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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종 시집, < >, 파란, 2022년 2월 10일.
시간의 얼굴
맹문재(문학평론가, 안양대 교수)
1.
김승종 시인의 시 세계에서 얼굴은 작품의 토대를 이루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대상이다. 시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얼굴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대상으로 내던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얼굴은 물론 다른 존재의 얼굴을 긍정하고 품는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시간을 인식하며 얼굴에 대해 각별하게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타인은 얼굴로 나타나는데,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 또는 전체의 한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얼굴은 코와 입과 눈으로 이루어지지만, 책상이 판자와 서랍과 다리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책상은 바라보지 않고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 않지만, 사람의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고 또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얼굴과의 만남은 사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빗소리 들리지 않고 걷다가 걷기를 잊은 천변
짓쳐 나아가는 용맹한 누런 강물
온 길을 돌아보네
저무는 서녘으로 빨려들며 다정히 손짓하는 얼굴
―「손짓하는 얼굴」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비가 그친 천변을 걷다가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비가 상당하게 온 뒤여서 짓쳐 나아가는 누런 강물은 용맹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흘러내리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 이유는 일상적인 풍경을 넘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강물 앞에서 자신이 “온 길을 돌아”본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화자가 바라보는 강물은 분명 흘러나가고 있지만, 그 위로 또 다른 강물이 흘러들어와 지나간 강물과 새로운 강물을 구분할 수 없다. 강물 자체는 변한 것이 분명한데 변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강물이 변화한다는 사실만 인정될 뿐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얼굴에 들어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시간은 분명 흘러갔지만, 또 다른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에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공감하며 시간 위에 자신을 태운다.
화자는 그 시간 위에서 “저무는 서녘으로 빨려들며 다정히 손짓하는 얼굴”을 만난다. 짓쳐 나아가는 강물의 끝이 서녘이라는 인식은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자각이다. 화자는 그 절대적인 시간 앞에 서서 계시처럼 나타난 얼굴과 마주한다.
레비나스가 다른 얼굴과의 만남을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했듯이 김승종 의 시들에서도 인연의 얼굴은 어떤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 친구, 선배, 이웃 사람들 등은 시인에게 고유한 존재이다. 또한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 근거하고 있”기에 힘이 세다.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얼굴에서 도덕적 힘이 나”오는 것이다.
화자나 작중 인물은 자신을 바라보며 호소하는 얼굴에 무관심할 수 없다. 자신의 자유로움이나 이익을 위해 거절할 수도 없다. 그만큼 마주하는 얼굴은 힘이 세다. 결코 연약한 상대가 아니어서 동정받거나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운 자세를 갖도록 일깨운다. 그 얼굴의 호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2.
태평동 여인숙 골목 요양원으로
아내를 따라 그는 장인을 뵈러 간다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돛대 없이 난발(亂髮) 장인은 늙어 가고
삿대 없이 아내는 어려 가는데
누가 토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눈썹 사이 주름 같은 그 길로 다시 이른 자리
해병 이병처럼 각지게 머리 깎여
미용사 출신 원장 옆에서 한 번 웃다가
엎드리고 막무가내로 끼니를 외면한다
그가 앉히려다 식욕 같은 힘에 물러서고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뜨지 않는다
누구에게 분노하는 건가 혹 자신에겐가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태평동 붉은 창문 닫힌 여인숙 골목
고개 숙이고 그는 아내를 따라가
눈 감고 분노하는 장인을 뵈어야 한다
어제인지 내일인지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서쪽 나라로 갔던 장모가 절구를 찧으며 노래한다
장인은 삿대도 없이 젊어 가고
그와 아내는 돛대도 없이 늙어 간다
―「반달」 부분
위 작품의 그는 아내와 함께 “태평동 붉은 창문 닫힌 여인숙 골목”에 위치한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장인을 문안갔다. “해병 이병처럼 각지게 머리 깎”은 장인은 그를 본 뒤 “미용사 출신 원장 옆에서 한 번 웃”는다. 그리고는 엎드린 채 “막무가내로 끼니를 외면한다”. 그는 걱정되어 장인에게 다가가 앉히려고 하지만 “식욕 같은 힘”이 워낙 세어서 물러설 수밖에 없다.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뜨지 않는다”.
그는 장인이 “누구에게 분노하는 건가”라고 궁금해한다. 장모가 먼저 “서쪽 나라로” 갔기 때문인지, 자식들이 당신을 소홀히 대한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요양원 관계자들이 홀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양원 같은 환경에 놓인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왜 “눈 감고 분노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순간 화자는 그의 장인의 얼굴에서 흐르는 시간을 발견한다. “서쪽 나라로 갔던 장모가 절구를 찧으며 노래”하고,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돛대 없이 난발(亂髮)”인 채로 늙어 가던 “장인은 삿대도 없이 젊어 간다”. 그와 아내는 “삿대 없”고 “돛대도 없이 늙어 간다”. “누가 토끼인지 아닌지”, 누구의 시간이 젊어 가고 늙어 가는지 알 수 없다. 흘러가는 강물 위에 새로운 강물이 흘러들어와 강물 자체를 구분할 수 없듯이 흐르는 시간을 알아볼 수 없다. 육체적인 시간과 정신적인 시간이,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혼재되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유한한 존재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삶이 행복한지, 어떻게 행해야 잘 사는 것인지 등이 암시된다. 이와 같은 고민은 사회성을 띠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도착 음향이 복도에서 들리고 번호 키가 눌리고 문이 열리고 그가 요양원으로 들어선다 요양원에서 오는 길 백 세 정정 이천 할아버지는 또 아들들에게 전화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고 성남 젊은 파킨슨 노인은 일주일 만에 기지도 못했고 건넛방 수줍은 정읍 할머니는 글쎄 한번 안고 싶다고 하였고 욕쟁이 분당 할머니는 시선을 내리깔며 그저 시무룩하였다고 한다 저녁 식사 시중을 들고 또 서둘러 떠나려 하자 치매 장인은 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잠드는 나를 지켜봐 달라고 하였다 한다
―「성모실버홈요양원」 전문
위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양원 노인들의 모습은 김수영 시인이 번역해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진 뮤리얼 스파크(Muriel Spark)의 소설 『메멘토 모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모드 롱 병동에는 열두 명의 여성 환자가 있는데 그녀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두된 노인 문제를 여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관절염으로 신음하는 노인, 기억력이 감퇴한 노인, 청력을 상실한 노인,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 노인…… 노인들은 간호원장이 ‘빵가게의 한 다스’라고 불릴 만큼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위의 작품에서도 여실하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서니 “백 세 정정 이천 할아버지는 또 아들들에게 전화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고, “성남 젊은 파킨슨 노인은 일주일 만에 기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있다. “건넛방 수줍은 정읍 할머니는” “한번 안고 싶다고” 말하고, “욕쟁이 분당 할머니는 시선을 내리깔며 그저 시무룩하”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중을 들고 또 서둘러 떠나려 하자 치매 장인은 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잠드는” 자신을 “지켜봐 달라고” 호소한다.
“성모실버홈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의 외롭고 소외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노인 문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경제발전과 의료 수준의 향상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층이 급속히 늘었지만, 그에 따른 정책이나 복지 등이 미흡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화로 말미암아 노부모를 부양하던 전통 가치가 붕괴한 면도 노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질병, 빈곤, 고독감, 무력감 등으로 노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사회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있다. 이렇듯 “성모실버홈요양원”의 노인들 실상은 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시킨다. 그리하여 화자는 사회의 낙오자나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3
지지 마라
수십 년 전 병상 선배의 유언
이후 그는 자주 졌고 막걸리도 자주 마셨지
그때 묻고 싶었지만
선배가 숨을 몰아쉬었고
알 것 같기도 해 묻지 않았는데
어언 그래도 가끔 궁금하였지
오늘 또 막걸리를 배불리 먹다가
문득 그때 선배의 백혈병 눈으로 자신을 보네
분수 모르고 게으르게 늙은 당황한 어린 당나귀
무엇에 지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평생 자신을 떠나 떠돌면서
무엇에 지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남녘 땅 선배의 고향에 오래전 들어선 시비
겨우 어젯밤에서야 꿈에서 지나갔네
―「당황한 당나귀」 전문
작중 그는 “수십 년 전 병상 선배”가 유언으로 남긴 “지지 마라”라는 말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 그렇지만 그 선배의 유언대로 살아오지 못했다. 의지가 약하거나 실천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지는 삶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선배의 죽음 이후 “자주 졌고 막걸리도 자주 마셨”던 것이다.
선배가 “지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기는 순간,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묻고 싶었지만/선배가 숨을 몰아쉬었”기 때문에, 또 “알 것 같기도 해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럴수록 알고 싶어 “오늘 또 막걸리를” 마시다가 “무엇에 지지 말라는 것이었”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선배의 말이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에게 지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자기 이윤을 철저히 추구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므로 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엄청난 폭력과 불평등한 분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면 결국 자신이 타락하고 소외되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지 마라”는 선배의 유언을 자기 자신에게 지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자기 체제에 순응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하고 유혹하기 때문에 굴복당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지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물론 선배의 유언이 위의 두 가지 모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자에게 지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정답일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가능성을 품는다고 해서 당연히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자신이 선택해야 할 가치관 및 인생관을 고민해 오는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무엇에 지지 말라는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왔다. “선배의 백혈병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고, “분수 모르고 게으르게 늙은 당황한 어린 당나귀”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했다. “평생 자신을 떠나 떠돌”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자세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되물어온 것이다.
그는 선배가 남긴 유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민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자각했다. “남녘 땅 선배의 고향에 오래전 들어선 시비/겨우 어젯밤에서야 꿈에서 지나갔네”라고 했듯이 잠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본 것이다. 잠 속에서의 의식은 강요를 벗어나 주체성을 띤다. 잠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기반을 얻을 수 있다. 힘없는 선배의 얼굴이 전하는 호소를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아부지는 빨갱이들을 살렸던 부정 부르주아지
한때는 민의의 대변자
군사정변 일어나자
참여 제의 물리치고
도연명(陶淵明)을 따라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지만
가끔 속옷에 낀 땀소금도 팔아야 하였지
대학 입학했던 해 여름 끝날 무렵
2학기 등록금 마련하러
쇠 두 마리 몰고 아부지와 삼십 리 길 쇠전엘 갔었네
난생처음 겪는 숱한 쇠눈
자욱한 소음에 뜬 질퍽한 진흙땅
한 쇠장수 눈웃음치며 달라붙었으나
거간꾼이 매긴 값 어림없다 하고
다시 매긴 값에도 그르다 하네
흐린 날씨 쇠똥 냄새 늘어진 해 국밥 냄새
쇠장수 길게 언성 높이다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돈다발에 천 원 더 얹어
쇠똥 진흙창 골라 팽개치네
더는 안 되지럴 씨발 할라면 하고 말려면 말라고 그래라 씨발
사람들이 모여들어 히히 헤헤거리네
쇠똥 진흙창에 처박힌 아부지
도리(道理)와 도락(道樂)이 다 무엇인가
아들이 주먹 쥐고 나서자
꾸짖어 물러나게 하고 돈을 주워 갖다 주라네
일그러져 서 있기만 하자
허리 굽혀 쇠똥 진흙 묻은 돈다발을 주워 되돌렸네
흥정 이어져 거래가 끝났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흐린 날에
아부지는 쇠전엘 갔네
가서 쇠똥 진흙창에 처박혔네
―「쇠똥 진흙창」 전문
위 작품의 화자는 “대학 입학했던 해 여름 끝날 무렵/2학기 등록금 마련하러/쇠 두 마리 몰고 아부지와 삼십 리 길 쇠전엘 갔었”다. 화자는 “난생처음 겪는 숱한 쇠눈”과 “자욱한 소음에 뜬 질퍽한 진흙땅”인 쇠전에서 인간 시장을 실감했다. 시장이라는 장소가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각축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화자는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 쇠장수 눈웃음치며 달라붙”어 행패에 가까운 흥정을 걸어왔다. “거간꾼이 매긴 값 어림없다 하고/다시 매긴 값에도 그르다 하”며 제멋대로 값을 매긴 것이다. 그가 물건을 사고파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흥정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거간꾼조차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가졌기 때문이다. “길게 언성 높이다가//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돈다발에 천 원 더 얹어/쇠똥 진흙창을 골라 팽개치”면서 “더는 안 되지럴 씨발 할라면 하고 말려면 말라고 그래라” 하고 행동한 데서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은 쇠장수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모여들어 히히 헤헤거”렸다. 그만큼 그곳에서는 돈의 위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화자는 그 우시장에서 “빨갱이들을 살렸던 부정 부르주아지”였고, “한때는 민의의 대변자”였으며, “군사정변 일어나자/참여 제의 물리치고” 낙향해 “속옷에 낀 땀소금”을 파는 아버지가 “쇠똥 진흙창에 처박힌” 모습을 목격했다. 아버지의 학식이며 경력이며 명성이며 인품 등이 여지없이 무너진 현실을 본 것이다. 화자는 그 앞에서 “도리(道理)와 도락(道樂)이 다 무엇인가”라고 한탄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길과 도를 깨달아 즐기는 일이 짓밟혔기에 절망한 것이다.
화자는 쇠장수의 행패를 용납할 수 없어 “주먹 쥐고 나”섰다. 아버지는 화자를 “꾸짖어 물러나게 하고 돈을 주워 갖다 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화자는 분을 삭일 수 없어 “일그러져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허리 굽혀 쇠똥 진흙 묻은 돈다발을 주워 되돌”려 주었다. 화자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화자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행하는 것이 이기는 삶인지를 깨달았다. 자식을 공부를 시키기 위해 소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자신이 아버지의 시간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난처한 처지에 놓인 아버지의 얼굴이 호소하는 목소리를 고개 숙이고 들었다. 가장 낮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가장 높은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힘없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가장 강한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얼굴을 그려본 것이다.
4.
오후 늦어 깊은 낮잠에서 깬 노모
침침한 눈으로 그를 살피네 이윽히
에그 너도 이제 늙었구나
아이고 그래요? 그렇습니까?
제가 벌써 게으르게 늙고 말았다는 건가요
각혈하는 번개로 무너지는 천둥처럼 후회하네
하지만, 그가 이미 오래 예감했던 예정이지
암 예정했고 말고
노모가 조심조심 탄식조로 말을 잇는다
눈도 처지고 입가에 주름도 졌구나
북받치는 낡은 심장
그래 오래 잊었다가 어제 해본 달리기
견딜 만한 고통에 도취해
견딜 만한 고통을 기약하던 그때를 추억하면서
발이 무릎이 되도록 계속 달리리라
한밤에 무슨 억울한 짐승처럼
한밤에 화살 다발에 꿰인 유령처럼 달리고 달리리라
―「낡은 심장」 전문
위의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만들게 하는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한다. “오후 늦어 깊은 낮잠에서 깬 노모”는 “침침한 눈으로” 그를 이윽히 살피다가 “에그 너도 이제 늙었구나”라고 말한다. 노모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은 그는 “아이고 그래요? 그렇습니까?/제가 벌써 게으르게 늙고 말았다는 건가요?”라고 놀란다. 그리고 “각혈하는 번개로 무너지는 천둥처럼 후회”한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로서 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예감했던” 일이어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노모로부터 늙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가눌 수 없었다. “노모가 조심조심 탄식조로” “눈도 처지고 입가에 주름도 졌구나”라는 말을 잇자 “북받치는 낡은 심장”을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노모의 말에 기분 상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늙음에 맞서 “오래 잊었다가 어제 해본 달리기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한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늙음의 폭력에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늙음에 대항해도 끝내 자신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지만 순순히 굴복하지 않겠다고, “견딜 만한 고통에 도취해/견딜 만한 고통을 기약하던 그때를 추억하면서/발이 무릎이 되도록 달리”겠다고 나선다. “한밤에 무슨 억울한 짐승처럼/한밤에 화살 다발에 꿰인 유령처럼 달리고 달리”겠다는 것이다.
달리기에 집중하는 동안 그는 자기 존재성을 갖는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현재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노모의 얼굴에서 가져왔다. 노모의 늙은 얼굴은 그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당당하게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는 노모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반성한다.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
꽃이 눈에 들어오는군 이제 늙은 건가
붉은 정지신호 대기 중 차 안
뻔한 말 왜 하나 마누라도 중얼거렸지
한 주 지나 다시 그 네거리
며칠 전에 한 친구가 죽었다
당뇨로 눈멀어 가며 용달차 끌고
잘 알아주지 않아도 짬짬이 시 쓰던 시인
은사 묘소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한 말,
… 인생이 호박 같아 초년은 싱싱하고 맛있고 중년은 다 자랐으나 맛이 없고 노년은 쭈글쭈글하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고 내 노모가 그러더군…
그가 자신에게 쓴 마지막 시,
… 목숨 애써 구걸치 않고… 흐름 하나로 방울 하나로 순간 매듭짓는 삶, 빗소리… 밤을 지키는 내 지하방 시절 희망의 소리… 그 눈동자면 되지 않겠는가…
신호 여전히 붉고
봄꽃 밀어낸 신록이 눈에 들어서네
―「호박」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가 “꽃이 눈에 들어오는군 이제 늙은 건가”라고 “붉은 정지신호 대기 중 차 안”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화자에게 꽃의 발견은 새로운 세계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아내가 “뻔한 말 왜 하느냐”고 중얼거린 것은 화자의 말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당연한 이치라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화자가 꽃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궁구한 것은 현재 인식의 발현이다. 계시처럼 나타난 꽃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모두 불태우고 있다. 그 모습은 며칠 전에 죽은 “한 친구”의 얼굴이다. 그 친구는 “당뇨로 눈멀어 가며 용달차 끌고/잘 알아주지 않아도 짬짬이 시 쓰던 시인”이었다.
화자는 “은사 묘소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생이 호박 같아 초년은 싱싱하고 맛있고 중년은 다 자랐으나 맛이 없고 노년은 쭈글쭈글하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노모에게 들은 말이었는데, 오랫동안 앓아온 친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친구는 부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역시 유한한 존재로서 운명을 회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화자는 친구의 부재에서 자신의 현존을 자각하고 있다.
친구는 “목숨 애써 구걸치 않고… 흐름 하나로 방울 하나로 순간 매듭짓는 삶, 빗소리… 밤을 지키는 내 지하방 시절 희망의 소리… 그 눈동자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시를 남겼다. 친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을 얼굴에 집중했다. 희망의 소리를 들었으며, 눈빛을 빛냈다. 아픈 얼굴이었지만 주체성과 생명력을 지녀 아름다운 빛을 띠었다.
화자는 친구의 얼굴이 호소한 말을 최대한 받아들인다. “꽃이 눈에 들어오”도록 마음을 열고, “신호 여전히 붉”은 것을 발견하고, “봄꽃 밀어낸 신록이 눈에 들어서”는 것을 맞이한다. 화자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을 긍정하고 얼굴을 지킨다.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얼굴을 만들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 가치를 지향하는 얼굴을 추구하는 것이다. “살기도 어렵고 죽기도 어렵지만/극락이 따로 없”(「산 첩첩 강 분분」)다는 세계인식으로 자신은 물론 인연의 얼굴들을 향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