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잘난 체하는 남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칫! 만인의 연인이 되면 뭐해? 한 사람의 지애비만 되면 되지."
만인의 연인이라는 말에는 왠지 한량기가 살랑살랑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인의 연인이면서도 도덕적 지탄을 받기는커녕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나이가 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이 땅의 삼 사십대의 여성들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다.
과연 그대들의 첫사랑은 누구였느뇨? 여고시절 총각 선생님, 아침마다 123번 시내버스에서 마주치던 교모 푹 눌러쓴 남학생, 혹은 신발집 막내아들 봉출이....대답도 가지가지일 거다.
하지만 7~80년대에 사춘기의 돛을 올린 소녀들은, 공산주의자 마냥 첫사랑도 공유했다. 그네들의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예찬이라도 하듯 노래한 어느 아담한 사나이.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 주던 그 소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 대중가요 '단발머리'를 들으며 착각하는 여학생이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시민회관 공연때 내가 꽃다발을 준 걸 기억하고 만들었을 거야..아이, 오빠아, 몰라 몰라."
그들의 오빠는 바로 인기가수 조용필. 그는 만인의 첫사랑이었다. 당시 단발머리 소녀들의 공부방은 용필이 오빠 사진으로 도배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TV가이드, 여고시대, 여학생 같은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을 벽에 붙여 신주단지 모시듯 했으니 말이다. 여드름만 짜는 아들과 밤낮 가수만 쫒아다니는 딸 때문에 속이 탔던 우리의 엄마들이, 급기야 입에 담아서는 안될 심한(?) 말을 내뱉았다.
"이 웬수야? 너 조용필이 신(神)을 모셨어?"
사실, 조용필에 대한 소녀팬들의 감정은 거의 북한의 김일성 우상숭배에 필적했다. 북조선 인민들이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듯, 남조선 소녀팬들은 조용필 생가(?)에 진을 쳤다. 그저 얼굴이라도 한 번 보면 "영광입네다"였고, 찰칵 사진까지 찍으면 "죽도록 충성하겠습네다"였다. 조용필 당(?)에 대한 충성심이 그 정도였으니, 어디 혜성처럼 나타난 가수 이용이나 춤추는 삼인조 그룹 소방차에게 눈길 한번 줄 쏘냐. 당시 극성소녀팬들은 요즘 말로 하자면 어지간히 추접(?)을 떨었다. 조용필 생가 근처의 세탁소까지 달려가 숨 넘어갈 듯 졸라대는 말인즉슨,
"아저씨, 오빠 옷 어딨어요?"
마음씨 넉넉한 아저씨는 단골손님인 인기가수 조모씨의 양복이며 기지바지를 건네준다. 옷가지를 받아든 소녀들, 남정네 윗도리 아랫도리 가리지 않고 걸쳐보고 뺨에 대보고, 흠흠 냄새까지 맡았다. "아, 오빠의 냄새야."라면서. 십몇년을 같이 살아온 친오빠와는 허구헌날 으르렁거리면서, 호적에도 없는 나이많은 아저씨를 오빠 오빠하며 더 살갑게 부르던 그들이었다.
참, 옷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당시 쇼프로그램을 보면 특히 남자 가수들의 차림이 좀 이상했다. 흥겨운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자주 입고 나왔다. 그런데 양복은 양복인데, 뭐랄까? 새노랗고 새파랗고 새빨간 이상야릇한 생상이어서, 도대체 어디서 저런 제비 스타일의 양복을 구했을까 궁금할 정도였다. 조용필도 그랬다. 알고 보니 군사정권은 대중가수들의 복장까지 시어머니처럼 단속을 했기에 점잖은 양복을 입었다고 한다. 게다가 칼라 TV가 보편화되면서, 가수들도 시청자들에게 나름대로 신경을 쓰느라 제비같은 양복을 입었던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조용필 신드롬은 단발머리 소녀들에게만 있었던것은 아니다. 당시, 삼천리 방방곡곡 조용필의 아류들로 넘쳐났다. 가무를 사랑하는 조상님들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들은, 부모님이 계모임하러 간 친구집으로 집합했다. 우선 커튼을 쳐 방을 제법 컴컴하게 만들어 무대 비슷하게 연출했다. 칙칙한 방에 빙 둘러앉은 우리들, 드디어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잠깐동안이라도 김용필, 박용필, 최용필이 되어 보았다. 창 밖의 여자,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등 조용필의 주옥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어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워미워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 돌아와요 부산항에, 대전블루스....다 그들의 영원한 애창곡이지 않은가? 조용필 신(?)을 모시고, 조용필 당의 충성 당원처럼 콘서트를 쫒아다니던 아들 딸들이 마음에 좀 안들긴 했어도, 연말이면 저녁밥상을 물리고 온가족이 MBC 십대가요제를 시청했다. 얼굴이 넓적하니 관상이 좋아 보이는 차인태 아나운서가 주로 사회를 본 것 같다. 그 해의 최고 가수 열명이 차례로 히트곡을 열창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것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어도, 가족들이 어쩌면 그렇게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지....게다가 조용필에 대한 호칭도 세대별로 달랐다.
"어머나, 필이 오빠 웃는 것 좀 봐, 너무 귀엽지?'
철없는 딸은 주로 외모에 집착을 한다. 반면 한 두살 더 먹은 아들은 뭐 좀 아는체를 한다. 게다가 그가 자기 음악제자쯤 된다는 듯이 반말을 하면서,
"조용필은 음악성이 좋아. 노래에 힘이 있다구."
가만히 듣던 우리의 아버지들, 그냥 잠자코나 계시지, 꼭 분위기를 깬다.
"조 용필이가 돈은 많이 벌었다지?"
그러면 돈 얘기 궁합이 착착 맞는 어머니들 왈,
'글쎄, 조용필이가 돈 벌어서 부모님한테 큰 집 한채를 사줬대요."
"효자네, 효자야."
맞장구를 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 왠지 씁쓸한 표정 감출 수 없다. 아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연습장 가득 조용필의 노래 가사만 베껴 적는 딸 아들이 걱정스러웠을테지. 드디어 가수왕 발표시간. 둥둥둥.......마상원과 음악벤드가 들럼을 치며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한다. 손에 흰 쪽지를 든 차인태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했던 말을 또 한다.
"제가 떨리는군요."
다시 한 번 둥둥둥.....마이크를 바짝 갖다댄 차인태가 외친다.
"올해의 MBC 십 대 가수왕."
숨 한번 쉬고.
'조. 용. 필."
이때 카메라는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드는 조용필을 클로즈업시킨다.
정말이다. 조용필은 왕이다. 한국 가요계의 킹이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노래보다는 탈런트적인 잡기를 더 강조하는 요즘 가수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70년대부터 80년대, 거의 이 십년동안 한국 가요계 최고봉이었던 그는 한국대중가요사의 백두대간이나 다름없다. 촛불, 친구여,.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허공, 서울서울서울, Q.....어마어마한 히트곡도 그렇거니와 , 발라드, 트로트, 락, 소울, 전통민요, 심지어 동요까지 아우르는 그의 음악세계는 가히 깊고 광범위하다. 팬들의 층을 보더라도 모든 사회적 경제적 경계가 다 무너진다. 즉 , 남녀의 구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빈부. 지성인과 일반 서민의 구분이 없다. 뛰어난 가창력과 깊이 있는 노랫말은 모든 계층과 세대를 하나로 만들었다. 조용필의 이런 거대한 영향력을 대한민국 어느가수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90년대부터 주로 라이브 공연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왔다. 어느덧 그이 음악인생은 35년이나 되었고, 예전의 용필이 오빠는 나이 쉰을 훌쩍 넘겨 지긋한 중년이 되었다. 아울러 그와 결혼하는 꿈을 꾸던 단발머리 소녀들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 학부형이 되었고, 그의 노래를 모창하던 여드름투성이 남학생들은 이 땅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삼, 사십대의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은 어른이 되었어도, 조용필 팬클럽에서 알 수 있듯이 조용필 당(?)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영원하다.
시대별로 어떤 가수가 최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는 조용필의 전성기때 음악이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음악은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요즘 대중음악은 세대별로 나눠져 있다 앞으로 갈수록 심화 될것이다 그래서 조용필의 음악이 대단한 것이다 조용필이전의 음악은 불완전했고,대중적으로도
첫댓글 모두 맞는 말이네요...우린 영원히 필오빠를 사랑합니다......
시대별로 어떤 가수가 최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는 조용필의 전성기때 음악이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음악은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요즘 대중음악은 세대별로 나눠져 있다 앞으로 갈수록 심화 될것이다 그래서 조용필의 음악이 대단한 것이다 조용필이전의 음악은 불완전했고,대중적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