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고향, 충주를 가다
글/심상우 (게재 : 세상을 잘 알게 도와주는 기행문)
글을 쓰다가 잘 써지지 않을 때, 작가들마다 하는 버릇은 아주 많다.
내가 잘 아는 한 작가는 밥을 많이 먹고, 내리 이틀을 꼬박 자고 나면 글이 술술 풀린다고 했고,
또 어떤 작가는 동네와 이웃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목욕을 한다.
하루에 목욕을 두 번이나 세 번쯤 하면 글이 풀리기도 하고 그래도 안 풀리면 목욕을 다섯 번쯤 한다.
하루에 목욕을 다섯 번씩 동네를 옮겨 다니며 한다는 말을 듣고 많이 웃었다.
나는 글을 쓰다가 잘 써지지 않으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여행을 떠난다.
아무런 계획도, 어디로 간다는 생각도 없이.
어느 때는 기차를 타고 어느 때는 무작정 걸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가서,
풀밭이나 바위 옆에서 쉬다가 보면 생각이 술술 풀린다.
그래서 나는 글이 안 써질 땐 ‘여행’을 한다고 누구에게나 말해준다.
여행은 글 쓰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서 나만의 큰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은 즐겁다. 물론 나도 글과는 상관없이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고향 충주를 찾기로 한 날은 잔뜩 흐려 있었다.
서울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세 갈래 길이 있다.
그 세 갈래 길 가운데 나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여주에서
감곡 인터체인지를 지나오는 길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음성군에 속한 감곡만 지나도 나는 벌써 고향의 냄새를 맡게 된다.
감곡만 해도 어릴 적 친구를 따라 놀러 다닌 곳이기도 하다. 감곡으로 들어서자 날씨가 맑아졌다.
감곡을 조금 지나면 바로 충주시에 속한 앙성, 가금, 엄정에 닿게 된다.
내 고향은 정확히 말해서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야동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추, 담배, 밤, 사과 농사를 짓는 산촌마을이다.
고추, 담배, 밤, 사과는 충주의 특산물이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장 많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야동 집 주변과 초등학교, 양촌 남한강과 동막, 구룡리 같은 곳이다.
지금은 너무 낡아 곧 쓰러질 듯한 시골집도 한 때는 포근한 보금자리였으며 꿈의 터전이었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 좋아하는 내가 저녁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를 무렵이면 어김없이 돌아왔던 집.
동네의 모든 집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집도 황토벽으로 되어 있었으며,
나무를 아궁이에 때서 밥을 하고 구들장을 덥혔다.
동네 어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곳은 나와 친구들은 놀이터였다.
봄이면 느티나무 구멍 속에 새들이 알을 낳았다.
어른들은 새알 속에서 새끼가 나와 자라서 큰 새가 될 때까지 잘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쳤다.
40여 년 전에 무슨 환경보호니 하는 그런 거창한 말은 배우지 못했어도,
곤충이나 새, 짐승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은 중요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만 일곱 살 때, 홍역을 앓게 되어 나는 만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운동장은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넓은 뜰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학교의 교실 천정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방위 표시가 되어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초를 구해다 마루에 문질렀다.
초를 칠해 놓은 마룻바닥은 반들반들 윤이 났으며, 우리들은 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때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은 소풍을 갔던 일이다.
우리는 소태 면소재지가 있는 청룡사 주변이나 목계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
목계는 여름이면 물놀이도 하고 장마라도 지면 물 구경을 다닌 나루터가 있는 동네였다.
나루터에는 뗏목 배와 나룻배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목계 솔밭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목계 쪽에서 솔밭을 건너다보면 그곳은 신비함을 품은 푸른 섬처럼 빛나고 있었다.
솔밭에서 하는 술래잡기와 보물찾기는 어린 시절 최고의 즐거움을 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엔 ‘우리 고장에 대해서 알아오기’
숙제를 하기 위해,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를 돌아다녔다.
우리 동네에서 20여km 안팎으로 가면 충주시와 주변 동네를 죄다 둘러볼 수 있다.
나는 친구 찬이와 함께 가금면에 있는 중앙탑을 보러갔다.
중앙탑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뒤에 나라의 중앙에 세운 탑으로 국보 제6호이다.
정식 명칭은 ‘중원탑평리7층석탑’인데 우리는 그냥 ‘중앙탑’이라고 불렀다.
중앙탑은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크고 우람한 탑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어릴 때 보았던 그 탑이 우뚝 자라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탑을 새로 쌓으면서 탑 아랫부분을 훨씬 크게 북돋워서 그렇게 보였다.
중앙탑은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보아도 역시 감동적이다.
중앙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구려비’가 세워져 있다.
고구려비는 어릴 때 보지 못한 것인데, 1979년 발견하여 1981년에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남북한을 통틀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 시대 비석이라고 한다.
이 비석이 발견되어 옛날 삼국 시대에 충주가 고구려 땅이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었다.
충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역시 탄금대를 빼놓을 수 없다.
탄금대에는 애달픈 전설이 몇 가지 전해져 온다.
먼 옛날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와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 바로 탄금대라고 한다.
탄금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남한강이 굽이쳐 돌아가면서 커다란 호수를 만들어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
그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 ‘감자꽃 노래비’라고 불리는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이 시비를 처음 보았을 때, 나와 친구들은 모두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무나 쉬운 시 구절을 만만히 보고 웃은 것이다.
자주 감자나 하얀 감자나 너무도 당연한 걸 가지고 저렇게 시비를 만들어 놓았다싶어서 웃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모두 숙연해졌다.
‘감자 꽃’ 시를 쓴 권태응(1918~1951) 시인은 일본인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당하면서 일본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일본 사람일 뿐이고,
조선(한국) 사람은 조선 사람이라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한 시가 바로 ‘감자 꽃’이라고 했다.
그리고 좋은 시는 아주 쉽고 단순하지만, 진실하고 분명하다고도 하였다.
감자 꽃 노래비와 함께 탄금대의 명소로는 열두대가 있다.
열두대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8천 명의 군사들과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다.
열두대는 바위 절벽에 열두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신립 장군이 전쟁 중에 몇 번씩 오르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보기에는 매우 가파르고 위험스러워 보여 위급했던 전쟁 중에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싶다.
열두대에서 보는 강변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고 물의 흐름이 마치 가야금 소리에 흔들리는 듯이 보인다.
탄금대에서 충주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 가로수로 사과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가을이면 길가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풍경도 충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충주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수안보와 새재가 나온다.
수안보는 고려시대부터 알려진 유황 라듐 온천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 해마다 섣달그믐 무렵이면, 수안보 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가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뜨거운 온천탕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누런 베수건으로 몸의 때를 문지르면
삼 껍질처럼 밀리는 때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몸은 얼마나 상쾌했던가!
수안보에서 12km쯤 가면 월악산이 보이는 곳에 미륵사 절이 있던 곳이 나온다.
미륵사지라 불리는 절터엔 이리저리 흩어진 돌 조각들이 절이 있던 곳임을 말해주고,
북쪽을 향해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돌미륵부처는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넉넉한 웃음과 천년 동안 변하지 않는 믿음을 준다.
그 넉넉한 돌부처의 웃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수안보로 돌아왔다.
이제는 현대식 시설로 바뀌어 훨씬 넓어진 온천 탕 안에 들어가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맡겼다.
온몸에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 없어진다.
새삼 고향의 품에 안긴 푸근함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맛있는 사과와 따뜻한 온천이 있는 내 고향 충주를 어찌 아니 사랑할 수 있으랴!'
* 책이름 : 세상을 잘 알게 도와주는 기행문
* 출판사 : 어린른이
* 글 : 심상우, 김해원, 박영란
* 사진 : 이인, 황윤구, 정진규, 서찬석, 고래박물관, 영주시청
첫댓글 11월 문학기행이 고향 <충주, 권태응, 중앙탑>이어서 여행 가시기 전에 한번 보시라고...
맛있는 사과와 온천욕! 둘 다 매력 있네요.
탄금대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
아 더불어 책 광고도.... ^ ^
미리 문학기행 답사를 해 주시는군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