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사진〈Pinterest〉
눈 오는 날의 갑갑함
김 혜 순
머얼리 소리치면
소리가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돌아와요
가슴속에도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길도 있어요
그 산속에 바닷속에 길 속에
돌들이
흩어져요
수천 개 수억 개
흩어져 떨어져요
머얼리 소리쳐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나 봐요
눈 오는 날 노래 부르면
눈에서도 귀에서 입에서도
돌이 쏟아져요
속에서도 밖에서
돌이 내리고
아무도 태양을 보지 못해요
눈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그 눈물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얼려요
눈 내리는 밤 얼어붙은 사람처럼
내 몸에 꼭 맞는 감옥이 있나봐요
잠에서 깨어나 감옥의 목구멍 밖으로
소리를 지르지만 입술이 얼어붙어요
비명이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소리마다 생각이 들러붙어 떨어져 나가질 않아요
나 팔,내 팔, 내 파아......내 파아알
파아아아아알 치워줘요
혀는 구들장 밑에 숨어버렸나봐요
눈물이 처마 밖으로 얼어붙어요
누가 커튼을 걷고 나갔나요?
커튼 밖에는 아침마다 날 들여다보는
창문보다 큰 눈동자 하나
내 방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네요
반쯤 얼어붙은 새 한 마리
그 눈동자를 가로질러 떨어지네요
세상으로부터,이 세상으로부터
제발 죽어 넘어가게 내버려둬요
나는 나라는 덫에 걸린 무거운 새인가봐요
홈에 끼인 레코드의 바늘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내 몸이 얼어붙은 본드 주머니처럼 나를 조여요
도와줘요 도와줘요 의사선생님 도와줘요
아아,제발,당신들의 칼로
이 판화에서 나를 꺼내줘요
* 에우리디케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의 아내. 어느 날 강가에서 아리스타이오스에게 쫓기다가 독사에게 물려서 죽었다. 오르페우스는 매우 애통해하며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인 하데스로 갔고, 온갖 노력 끝에 에우리디케를 이끌고 지상으로 되돌아왔으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깜박 잊고 돌아보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하데스로 떨어지고 말았다.
- <제3회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앙일보 문예중앙, 2003
사진〈Pinterest〉
풍경 중독자
김 혜 순
풍경이 나를 거닌다
내가 밤의 풍경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비오는 오늘 밤, 풍경이 침대 위에서 돌아눕는다
풍경은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소름이 돋아 우둘두툴한 풍경
두 팔로 껴안아도 여전히 온몸 떨리는 풍경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요?
비 쏟아져 들어가는 지하도를 옆구리쯤에 품은 풍경
그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녹슨 철골들이 산발한 채 붉은 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아래 입을 쓱 닦은 깨진 유리병이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
그곳, 우산도 없이 내가 서 있는 밤의 풍경
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멀리 안 보이는 관악산이 비켜서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풍경에게도 깊이가 있나 봐요
나날이 풍경이 깊어져요 명치 끝을 파고 들어요
호흡이 바뀔 때마다 풍경은 바뀌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방이 녹아서 강물에 떠내려가요
왜 고통이 몸 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안에서 밖으로 내뿜어지는 풍경 속
나는 어째서 녹물을 칙칙 뱉는 짓다 만 우정병원 콘크리트에
기대고 서 있는지 비는 철썩철썩 내 뺨을 갈기고 있는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뀌어버리는 예민한 풍경의 살갗
그래, 이제 그만 풍경의 문을 닫아 걸자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비 오는 밤의 풍경이 내 두 팔 안에서
나 없이도 울고, 나 없이도 헐떡거린다
비 오는 밤, 풍경의 한복판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벙어리 여자처럼 큰 소리로 울며 내가 지나갔지요
먹구름이 몇 가닥 얼굴 위로 흘러내려요
언제나 한 장의 표면밖에 가진 것이 없는
그런데, 이 풍경의 출구는 어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