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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 잔인해도 용서하시기를.. 이 동네 풍속이 원래 그러니 나도 어쩔 수가 없소. 이멜을 보내주면 조금 더 따뜻한 표현으로 써 드릴 수도 있소.
그러나 원래 잔인한 것이요.
지독하게 잔인하오.
김기덕의 영화보다 더 잔인하오.
그러나 사실은 따뜻한 것이오.
따뜻할 수록 더 잔인하게 느껴질 것이오.
잔 그리고 인(殘 + 忍)
살점을 베어내고 그걸 견뎌내기라오.
달리미님이 어렵게 말씀하셨는데.. 필요없소. 뭐 세세히 읽어볼 것도 없소. 읽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오.
갈(喝)..!
명상은.. 특히 선(禪)은 미학이오. 미학이란 딱 한 방에 조지는 것이오. 한 컷..안에 다 들어가야 하는 것이오. 무릇 천하를 딱 한컷 안에 담아보라.. 이런 거.
예컨대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하이쿠’가 그렇소. 하이쿠의 명인 바쇼의 한 방을 빌자면.. ‘옛 우물에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한 방에 끝내는 것이오. 하여간 덕산의 방(棒)은 두방도 아니고 딱 한 방이오.
‘우끼요에’도 마찬가지오. 한방에 조진다는 선종의 정신이 들어있는 일본판화요. 고흐가 우끼요에의 영향을 받았던 것임은 불문가지.. 인상주의.. 사실로 말하면 고흐의 인상주의는 약간 사꾸라요.
일본의 우끼요에가 더 진짜이고 실은 그 근원이 된 선종의 미학이 정수라오. 그 본의는 물론 한 방에 조진다.. 그림 한 장, 한 폭 안에 천지음양의 조화가 모두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름지기.. 강렬한 인상.. 극적인 긴장.. 숨 막히는 긴장을 연출하는 음양의 대비.. 거기사 강력한 살기가 느껴져야 하는 법이오. 고흐의 그림에서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헛본 것이오.
요즘 유행어로는 포스라고 하나.. 하여간 그런게 있소. 고흐의 그림에서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오? 숨 막히는 긴장 말이오. 모나리자에서 느낀 그것 말이오.
무엇인가?
달리미님의 주장은 한 마디로
누구에게서인가 인정 받으려고 하는 욕구를 나타내는 글이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건 안쳐주오.
왜?
인정받으려고 하는 찰나
금 밖으로 벗어났기 때문이오.
미학은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이오.
그만 동그라미 밖으로 나오고 만 것이오.
그만 길을 잃고 ‘엄마 무서워’ 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오.
그러므로 실패요.
자기완성을 위한 명상의 길, 수도와 더불어 소통하는 것은.. 나를 완성함으로써 세상의 완성을 함께 꾀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입니다.
세상의 완성? 푸하하. 그런거 없소. 있다 해도 깨달음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세상을 완성시키다니.. 이건 참으로 생뚱맞은.. 엉뚱한 이야기가 되오. 세상의 완성을 꾀할 필요조차가 전혀 없소.
세상은 그 자체로 넉넉하니 완성되어 있소. 우리가 세상에 상관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오. 그것을 무리하게 상관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오.
무위자연.. 그대로 두라. 그러면 무엇이 바뀝니까.
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세상이란 것은.. 그것은 비유하자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소. 화가는 지금도 여전히 그려가고 있소. 엊그제는 우리당의 경선이 있었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 것이오.
지나가는 사람이 화가의 어깨너머로 보면서.. 함부로 개입하여 이것이 비뚤다 저것이 어떻다 하는 것은..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음 순서대로 색을 칠해나가며 차차로 그림을 완성시켜가는 화가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황당하오.
평은 그 그림이 다 그려지고 난 다음에 하도록 하오. 어쨌든 그림을 그리는 중간에 개입하여 평한다는 것은 최악이오.
만약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대단한 생각을 했다면.. 당장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오. 세상은 전혀 비뚤어져 있지 않소.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지만 그건 지극히 정상이오.
달은 사리와 조금에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건 이상이 아니라 정상이오. 세상이 비뚤어진 일은 지구가 탄생한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없었소. 그러니 세상을 바로잡아 놓으려고 해서 안되오.
다만 세상을 인식하여 가기 뿐이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제넘을 수 있는, 위험천만의..!
오다케가 생각한 흐름대로 흐르지 않을 때 바둑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은, 도예공이 잘 못 구워진 도자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둑은 새 판을 둘 수 있고, 도자기는 다시 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만에. 바둑은 다시 둘 수 없고 도자기는 새로 구울 수 없소. 실패한 바둑은 성공한 바둑을 위하여 기여하므로써 그 자체로 완성되는 법이며 깨진 도자기는 완성된 도자기를 위하여 기여하므로써 그 자체로도 한 개의 깨진 도자기로 역할을 다하고 완성되는 것이오. 즉 깨진 도자기든 실패한 도자기든 그때그때 완성되는 것이오. 단지 주인공이냐 조연이냐의 차이 뿐.
한 사람의 생애는 한 번 뿐 입니다. 영원이 아닙니다.
생애 같은 것은 없소. 다만 오늘이 있고 지금 이 순간이 있는거요.
그러나, 그를 둘러싼 환경 속에 가장 큰 부분인 인간관계가 선택의지가 아닌 혈연의 끈에 의해 얽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릴 수 없음입니다.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오지 않을 사람들에게 힘을 소진해가면서 그러니까 붕어가 고양이에게 고양이 말을 하는 것이 오류라면.. 그걸 내버려둔 채로 자기 완성을 해나간다는 것의 한계.. 아... 틈을 봐서 제대로 생각 정리하여 답변 올리겠습니다.
요는, 내 생애를 걸고 내 생애 자체의 완성된 삶의 형태를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불가피한 상황으로 묶인 인간관계에 대한 대처법입니다. 그 아픔을 아실런지... <내 바깥에 나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망상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정>이란 결론은.. 정치적 상황에서 조중동이나 한나라 무리에 둘러쌓인 소수 야당이 그들의 이념을 어떤 방법으로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현실적 방안과 결부되었을 때 한계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건 매우 생뚱맞은.. 엉뚱한 이야기요. 여기서 조중동이, 또 정치가 왜 나와야 하지요? 정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데.. 어색하긴 하지만 의도는 알고 있으니 일단은 계속 가 봅시다.
투쟁하지 못한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 완성을 꾀합니다.
그런 말은 적어도 ‘가갸거겨’ 정도는 배운 사람들이 할 이야기라오. 최소한 초등반은 완성된 사람이 정치영역을 논하는 거요. 심각한 소통오류 발견.
그러나 그것이 소통과 분리된 채 이루어졌을 때 가지는, 현실 외면의 비겁함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괜찮아 졌다고 해서, 괜찮지 않은 힘없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외면해도 됩니까.
괜찮아 졌습니까? 그건 괜찮아진 사람들에게나 하는 이야기라오.
그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하고도 소통이 안되는 주제에 무슨 사회적인 소통?
그럼, 그들에게도 너희는 알아서 자기 완성해라..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미래를 저당잡힌 듯이 사는 그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와 동성애자, 장애자, 가난한 자..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아닐 수 있습니까.
화가는 노동자나 장애자에게 니들이 알아서 이 그림을 완성해라고 다그치지 않소. 일단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할 이야기라오.
저는 그들의 아픔에 주목합니다.
좋은 생각이오만 그건 정치판의 이야기라오.
그래서 나만 행복하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나만 행복해도 진정한 행복일 수 있소. 그런데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오? 단 1초라도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소.
나만 안전하다고 해서 .. 이렇게 표현하면 말이 될것도 같소만.
그나마.. 이렇게 인터넷 가능하고 사유의 시간이 주어지고 소통이 가능하고 끈을 가지고 있는 '가진 자'인 저는 그들에게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미안합니까.. (일단, 애 보러 갑니다.) 횡수인지 모르나 어느 정도 저의 의도가 표현되었기를.
당신은 전혀 가진 자가 아니오. 당신은 물에 빠진 자이오.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오.
그때그때의 인생에서 빠져나오려 마십시오./화가 나면 화 속에 불타야지 어쩝니까..슬프면 슬픈 겁니다. /내가 슬픈 게 아니라 그냥 슬픔입니다. 뭐 어쩌라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러다가 그냥 죽으면 이제 나는 뭡니까.. 어디에도 없는 나는.. 욕하면 나도 화나는대로 욕하고, 상황따라 움직이면 그래도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닮은 그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살고 싶은가의 거리가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밖에 좁혀지기 힘들다면 말입니다. 뭐하러 살아야합니다. 냅둬라. 냅둬. 케쎄라쎄라.. 왓에버윌비윌비.. 그런거요? 크리스찬처럼 뜻있으신 분 뜻대로???
건져달라고 손을 내밀어 주었더니, 내 보따리가 없다고 아우성을 치는 격입니다. 얼토당토입니다. 알.면.서. 왜! 그랬을까요. 그럼 이것은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요. 어디에도 없는 나와 그 무엇도 아닌 그냥 그대로인 나일 뿐인데... 나는 왜! 그랬을까요. 그렇지만.. 씨부려서 후련하고, 미친 X처럼 씨부려도 대꾸해주는 친절을 모른다 말하면서 친절을 베푼 사람이 있어서 저는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
삶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원래가 모순이고 원래가 역설인데... 그게 아니니까, 똑바로 똑바로 되어야지 '당위'로 덤벼들면 그렇게밖에 될 수가 없는 것인데...
꿈꾸기를 허용하는 세상은 하늘의 별과 내 가슴의 별이 일치하던 옛날에나 가능했던 것인데, 나는 서정시를 쓰고 싶고.. 세상은 서사시를 쓰라고 강요합니다. 슬픔을 받아 안고 나는 이제 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래도 가면서 씨부릴 것인가.. 서정시를 쓰고 싶은 내 마음을...
당신이 만약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 하나를 줏었다면 어디에 쓸 것이오? 그것이 은은 아닐 것이오. 은 보다는 금이 더 소중하니까요.
그것은 아마도 금은 아닐 것이오. 금 보다는 다이아몬드가 더 소중하니까요. 그것이 다이아몬드는 아닐 것이오. 물질 보다는 정신이 더 소중하니까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중한 것과 하찮은 것을 가려보는 눈이오. 그것은 ‘기준’이오. 그것은 가치의 기준이오. 그것은 사회의 신뢰를 생산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보석은 도량형의 원기로 제작되오. 세슘 원자시계가 그러하듯이 말이오.
깨달음은.. 당신이 남의 일에 개입하려거든 먼저 가치판단의 기준을 획득하라는 말이오. 가치판단의 기준은 이미 획득하였소? 당신의 개입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무엇이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소? 도운다면서 실제로는 모욕을 주거나 해코지를 하는 일이 그 얼마나 많소.
태양이 최고의 웃어른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언제나처럼 한결같이 동쪽에서 뜨기 때문이오.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은 마땅히 가치판단의 기준 그 자체로 이용되어야 하오. 그것은 매매되거나 거래되어서 아니되오.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이 그저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이오.
개입은 그 기준을 획득한 다음의 일이오.
총평하자면 .. 깨달음은, 혹은 명상은 또는 뭣이든 간에 하여간 세상을 위하여 대승적으로 크게 이바지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신듯 한데.. 그것은 예컨대..
수학은 세상을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학자들은 보라. 끼리끼리 모여서 공리공론을 일삼으며 복잡한 문제나 만들어 놓고 그걸 혹은 출제하거나 혹은 풀어보며 자기위안을 삼을 뿐이다. 그것은 실로 자위행위와 다르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선생의 예법을 보라. 이건 참으로 실용적이다. 삼강오륜하고 예의범절하며 남존여비하고 사농공상하니 이 아니 좋을씨고. 이웃이 화목하고 위아래가 두루 편안하다. 부부간에 분별있고 군신간에 의리있다. 친구간에 우애있고 부자간에 효도있다. 학자라면 모름지기 이런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수학 따위 천하에 쓸모가 없는 허접학문이나 연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런 촌평 듣는듯 하오.
이 말쌈이 맞다고 생각되오?
난 전혀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위 예를 들은 말쌈은 전형적인 헛소리라오.
그런데 헛소리일수록 말은 번드레하니 그럴듯한 법이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소?
이건 번짓수를 잘못 짚어도 매우 잘못 짚은 것이라오.
거꾸로... 공자선생의 삼강오륜과 부부유별과 남존여비와 사농공상이 말도 안되는 공리공론의 헛수작이고 수학이 도리어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겠소?
왜인가? 수학은 개입하지 아니하고 독립하여 스스로 완성되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수학을 신용의 근거로,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을 수 있소.
그러나 공자선생의 예법은 터무니 없이 개입하여 마구 휘저어 놓았기에 신용의 근거로,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을 수가 없소.
예컨대 .. 라디오와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선풍기가 각각 있다. 이건 쓸모있다는 판정. 그런데 라디오 겸 컴퓨터 겸 텔레비전 겸 선풍기가 있다. 이건 천하에 쓸모없다는 판정.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한 거고 미학이 필요한 거고 명상이 필요한 거요. 라디오겸 컴퓨터 겸 텔레비전 겸 선풍기를 만들려고 하는 작자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그 라디오와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선풍기를 각각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깨달음은 그거요. 붙어 있어서 안되는 것을 따로 떼놓기. 각자 별도로 완성시킨 다음에 우선순위를 정하여 적절하게 연동하는 방법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뒤죽박죽으로 뒤섞어 버리지 말기.
제가 근일 명계남 등을 맹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명계남 이기명 등의 터무니 없는 개입은 라디오와 선풍기와 텔레비젼을 함부로 붙여버린 것과 같소. 각자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최악이오.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오.
참고로 말하면 깨달음은 연역이라오.
신을 완성된 모습에서 세상의 완성을 발견하라.(신은 원래 완성되어 있소. 고로 신을 완성시켜 주겠다며 신에게 대드는 당신의 주제넘은 짓은 100 프로 실패요. 그것은 실로 어리광이라오. 신에게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세상의 완성된 모습에서 개인의 완성을 발견하라.(무위자연이라 함은 자연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니고 자연의 완성된 모습에서 본받아 당신의 완성을 모델링 하라는 말쌈.)
개인의 완성된 모습에서 사업(당신이 착수하고자 하는)의 완성을 발견하라.(당신의 무무한 개입은 당신 자신의 완성을 허물고 마오. 요즘 명계남 이기명 등이 망가지는 것 못봤소?)
나 자신의 완성된 모습에서 이 순간의 완성을 발견하라.(깨달음은 1초 1초를 그 자리에서 완성시켜 가기라오.)
이 순간을 완성시키기.. 그것은 정신을 차리기요. 당신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면 당신은 그 순간 완성된 것이오. 그렇게 1초와 1초의 완성을 조금씩 더하여가면 당신의 인생 또한 성공일 확률이 높소.
이러한 깨달음의 개념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의 개념과 일면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상반되오. 유교는 귀납적 접근이고 깨달음은 연역적 접근이오.
물론 당신의 취미가 그렇다면.. 널리 우주를 근심하고 날마다 천하를 걱정하고 오늘도 세상을 사랑하고.. 오지랖 넓게 전방위로 개입함도 무방하오. 그러나 만약 개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미학의 문제 곧 완성의 문제에 부닥치게 되오.
99프로 완성된 미완성의 도자기는.. 단 1프로가 깨졌다는 이유로 100만원 받을 것을 1만원 빼고 99만원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쓰레기 수거료 500원을 물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요. 왜? 남의 일에 개입할 때는 반드시 마찰을 일으키고 말 것이니깐.
최종결론.. 깨달음은 연역적으로 사유하기. 연역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 소통이 불가면 헛일. 당신이 선의로 타인을 돕고자 하나 진정으로 소통되지 않으면 당신이 돕고자 하는 그 대상은 도리어 당신을 원망할 것을 명심하기.
존 일하고 욕 먹지 않으려면 말이오.
저는 연역적으로 사유하고 또 연역적으로 쓰고 있는 바, 님은 귀납적으로 사유하고 있고 또 귀납적으로 쓰고 있어서 같은 의견인데도 심각한 소통장애 발생 및 충돌이 있소.
님의 견해와 제 견해가 다른 것이 아니고 .. 단지 접근방향이 다를 뿐이오. 앞으로 다가가기와 뒤로 다가가기. 어느 방향에서 다가갈 것이냐이오.
도공은 세상을 위하여, 세상을 위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이바지 하기 위해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자기의 완성을 꾀하여 다만 도자기를 빚을 뿐인데 그렇게 빚은 도자기를 내버려 두었더니.. 세상이 그걸 더러는 세상을 위하여 가져다가 쓰기도 하더라는 식의 태도가 세상과의 마찰을 줄인다는 야그요.
첫댓글 혹시 고흐의 그림에서 살기를 느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다 하는 일이 아니오?
난 못 느꼈는데...한 번 느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