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엘리스 데럴이 파파라치 사진에 등장했을 땐 정말 당혹스러웠다. <보그 걸>의 패션 에디터 한 명은 그녀의 사진을 보고 ‘크레이지’를 연발했고, 또 다른 에디터는 “무서운데요”라는 한 마디 말로 그녀의 스타일을 일축해버렸다. 징, 메탈,스파이크가 액세서리부터 옷까지 어느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정신없이 붙어 있는 초강력 배드 걸 룩은 같은 시기에 등장한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부푼 머리보다도 쇼킹했지만, 왠지 모르게 1980년대 장 폴 고티에의 코르셋을 입고 나온 마돈나를 연상시켰다. 속옷 위에 아우터를 입어야 한다는 패션의 기본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던 콘 브래지어는 걸들은 사랑스러운 룩을 입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엘리스 데럴의 배드 걸 스타일과 다른 듯 닮았다. 나는 엘리스 데럴의 옷을 보면서 장 폴 고티에가 “나는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그것은 모두 아름답다.개성만큼 훌륭한 소재는 없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예쁘다거나 무섭다거나, 어떻게 판단을 내리든 그녀의 스타일에선‘난 이런 사람이에요’라는 그녀만의 개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엘리스 데럴과 그녀의 친구들(픽시겔도프, 켈리 오스본) 같은 몇몇 소수의 걸들에게만 인기가 있을 것 같던 배드 걸 룩은스트리트의 유행을 넘어서 어느새 디자이너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배드 걸만을 위한 컬렉션을 여는 것처럼 느껴지는 알렉산더 웽, 도깨비 뿔처럼 삐죽 솟은 어깨 하나로 단번에 패션계의 트렌드를 바꿔버린 발맹, 검정 그물 스타킹과 아찔한 코르셋으로 S&M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X등급 컬렉션을 선보인 장 폴 고티에, 바이커 재킷으로 무장한 밀리터리 전사들이 쏟아져 나온 피, 징과 스터드 장식의 스커트와 팬츠가 없인 컬렉션 착장이 맞춰지지 않는 로베르토 까발리, 그리고 전통적인 쿠튀르 하우스도 시대에 발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걸 몸소 실천하며 크리스털과 지퍼, 징 장식의 모던하고 섹시한 배드 걸룩을 선보인 에밀리오 푸치까지…. 이번 시즌 배드 걸루킹을 선보인 디자이너들은 너무 많고 스타일도 다채롭다.
펑키한 참 목걸이. 리지다 디아즈 꼴리에 포 클럽 모나코 제품. 가격 미정.
Funky Accessories 이런 디자이너들의 고민은 옷 대신 액세서리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아무래도 파워풀한 옷보다는 액세서리들이 더 실험적일수 있고, 스타일링 효과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컬렉션에서 드러난스타일을 봤을 때 디자이너들의 해결책은 슈즈와 백에서 시작된것 같다. 일단, 슈즈 먼저 살펴보자.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췄다. 화려하게 장식을 할 것, 그리고 무조건킬 힐로 만들 것.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단 1cm의 여유도 없이 스파이크로 빼곡히 장식된 아찔한 슈즈를 선보였고, 발맹과 알렉산더 웽은 볼드한 버클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앵클 부츠, 소피아 코코살라키는 메탈 소재의 그물로 장식된 밀리터리 부츠, 그리고 알렉산더 맥퀸은 부츠의 뒷부분을 따라 스파이크를 장식한 펑키한 부츠를 배드 걸 룩의 포인트 액세서리로 활용했다. 이 모든 슈즈들이 전부 10cm 이상의 아찔한 킬 힐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장식이 많고 화려하다는 점에선 백도 마찬가지다. 구찌는 메탈소재의 가죽에 스터드 장식을 한 글래머러스한 백을 80년대의펑키한 룩과 함께 믹스매치했다. 프라다는 가죽 술과 스터드로 장식한 파워풀한 밀리터리 백으로, 두리 정은 물이 흐르는 듯곡선을 이루는 지퍼 장식이 유려한 체인 백으로 포인트를 주었다.이게 전부가 아니다. 배드 걸 룩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아하고 페미닌한 디자인을 선보인 컬렉션까지 전부 펑키하고 터프한백과 슈즈를 매치했다. 이번 시즌 샤넬은 니트웨어를 위주로 러플과 리본의 사랑스러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거의 엉덩이까지 오는 싸이하이 부츠와 함께 스터드 장식의 백팩으로 룩과는 정반대의 액세서리를 믹스매치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컬러풀한 스타킹과 도트 프린트로 여성스러운룩을 선보인 엠마누엘 웅가로 역시 스터드가 장식된 펑키한클러치를 색색깔로 선보이며 젊고 감각적인 스타일을 연출했다.백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손으로 넘어갔다. 터프함을 드러내는 데 장갑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트렌디한 것은 손가락이 잘려진 터프한 가죽 장갑을 위주로라거펠트처럼 커다란 금속판을 덧댄 파워풀한 밀리터리 장갑이거나, 이세이 미야케처럼 가죽패츠워크의 펑키한 장갑이다. 이런 장갑에 볼드한 금속감이 느껴지는 뱅글이나스터드 장식의 팔찌를 함께 매치해 파워풀한 느낌을 가미하는 것이 배드 걸 액세서리를 제대로 매치하는 방법이다. 목걸이같은 경우엔 디자이너들이 조금 몸을 사렸다. 개 목걸이를 연상시키는 무서운 스파이크 가죽 목걸이는 리얼웨이에선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막상 컬렉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대신 디자이너들은 체인에 눈을 돌렸다. 루이 비통의 약간 키치한 골드 목걸이와 스터드 목걸이를 비롯해 마이클 코어스의 볼드한 체인 목걸이는 펑키한 느낌을 살려주는 에센셜 아이템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올 겨울에 빼놓을 수 없는 액세서리인 벨트 역시 배드 걸 액세서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앤드멀미스터의가죽 버클 벨트는 아방가르드한 밀리터리 룩에 적당하고,칼 라거펠트의 열쇠 벨트는 중세 시대의 정조대를 연상시키며 섹시한 관능미까지 느껴진다. 소피아 코코살라키의 스터드 장식 골드 벨트는 배드 걸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스타일이다.액세서리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이번 시즌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배드 걸 액세서리를 적어도 하나씩은 선보였다는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옷보다 더 다양한 배드 걸액세서리들이 우리에게 던져진 셈이다.
CHARLES ANASTASE
BANGLE & SHOES
Styling Knowhow 액세서리 하나만 바꾼다고 전체적인 스타일을 변화시킬 수있을까? 단순히 펑키한 백을 들고, 화려한 장식의 신발을 신는다고 스타일이 바뀔 수 있을까? 배기팬츠를 입고 싶고 블랙 가죽 블루종을 입고 싶고, 스키니 진에 싸이하이 부츠를 신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이 전부 어울리지 않는 나로서는 쉽게 답이나오지 않는다. 물론 엠마누엘 알트의 시크하면서 파워풀한 룩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무심한 듯 시크한 룩을 더 잘 살려주는 배드걸 액세서리의 유행은 쌍수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배드 걸 액세서리는 어느 것부터 시도해야 할지 엄두가나지 않는다. 화이트 셔츠와 블랙 스키니 진에 펑키 한스터드부티를 신고, 알렉산더 웽의 스파이크 백을 든 편집장, 배기팬츠에 아찔한 글래디에이터 부티를 신고, 어깨에 재킷을 걸친 패션 디렉터, 가죽 블루종과 짧은 원피스를 입고 싸이하이 부츠와 파워풀한 체인 백을 멨거나, 귀여운 빈티지 드레스와 쇼트 코트에 크레이지한 옥스퍼드 슈즈와 백을 멘 패션 에디터…. 스트리트패션 사이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파리 [보그]나 [틴 보그]의 에디터들처럼 <보그 걸> 패션팀의 모습도 대강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 속에 내가 있는 건 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한 번 시도는 했었다. 촬영하면서 마음에 드는, 징이 박힌 부티와 지퍼가 장식된 롱 부츠를 들고 몰래 메이크업 룸에 들어가문을 잠그고 신어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말 ‘못 볼 걸 봤다’였다. 징이 박힌 부티는 종아리만 도드라져서 안 그래도 작은 키에 다리가 더 두껍고 짧아 보였고, 지퍼가 장식된 롱 부츠는어린아이가 엄마의 부츠를 신은 듯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배드 걸 액세서리를 활용하는 것뿐인데도 왜 어울리지 않을까? 무엇보다 작정하고 배드 걸인 척 연기하는 게 티가 나는 것이 문제였다. 신발을 신고 있는 나도 어색해했고, 헤어스타일이나 그때 입고 있던 데님 팬츠와 박시한 후드 집업 점퍼는 배드 걸액세서리와 매치했을 때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배드 걸 룩을 시도할 땐 가장 먼저 옷부터 생각해야 한다. 컬러는 블랙, 차콜, 네이비, 브라운 같은 진중한 톤으로, 소재는 적당한 광택의 가죽이나 두툼하고 매트한 울 소재같은 텁텁한 것을 선택하고, 이런 옷들의 무게를 덜어줄 열쇠로배드 걸 액세서리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배드 걸 액세서리의펑키하고 파워풀한 매력을 부담스럽지 않게 살릴 수 있다.다른 패션 피플과의 수다는 몇 가지 팁을 가르쳐주었다. “배드 걸액세서리 중에서 가장 소화하기 쉬운 건 슈즈예요. 지난 시즌에이미 글래디에이터 슈즈가 유행했잖아요. 파워풀한 배드 걸슈즈는 그 연장선으로 보면 돼요. 그래서 앵클 부츠보다는 부티가, 롱부츠보다는 미디 길이의 부츠가 더 소화하기 쉬워요.스파이크보다는 스터드 장식이 더 무난한데 체인 술 장식이 달린스타일의 부츠도 생각보다 소화하기 어려운 아이템은 아니에요.” 패션 홍보 담당 이예리는 평소에도 파워풀한 슈즈를 좋아했다.“배드 걸 룩이 부담스러운 걸들에게 어울리는 파워풀한 슈즈의 스타일링 방법은 사랑스럽거나 럭셔리한 아이템간의 믹스매치가 포인트인 것 같아요. 이번 시즌 질 스튜어트만 봐도 특유의하늘거리는 시폰 원피스와 퍼 코트에 터프한 레이스업 롱 부츠를 매치했잖아요.” 올 겨울에 유행하는 스타킹은 파워풀한 슈즈를도와주는 훌륭한 조력자다. “여성스러운 레이스 스타킹이나 검정 망사 스타킹은 펑키한 기운이 넘치는 배드 걸 슈즈에 잘어울려요.” 패션 에디터 서재희는 터프한 백을 선택할 땐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알렉산더 웽의 밑바닥에스파이크를 장식한 백과 이브 생 로랑의 Y자로고를 징으로 장식한 펑키한 백처럼 터프한 디테일의 백이 많이 등장했지만,너무 과도한 장식이 있는 건 피하는 게 좋아요. 백은 일단 보는 사람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액세서리잖아요. 그래서 스파이크처럼 강렬한 디테일을 선택할 땐 미니 숄더백이나 클러치 백이 좋고, 빅 백엔 스터드 장식이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터프한 백을 스타일링할 땐 가죽 옷과 매치해야 실패할 확률이 적어요.” 하지만 가죽 블루종이나 미니스커트, 팬츠에 터프한 백을 매치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캣워크라면 모를까 리얼웨이에서 그렇게 입었다간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내 주위를 피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전혀오버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재킷에 가죽 레깅스, 거기에터프한 숄더백을 멘 스타일은 파리 시크의 전형이고, 펑키한가죽 블루종에 쇼츠, 찢어진 블랙 스타킹과 스파이크 백은 런던걸들의 시그니처 룩이잖아요. 뉴요커들은 가죽 미니스커트와 여러 겹을 레이어링한 후드 점퍼에 펑키한 백을 매치하고요.”백이나 슈즈에 비해 펑키한 주얼리는 매치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아이템이다. 특히 활용하기 좋은 아이템은 스터드 장식이나스파이크 장식 가죽팔찌.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이 즐겨 착용하는 스파이크 가죽팔찌는 여러 겹의 체인 팔찌와 함께 매치하는 것이 포인트다. 가죽과 체인 팔찌를 믹스해 시크한블랙 재킷과 매치하면 과하지 않은 배드 걸 룩을 연출할 수 있다.
KARL LAGERFELD
GLOVES & BELT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배드 걸은 말 그대로 ‘나쁜 여자’를 의미했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원에 들어가고,한 번쯤은 클럽에서 패싸움 같은 난동을 부리고, 끊임없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여자. 하지만 지금의 배드 걸은 스트롱 걸이다.아무 생각 없이 말썽만 부리는 문제아가 아니라 원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여자를 뜻한다. 실제로 엘리스 데럴이나 테일러 맘슨 같은 뉴 배드걸들은 본인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으며 린제이 로한이나 미샤바튼처럼 골치덩어리 문제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올 겨울, 배드 걸 룩에 어울리는 아이템들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게 등장했다. 슈즈부터 백, 목걸이, 뱅글, 장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아이템만으로도 배드 걸 무드를 연출할 수 있다. 나처럼 배드 걸이 되고 싶지만 평소에 시도하지 못했던걸들이라면 이번 시즌 용기를 내어 배드 걸 액세서리를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평소에 동경하던 자신감 있고 파워풀한여성이 될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