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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나가 일을 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또는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첫 숟가락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시래"라고 말하는 풍속이 있다.
또 초겨울이 다 되도록 감나무 끝에 감이 몇 개씩 탐스럽게 달려 있다.
그 감들은 높아서 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까치의 밥으로 일부러 남겨놓는 것이란다.
그렇게 남아있는 감을 `까치밥'이라고 하며,
이것 역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고시래' 풍속의 일종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상들은 콩을 심을 때 3알을 심었다.
하나만 심어도 될텐데 3알을 심은 뜻은 한 알은 새가 먹고,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에게 먹이기 위한 배려이다.
고시래는 뭇 생물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한 생명 사랑의 미풍 양속이다.
고시래의 원뜻은???
우리나라는 수천년을 농본국가로 이어온 민족이다.
그래서 아마 가장 받들어 모셔야 하는 신은 역시 농업의 신이고...
'고시래'에서 나오는 '고시(高矢)'는 다름 아닌 단군시대부터 내려온 우리의 농신(農神)이고,
단군조선 시기에 농업을 관장하는 최고관리 명칭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시래(高矢來)'는 '고시 농신이여, 오십시요'라는 말이다.
이는 농신이 돌보아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주문이기도 한데,
뜻을 모르고 사용하다 보니, 어느 곳에서는 '고수레'로 변하기도 한 것같다.
이는 <한단고기>의 삼성기에 기록되어 있고 .
또 북한에 단군릉 앞에 고시의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종묘 사직이라고 하여 종묘에서는 역대 왕의 제를 지냈으며,
현재 사직동에 사직공원이 남아 있는 사직단에서 제를 올리고 풍년을 빌었다.
그렇다면 고시 농신에게 빌어야 할 풍년 기원을 왜 사직단에서 빌었을까?
사(社)는 중국 고대의 토지신이고, 직(稷)은 중국 고대의 곡식신이다.
사대모화사상에 의해 우리 본디의 고시 농신은 버려지고 사와 직이라는 중국 신이 받들어진 것이다. 철따라 종묘와 사직단에 배향하여 남의 나라 농신에게 제사를 올려진셈이다.
한문을 터득하고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급에서는 사직신을 모셨지만,
무지렁이 농민들은 대를 이어 먼 조상들이 해오던 대로 뜻도 모르면서 "고시래!"를 외쳐 왔다.
정말 땅에다 조금 음식을 준다고 해서 풍년이 드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풍습은 미신이라고 매도해야 할까??
그것은 땅에 희망을 걸고, 땅에 목숨을 건 농사꾼의 기원이고 다짐이다.
고시래의 유래
고시래에 대한 설화를 몇가지 들어 보자.
여기서는 대부분이 고씨성을 가진 어머니에 대한 제사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유래 1:
한마을에 고씨 성을 갖인 사람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손이 없어서 늘걱정으로 지내야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자손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 후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웃사람들이 제사는 못지내어 줄망정 영혼이 굶주리게 할수없다해서 고씨네 하고 불러 음식을 함께
나누는 뜻으로 음식을 골고루 조금씩 떼어서 던져 준것이 유래가 되었는데
그 후 부터는 고씨가 살던마을이 부유해지고 가난을 면하게 되자 고씨의 혼백이 도와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차츰 번져가서 모든 사람들이 따라하게
된 것이라한다.
고씨네가 고시네로 다시 고시레로 변한 말이라한다.
유래2:
진묵대사는 一玉스님이라는 분으로 1562년(명종 17)때 태어나서 1633년(인조 11년)에 열반하신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으로 호는 진묵(震默)이라하여 진목대사라 불리신 분으로
자신의 출가로 후손이 없어 불거촌에 어머님 묘소를 관리를 못하니,
들에나가 음식을 먹기 전 '고시래'하면서 음식을 조금 주위에 뿌리게 해 제사를 대신하였다는 거다.
이렇게 '진언'으로 제사지내는 방편을 삼으므로서,
자신의 어머니를 후세 천 년을 돌봐 줄 것이라하였다.
고로 제주 고씨(高氏)인 어머님께 예(禮)를 드린다는 데서 '고시래'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유래3:
고씨 성을 가진 예쁘고 착한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가 하나 떠내려와 남몰래 건져서 먹었다.
그런데 그 후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더니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가 이를 망측한 일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개울가에 갖다 버렸다.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까마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서로 이어 어린아이를 덮어주고 먹이를 구해 다 주어 수십 일이 지나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를 보고 처녀의 부모가 이상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도손(桃孫)이라고 지어 주었다.
도손은 자라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중국에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와 음양의 비법을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산 어머니가 죽었다.
도손은 명당을 찾아 어머니를 묻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자식도 없고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자신도 중이 되었기 때문에 발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면서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 한가운데에 묻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에다 묻었다고 욕하였다.
그러나 도손은 "여기가 배고프지 않은 명당이다."하며 그대로 두었다.
농사철에 근처의 농부가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제사를 지내주는 자손도 없는 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들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때면 "고씨네-"하면서 그 여자의 성을 부르며 밥 한술 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다른 집들은 농사가 다 망쳤는데,
그 농부의 농사만 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고씨네 무덤에 적선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다음부터는 서로 묘에 음식을 갖다주며 "고씨네-"하고 불렀다.
작자 미상의 글들을 수집 해 놓은 글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한국인의 인정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남을 도우면 복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