지 않았다. 추위를 좋아하는 풀꽃인데 따뜻한 겨울과 잦은 봄비는 삼복염천 동물원 북극곰과 같았다.
군항제가 끝난 사월 초순 수요일이다. 간밤부터 내리던 비는 날이 밝아와도 그치질 않았다. 수요일과 토요일 아파트단지 상가 농협 마트에서 알뜰 장터를 운영해 사장을 봐 올 일로 일찍 나서는 산책을 미적댔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무료해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로 내려서니 지상 주차장에는 밤새 비를 맞은 벚꽃은 꽃비가 되어 내려 차량 유리나 지붕은 물론 바닥도 수를 놓았다.
농협 알뜰 장터 개장에 맞추어 간식으로 삶아 먹는 고구마를 한 상자 사 집으로 옮겨 날랐다. 이후 우산을 펼쳐 곧장 소답동으로 가는 버스에서 강가로 가는 마을버스를 갈아탔다. 출근 시간대가 지나선지 승객은 한산했다. 동읍에서 주남저수지를 비켜 가니 차창으로는 빗물이 튀고 들녘은 운무가 자욱한 풍경이 펼쳐졌다. 가술 삼봉에서 내려 몇 차례 들린 대산 마을도서관을 찾았다.
수요일은 마을도서관에서 지역 어르신을 모셔 성인 문해 강좌를 운영했다. 중년 여성 강사가 세 할머니와 한 할아버지에게 한글을 바르게 익혀 표현하도록 친절하게 지도했다. 나는 열람석에서 지난번 읽다 접어둔 이승수가 쓴 ‘거문고 줄을 꽂아놓고’ 중간 부분부터 읽었다. 임란 전후 역사 인물을 대면하면서 오성과 한음, 허균과 매창, 김상헌과 최명길을 우정과 고뇌를 헤아렸다.
점심때가 되어 도서관을 나와 국숫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면사무소가 행정복지센터로 개칭된 신축 건물 현관에서 잠시 머물렀다. 계속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청사 밖으로 나가 우산을 펼쳐 쓰고 인접한 들녘 들길을 걸었다. 물방울이 맺힌 비닐하우스 안에는 농부가 정성 들인 작물이 파릇하게 자랐다. 들판에서 시골 거리를 걸어 빗속에도 오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왔다. 24.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