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의식 2006년 신년호에 게재된 시
시 / 綠雨 한경은
목차 : 1. 가을.밭에서
2. 기다림을 위하여 1, 2
3. 열쇠
4. 과일과 어머니
5. 어린 시절, 그때는 걸음이 느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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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밭에서
우리 집 뒷산이 밭이 되도록 머슴 길두는
땅의 뿌리 깊은 곳까지 곡괭이질하며 땀을 뿌렸다
어른들 말을 흉내내기 좋아했던 어린 나는
"길두야 밥 먹어" 하루 세 번 바람에 실어
산밭으로 날려보내곤 했다
풀꽃 같이 예쁜 날 "작은 아가씨" 라 부르던 길두,
지금도 "길두야" 라고 부르면
허리춤에서 수건 뽑아 허공 저으며 햇볕을 박박 걷어낼까
무논엔 물달개비 외로이 떠다니고
산이 푸른 옷 입고 일어서는
검정무늬자주맵시벌 윙윙대던 아랫마을,
길두는 아랫목 사는 둘림 언니만 보면 사족을 후렸다
품삯 받으면 마당이 우우우 쓸리듯
슬금슬금 마을 어귀 빠져나가는 머슴의 발자국
흥건하게 돌아오는 밤길 그의 어깨 품에
둘림 언니 살내 묻혀 들어오곤 했다
산밭에 광대뼈 같은 단감이
가지 휘도록 열리던 그 해 어느 날
빗장문 열린 소리 사라지듯
그 새벽 길두는 세상으로 우릴 두고 떠났다
둘림 언니도 그 후론 보이지 않고
마른 땅에 곡괭이질 날마다 해대는
소리 한 자락만이
가을 바람이 부는 날이면 휘-휘 댄다
밤톨은 톡톡 하루를 건드리는데
그의 웃음 소리는 어느 계절로 가고 있을까
그 가을. 밭에서의 웃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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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을 위하여 1
천 구백 오십 년대 출생인 섬 출신 둘째 오빠는
다섯 살 때 신문에 있는 한문까지
모두 줄줄 꿰던 천재였다고
아버진 늘 입버릇으로 달고 사셨다
그렇게 오십 년대에 마을에서 회자되던 천재,
칠십 년대엔 어김없이 새의 부리로 최고 득점이란
학적부를 포르르 물어왔다
산밭 문서를 차례로 시장에 내다 걸고 일류 대학 출석부와 바꿔도
밑진 투자 아니라는 아버지의 억지 논리에도
오빠는 그만, 한 잔 술도 못 마신채 교회로 들락날락
목사가 되어 성경책 겨드랑이 끼고 말았다
섬마을에 플래카드 걸리던 일류대학,대학원 수석 출신 오빠
판검사는 따놓았다고 전단지 처럼 붙이고 다니시던 아버지
오빠의 목사 안수식 이후, 퀭한 눈으로
파도치는 바다만 허허로이 바라보시다
거리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목사 된 어느 놈의
빰 한 싸대기 갈기듯 슬픈 노래 한 소절 달고 오셨다
시린 세월 바다에 돛을 띄우고
아버지는 아들놈 불알 하나 들듯 먼 바다를 호령하다
막된 소주 한 잔 하늘에 부으며,
삶의 한 토막 옆구리 살을 회 뜨며 사시곤 했다
그래도 천 구백 팔십 팔 년에 태연하게 바다 끝에 목 내민 오빠
아버지는 그여, 하나님의 순한 아들을 보고는
앙 다문 입으로 하나님! 하고 삼켜 버리고
그 숱한 세월을 하나님께 통째로 바치듯 그 날은 우셨다
아마, 천국가실 일이다.
세상에 이편 저편이 천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는 것을 판결하라면
누가 이기냐 물어도
연막탄이 가리면 울기밖에 더하겠느냐
그때, 난 하늘이 어느 때 울고 웃는지 잘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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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을 위하여 2
텃밭에 밤꽃이 필 때면
유난히 막내 딸이 보고 싶다던 나의 어머니
꼬맹이인 날 닮은 풀반지 엮어주고
돌담 너머 십리길 초등학교까지 손잡고 바래다 준
다부진 어머니, 돌아와선 땡볕에서 일만 하는 어머니
하교 길, 아이들의 허리춤엔
책보자기마다 양은 도시락이 딸랑거리고
집 가까운 돌담에 첫발을 디디면
언덕배기 밭에서 금세 쳐다보고 수건을 휘젓던
어머니의 손짓
학창 시절, 서울의 많은 계단 오르기 지겹다고
용돈이 모자라 힘들다고
버스 기다려 타며 학교 다니기 귀찮다고
낡은 검은색 전화기에 투정만 실려보내는 내 말에도
히죽 웃으시는 들짐승 같은 어머니의 기다림
흔들리는 표정 들키지 않고 웃는, 나를 향한 기다림
서울 간 막내 딸이 성공할 거라는 긴 기다림
그 기다림을 위하여
오늘도 햇살 한 줄기 텃밭에 고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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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
스스럼 없이 가슴을 열어 확, 보여줄 수가 없어
허우적이며 살아온 날들
내 삶은 자꾸만 가물어 쩌억쩍 풀어헤쳐진 땅
보고 싶은 친구들 얼굴 와락 밀려들면
지쳐 헐거워진 시간의 이끼가 팽팽한 하늘이었어요
나쁜 버릇처럼 내 마음 휘감아두고
책갈피 속에 웃고 있는 빛바랜 사진들 보면서
아직도 마음 한 켠엔 열쇠를 놓지 못하고
그렇게 붙들고 온 날들이
제 속에 단단한 도자기 하나 빚곤 했지요
이제, 서운했던 사람들 쪽으로 창문 하나 열어 두고
날 보는 사람들 쪽으로 창문 하나 열어볼래요
이별의 그림은 이제 그만 그릴래요
내 마음 비스듬히 채우고 있는열쇠
화사한 웃음 지으며 스르르 풀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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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일과 어머니
[1]
언덕받이 딸기밭에 고랑지도록 큰 비 내려
어머니의 비극은 시작됐다
그 언덕 빗길 되어 미끄러져
당신의 허리뼈 흙더미 처럼 바스라지고
나이 사십오세에 꼬부랑 허리 갖게 되셨다
뒤늦은 치료에 어긋난 몸매로 억척스레
7남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사시사철 과일만 키우며 사셨다
산밭에 나무 등걸 파내며 과수원 만들고
허리에 날마다 흙지게 지면서도 웃고 사셨다는 어머니
감, 귤, 밤, 포도가 제 빛깔 내며 익어갈 때마다
고집스런 자식들의 똘망한 눈이 하나 둘 그려지고
과목들에게 계절 옷 입히듯
자식들을 사랑하는 옷 입혀가며
매서운 추위 속 매화보다 어머닌 강하셨다
[2]
아버진 늘 헛헛한 웃음 지으며
늙은 소 한 마리 꼴 먹이시며 반나절 허비하고
반나절엔 다시 막걸리 냄새 핥다가
어스름 달빛만 머리에 쓰고 비틀린 귀가 하셨다
아버진 늘 자기 자랑 잊지 않으시고
"보통학교 댕길 땐 내가 우리 핵교에선 일등이었어
교과서 줄줄 외서 스승님이 천재라 그라고..."
훗훗, 아버지의 김 빠지는 한숨 소리
가난 때문에 전쟁 때문에 멈춰진 진학
아버진 늘 비통해 하셨다
아버지 들판엔 늘 삶이 일제히 멈춰져 있고
그래도 어머닌 과수원 지켜내며 대꾸도 안하시고
과일 처럼 땡글땡글 익어가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스스로 으스름 달빛 되어
과수원 거름 주며 지켰다는 어머니
밤새도록 과일 본다면 허리 꼬부라진 것도 잊는다는 어머니
그 어머니 얼굴 보며 아버진 꼭꼭 숨으셔야 할게다
편한 몸빼 바지 인생, 과일과 함께 한 어머니
아름다운 과일향 같은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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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그 때는 걸음이 느려
- 산골 초등학교 시절, 그 때는
마음먹기보다 걸음이 더 느려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지 한참 후에야 발 떨어져
어설픈 내 모습에 내가 까르르 웃던 시절
등교 길엔 늘 돌부리에 무릎 깨져
빨간 약 발라도 또 깨지고, 진물 흐르고
홧김에 돌멩이 하나 패엥 차고 나면
더 아려오는 서른 발
마음먹기보다 헤엄도 못 쳐서
거푸거푸 물장구만 쉴새없이 동동 치다가
재갈매기 소리에 놀라 허우적이다 돌아보면
짠물만 들이키는
작달 나무보다도 크지 못했던 난,
장대 만한 친구들 틈에서 더 오그라들고
꽁지 발 딛고 살아온 날들
파도처럼 밤새 뒤척이다
낮달 허옇게 닳도록 싸돌아다녔지
마음먹기 보다 걸음걸이가 더 느려서
내 삶조차 느렸지만
슬퍼하진 않았다
그렇게 풋풋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리라
나만의 걸음 내디디며 하얗게 웃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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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프로필
한경은 (필명 : 한서희)
1967년 전남 고흥生
1982년 고흥 금산중학교 졸업
1985년 전남대 사대부고 졸업
1986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입학
1988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한국방송대학 국어국문과 졸업
1988년- 1992년 현대그룹 아산재단 홍보실 사보기자로 근무
1993년- 2003년 신문 [철상보] 취재기자,
어린이 잡지 [앙팡] 주재 기자, 도서출판 실로
발행인 등으로 활동
1995년 [사경이의 일기나라] 발행
2005년 [ 오근, 몽당연필이 내게 준 자유],
[송기억, 내 마음 고운 터에 너의 자리 비워둘게] 편집, 발행
2005년 월간 문학세계 131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04년- 현재 : 도서출판 [사과나무의 꿈] 대표, 사과나무논술센터 원장, 사단법인 한국독서능력개발원 [생각을 그리는 아이] 교사
2005년 - 격월간 [창작과 의식] 동인
2005년 한국시인협회 회원
2005년 12월 25일 첫 시집 [ 산밭에 치자향 스밀 때](도서출판 사과나무의 꿈 )출간, 동화와 수필, 단편 소설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