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으로 읽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1,조선 청년들의 지적 모험, 학문이 신앙이 되다
청년의 눈으로 읽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제1편: 조선 청년들의 지적 모험, 학문이 신앙이 되다 (자생적 천주교 성립사)
여러분은 '새로운 생각'에 온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있나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던 18세기 후반의 조선, 오직 유교(성리학)만이 절대적인 진리로 통하던 그 시절에 온 나라를 뒤흔들 신대륙 같은 사상과 만난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뇌섹남'이라 불렸던 젊은 남인 선비들이었죠.
오늘날 우리가 믿는 종교로서의 천주교(가톨릭)가 한국에 어떻게 처음 발을 디뎠는지, 그 흥미진진한 지적 모험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 북경에서 날아온 의문의 책들, '서학'과의 첫 만남
한반도에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선조(宣祖) 이후, 조선 조정이 중국 청나라 북경에 정기적으로 보냈던 사절단을 통해서였죠. 당시 사절단은 적게는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었는데, 이들이 북경을 드나들며 서양의 신기한 문물과 과학 도구, 그리고 무엇보다 '서서(西書, 서양 책)'라 불리는 한문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가톨릭 신자가 많아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 신부로 한반도 땅을 밟은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쟁 통에 우리 백성들과 신앙적인 접촉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죠. 다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중 많은 이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었고, 나중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대박해 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 순교한 역사적인 아픔은 있었습니다.
조선 내부에서 서학에 대한 호기심이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지식인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이미 세계적인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신부가 쓴 《천주시의(天主實義)》라는 책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유몽인 역시 《어우야담》에서 가톨릭 교리를 언급했고, 심지어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천주교를 믿었다는 암시가 역사 기록에 전해집니다.
인조 시절에는 병자호란의 아픔을 겪고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서양 문물과 서학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세자는 귀국할 때 천구의와 천문학 서적 등 과학 도구들은 가지고 왔지만, 천주상이나 천주교 성책 등 종교적인 물품들은 정중히 사양하며 후일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부탁했죠. 이처럼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서학은 종교라기보다,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주는 가장 첨단적이고 흥미로운 '서양의 학문(서학)'으로 다가왔습니다.
2. 눈 덮인 산사, 주어사에서 피어난 토론의 불꽃
시간이 흘러 1777년(정조 원년), 조선의 학계에 아주 조용하지만 거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경기도 여주 한강가에 위치한 호젓한 산사, 주어사(走魚寺)에 혈기 왕성하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젊은 유학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이벽,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 시파의 핵심 인물들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들은 며칠 동안 산사에 머물며 북경에서 들어온 서학 서적들을 펼쳐놓고 밤샘 토론을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양의 천문학, 수학, 지리학에 감탄하던 이들은 점차 책에 담긴 '인간의 영혼'과 '천주(하늘의 주인)'에 대한 철학적 설명에 깊이 빠져들기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열정을 품었던 청년이 바로 이벽이었습니다. 이벽은 서학 연구를 통해 단순한 학문적 지식을 넘어 깊은 신앙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안식일(요즘의 일요일)처럼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신앙적 실천을 시작했고, 동료 유학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으로 시작했던 지적 호기심이, 마침내 삶 전체를 움직이는 '종교적 신앙'으로 변모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선교사의 파견 없이 현지인들이 스스로 책을 보고 종교를 세운 유일무이한 '자생적 천주교 성립'의 드라마였습니다.
3. "북경으로 가라!" 청년 이승훈의 비밀 임무와 최초의 세례
신앙에 눈을 뜬 이들은 더 깊은 가르침과 성사(聖事)를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는 가톨릭 성당도, 신부도 없었습니다. 이때 이벽은 놀라운 계획을 세웁니다. 1783년, 정약전의 매부이자 총명한 청년이었던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사절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을 비밀리에 만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습니다.
"북경에 가거든 반드시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 신부들을 만나고, 천주교의 참된 진리와 교리를 확실히 배워 책과 물품을 가지고 돌아오게."
그해 겨울,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남당(南堂)이라 불리는 가톨릭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한자가 통했던 그는 그곳의 예수회 신부들과 필담(붓으로 글을 써서 대화하는 것)을 나누며 가톨릭 교리를 깊이 배웠습니다. 이승훈의 진지함과 열정에 감동한 서양 신부들은 그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예수회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의 집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교회의 반석이 된 사도 제자에서 따온 '베드로'였습니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4. 명례동 비밀방에서 시작된 기적
1784년 3월, 이승훈은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수십 종의 한문 교리 서적, 십자가상, 성화(예수님과 성모님의 그림), 그리고 묵주 등 진귀한 종교 물품들을 몰래 품에 안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물품들을 건네받은 이벽은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서들을 섭렵하고 성사( sacraments)에 관한 교리를 깊이 공부하면서 신앙의 확신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뜨겁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수많은 청년 선비들과 중인들이 이벽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신앙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785년 봄, 이들은 오늘날 명동성당이 위치한 서울 명례동의 중인 신자 김범우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여 비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방에서 이벽은 상좌에 앉아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법했고, 모인 이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며 가슴 벅찬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조선 땅에 최초의 자생적 천주교 신앙 공동체(교회)가 공식적으로 닻을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