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에서 들녘으로
삼월 첫 주 목요일은 간밤까지 봄비치고는 강수량이 넉넉하게 내린 이튿날이다. 지난겨울에 이어 봄이 되어도 비가 무척 잦다. 새벽에 잠을 깨 전날 거쳐 지난 자취를 따라 생활 속 글을 남겨 지기에게 메일로 넘기고 문학 동인 카페에도 올렸다. 날이 밝아와도 아직 강수의 여운이 남아 흐린 하늘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식후 산책 차림을 길을 나서 동정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 검색으로 문학 동인 카페에 올려둔 내 글방을 살펴봤다. ‘잦은 봄비 속에도’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인데 한 곳이 어색해 바꾸려다 수정이 아닌 삭제를 눌러 글 전체가 사라져 난감했다. 지기에 메일로 보낸 원본을 복사해 붙여 넣기를 했더니 제목만 등록되고 본문과 사진은 넘어가지 않아 집으로 되돌아 가 노트북을 열지 않고는 다른 수가 없어 그냥 두고 말았다.
동정동에서 대산 신전 강가로 가는 1번 마을버스를 탔더니 출근 시간대여서 서서 가야 했다. 가술에는 산업단지와 고등학교가 있어 회사원과 학생들이 다수였다. 나도 자연학교로 등교하는 처지라 학생 신분임을 마찬가지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승객 몇을 더 태워 용강고개를 넘어갔다. 동읍 주민복지센터를 지나면서 승객이 몇 내리고 학생은 더 늘어 주남저수지를 비켜 달렸다.
산업단지가 가까워졌을 때 빈자리가 생겼는데 동남아 청년이 나를 보고 앉으라고 해 기특하고 고마웠다. 대산면 소재지 가술을 지나자 승객은 거의 내려 모산에 한 아낙이 하차 후 나 혼자 종점을 얼마 앞둔 제1 수산교에서 내렸다. 강둑에 서니 옅은 운무에 수산교 건너 높은 아파트가 드러났다. 4대강 사업으로 조성된 강둑 자전거 길 가로수 벚나무는 벚꽃이 활활 피어 절정을 맞았다.
시내보다 늦게 피어난 벚꽃의 열병을 받으며 강둑을 따라 걸어 본포로 향해 올라갔다. 둔치는 창원 시민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강변 여과수를 퍼 올리는 취수정이 있는 곳이다. 드넓은 둔치에는 물억새와 잡목이 우거져 밀림을 연상하게 하는데 야생으로 자라는 복숭아나무도 군락을 이루었다. 벚꽃보다 조금 뒤처져 피는 복사꽃이 개화가 시작되니 무릉도원을 보는 듯 꽃구름이 일어났다.
오래전 국가하천 둔치 강변 모래밭은 단감이나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모래를 퍼낼 때도 거기는 시민 식수원이 될 취수정으로 남겨두었더랬다. 상류로부터 어딘가 씨앗이 떠내려와 자랐는지, 아니면 예전 과수원 복숭아나무가 퇴화했는지 둔치는 복숭아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연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두어 달 후 유월 초순이면 매실처럼 풋열매들이 맺어질 테다.
여과수 정수장을 지나다 한 노인이 내 뒤를 따라와 인사를 건네니 본포에 사는데 올해 여든여덟 살이라 했다. 활천 배수장 근처 살았던 소프라노 조수미 조부를 아느냐 여쭈니 지역 사정에 훤해 지금도 거기 숙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노인은 아주 정정했는데 조수미 모친이 시집가기 전 살던 마을 이웃에 산다고 했다. 옥정교차로에서 노인과 헤어져 새로 뚫린 찻길 언덕으로 갔다.
어디선가 흙을 실어 날라 둑을 쌓아 길을 낸 언덕에 야생초 방가지똥이 자랐다. 이미 두 차례 채집해 꽃대감 친구한테도 보내 봄나물로 삼아 잘 먹고 있다. 배낭에 넣어간 칼을 꺼내 방가지똥 멱을 따니 하얀 유액이 나왔다. 꽃봉오리가 솟아 쇠는 것을 제외하고 여린 순만 골라 잘라 봉지를 채워 들길을 걸었다. 수박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단지와 노지에 심어둔 감자밭을 지나왔다.
한 농부가 겹으로 둘러씌운 보온재 비닐을 걷고 있었다. 낮 기온이 높아져 비닐 한 겹은 벗겨주었다. 잦은 봄비를 염려한 인사를 건넸더니 보다시피 넝쿨만 뻗어가고 수박이 맺히지 않는다며 시름이 컸다. 감자밭은 지금쯤 잎이 너풀너풀 자랄 때인데 싹도 트지 않고 이랑에 빗물이 고여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대파값 파동에 이어 수박이나 감자 시세도 오름이 분명할 듯하다. 24.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