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유괴살해사건이라는 실화를 다룬 박진표 감독의 신작 <그놈 목소리>가 오는 2월 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6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범인과 부모의 사투만큼이나 치열했던 제작진과 서울이라는 공간의 싸움을 추적하며 완성 직전 이 영화의 에너지를 엿본다.
“미안하다. 나도 다 안다. 사과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고난의 행군이었던 <그놈 목소리> 촬영을 하면서 얼마나 처절하게 스탭들을 괴롭혔는지 박진표 감독은 몇 번이고 이 말을 꺼내놓는다. 초조하다, 힘들다, 피곤하다, 라는 단어들 중 어떤 말로도 그의 현재 마음 상태를 단번에 설명하긴 어렵다. <그놈 목소리> 촬영을 하면서 마치 영화 속 배우들처럼 깡말라 버린 감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의 대결로 인한 힘겨움을 대변한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을 초월했던 작업과정 탓이다.
<그놈 목소리> 제작부는 촬영 초기 박진표 감독이 시나리오 단계에서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온 곳들을 섭외해야 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과 컨셉을 논의했던 안수현 프로듀서는 '이번엔 편하겠네‘ 싶었다. 석 달간 지방 가서 보따리 장사를 하고 온 것 같았던 <너는 내 운명> 때와 달리 장소는 온통 서울이었고 지하 주차장과 차, 길을 왔다 갔다 하면 되는 동선이 보였다. 시나리오상에서 중요 장소는 다 지정돼 있으니 섭외만 하면 될 듯했다. 어떤 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전국을 뒤져야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영화작업에서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건 엄청난 오산이었다.
사람 지치게 하는 아파트와의 싸움
박진표 감독과 안수현 프로듀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로케이션 장소로 꼽는 곳은 실제사건이 일어났던 영화의 배경, 서울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다. 여기서 아이가 유괴되고 범인이 협박전화를 해오며 부모는 절망한다. 박 감독은 “원래 현대 아파트 2**동에서 일어난 사건이니까 그 장소에서 찍으려고 애를 썼다. 거기에서 출발해 거기서 끝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놈 목소리> 시나리오에는 현대 아파트 2** 동 놀이터 앞, 엘리베이터, 지하실 등등이 명시돼 있다. 그중 아파트 내부 아버지 한경배(설경구)와 어머니 오지선(김남주), 아들 한상우가 살았던 집 안의 장면은 무려 영화의 35%를 차지한다. 공공연하게 인터뷰에서 “무릎을 꿇고서라도 허락을 받겠다”고 했던 터, 도저히 아파트를 찍지 않을 수 없었지만 촬영 초반 아파트 로케이션을 하면서 <그놈 목소리>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다.
현대 아파트 로케이션은 당연히도 험난했다. 처음부터 촬영 자체를 거부당했다. 사생활 침해, 주차 문제 등 주민들의 불편을 초래할 여러 이유들 때문이었다. 제작진은 대안이 될 만한 다른 현대 아파트를 찾아보려 했지만 비슷한 그림이 되는 곳이 없었고 실제 아파트는 어디나 상황이 비슷했다. 영화의 내용이 민감하지만 속일 수는 없는 노릇. 내용을 알려주면, 늘 “아이고 됐습니다”라는 거절의 멘트가 돌아왔다. 어떻게든 밀고 들어가 하루만 찍고 빠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박진표 감독은 아파트 외관은 물론 집 내부까지 세트보다는 실제 로케이션 촬영을 원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파트 내부 촬영이 가능한 집을 전세로 얻거나 빌려서 촬영하는 방법도 고민해봤지만 35%라는 분량을 소화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결국 아파트 외관만 로케이션 촬영을 하기로 하고, 콘티를 짜보니 4회차 분량이 나왔다. 일단 부딪쳐보자는 안수현 프로듀서 이하 제작부들의 생각은 현대 아파트 첫 회차 촬영 분량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주연배우 설경구를 본 주민들이 집에서 인터넷을 뒤져 설경구의 최신작이 1991년 1월 29일 서울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에서 일어난 이형호 어린이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임을 확인했고, 이후 왜 그런 영화를 여기서 찍느냐, 왜 악몽을 떠올리게 하느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항의를 수렴한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다시 오지 말라는 통보를 전했다. 이날 촬영분은 공교롭게도 한경배의 아들 상우가 범인에 의해 유괴되는 놀이터 장면이었다. 그리고 밤에 비가 내렸다. 예고도 없이 부슬부슬 내린 비가 긴장된 신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하지만 금세 아파트 주민들의 퇴근시각과 맞물리면서 그날 촬영분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비를 피해야 하는 탓에 현장 분위기는 부산해졌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고 그날 촬영이 끝나자 아예 장대비가 쏟아졌다. 현대 아파트와 놀이터가 함께 걸리는 마지막 인서트 컷을 찍는 순간, 현장에선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정말 형호가 우는 게 아닐까?’. 워낙에 반대를 무릎 쓴 촬영이라 스탭들과 배우에게 이날의 촬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다음 날 아침 주민들이 아파트에 남겨진 <그놈 목소리> 팀의 흔적을 목격한 후 두 번째 회차부터는 아파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극악스러웠다“고 회상하는 감독의 질책 탓이었는지 스탭들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여곡절 끝에 2회차 아파트 촬영이 진행됐다. 그리고 나머지 3, 4회차 분량의 신을 3회차에 한 번에 줄여가기로 했다. 그런데 또 아파트에 못 들어가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들의 목숨을 두고 협박을 하는 범인과 부모의 피 말리는 44일을 되도록 순서대로 찍어나가는 게 드라마의 구조나 감정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제작진의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역시 수정이 불가피했다.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파트 로케이션 촬영 스케줄을 후반부로 미루고 제작진은 양수리 종합촬영소에 만든 아파트 내부 세트 촬영을 시작했다. 그동안 안수현 프로듀서와 제작부는 매일 현대 아파트로 출근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반상회에 들어가서 무릎 끓고 울고 빌며 매일 관리실에 찾아가서 읍소하던 제작진은 심지어 가가호호 방문해서 일일이 허락을 받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의사결정의 중심이라는 아파트 주민대표를 만나도 허사였다. 제작진은 평일 낮에 주민들이 거의 없는 시간대에 차도 다 아파트 단지 밖에 놔두고 필요 인원만 들어와서 소수 정예로, 정말 조용히 찍고 가겠다며 통사정을 했다.
영화의 배경은 한여름, 7월에 시작된 이야기인데, 애타게 아파트 촬영허가를 구하고 있을 무렵엔 10월이 됐고 아파트 주변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안수현 프로듀서, 제작부는 물론 영화사 집 이유진 대표까지 모든 관련자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더 이상 미루려야 미룰 수 없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조용히 들어와 찍고 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읍소한 지 한 달 만이었다. 다행히 아파트 외관을 찍을 장소엔 아직 단풍이 미처 닿지 않았다. 꼭 이뤄내야만 했던 것에 대한 집착과 집념, 끈기가 낳은 결과였다. 모르긴 몰라도 제작부는 지옥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안수현 프로듀서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44일을 내가 겪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한다.
세트인 줄 모르는 세트
모든 촬영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근 40여 곳을 돌며 이뤄졌다. 앞서 말했듯 시나리오상에선 실제 장소를 이미 지정해놓은 곳이 많았으나 그곳들은 대부분 쉽게 섭외가 되는 곳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참으로 여러 사람 괴롭힌 <그놈 목소리> 로케이션의 삼중고랄까.
도저히 실제로 촬영을 할 수 없어 양수리 종합촬영소에 세운 아파트 내부 세트는 실제 아파트의 내부를 방불케 했다. 원래 세트란 촬영이 용이하도록 인위적으로 천정을 높게 짓거나 공간을 많이 변용시켜 그림이 나오도록 디자인을 하는 법. 하지만 <그놈 목소리> 아파트 내부 세트는 ‘그냥 집에서 찍었나 보다’라고 착각하게끔 실제 구조를 적용해 만들었다. 미술팀이 아파트 평면도를 구해서 40평대의 인테리어가 좀 된 집의 느낌이 나도록 작업했다. “아마 봐도 세트인지 알아채지 못할 거다”라는 게 박진표 감독의 생각이다.
상우가 혼자 놀던 아파트 지하 아지트와 유괴사건이 일어난 이후 경찰들이 아지트 옆에 만들어놓은 지하 상황실도 세트로 지어졌다. 사실 이 두 장소는 아파트와 연결돼 있지만 꼭 문제의 현대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찍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아무 곳에서나 찍을 순 없었다. 상우가 아지트를 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구석진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하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야 하고, 거기에 사다리가 달려 있어야 한다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박진표 감독은 스탭들이 헌팅해온 장소 중 마음에 드는 지하실을 세 군데 짚어서 섭외를 시작했는데, 웬 걸 세 군데 다 촬영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제작진은 세트를 지었다. 감쪽같고 아무도 모를 그런 세트를.
아파트 내부와 지하 아지트에 들어간 가구나 소품들은 모두 스탭들의 집에서 조달해왔다. 트럭을 하나 빌린 박 감독은 본인의 집, 프로듀서의 집, 조감독의 집 등등을 돌면서 책, 옷가지, 장난감, 소품, 그림 등을 싣고 왔다. 꼭 단편영화를 찍듯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박 감독이 이거 싣고, 저거 실어, 라고 지시해 모은 소품들이 가족의 아파트와 상우 아지트, 지하 상황실 세트에 뿌려졌고, 세트가 세트임을 알리지 말자는 제작진의 노력으로 인해 15년 전 어느 단란했던 가정의 풍경은 교묘히 되살아났다. 극중 9시 뉴스 앵커로 등장하는 아버지 한경배의 직업 때문에 영화의 첫 장면인 방송국 장면도 세트로 진행됐다. 실제 방송국 특히 보도국은 24시간 돌아가는 불야성이기 때문에 촬영을 진행할 수 없었고, 방송국 내에 있는 스튜디오에 보도본부 세트를 만들어 촬영을 감행했다. 영화의 문을 연 한경배 앵커의 뉴스데스크를 첫 장면으로, <그놈 목소리>가 추적한 15년 전 세상의 쳇바퀴는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15년 전으로 되돌아가기
<그놈 목소리>의 절대적인 3대 장소는 주인공들의 집이 있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 차 안이다. 즉, 집, 차, 거리가 삼박자를 이룬다. 터널을 막고 찍은 동호대교 앞 그리고 동호대교 건너서 옥수동 가는 길, 압구정에서 가장 많이 막히는 도로인 현대백화점 앞 2차선 도로, 그리고 롯데월드 앞 사거리. 대한극장 앞 사거리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하게 막히기 일쑤인 서울 시내 곳곳에서 <그놈 목소리>의 촬영이 진행됐다. 이리 가라, 저리 오라, 돌아가라 등등 사람 미치게 하는 범인의 지시에 따라 부모 역의 설경구, 김남주는 인도를 걷고 뛰고, 헤매야 했다. 배우들의 그 모습을 카메라가 바로 옆에서 따라잡는 장면들이 많다 보니 상당 부분 차선을 막고 촬영해야 했다. 무시무시한 교통지옥 서울에서 웬만하면 어느 정도 타협을 했겠지만 박진표 감독은 “이번 영화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놈 목소리>의 무대포식 길 통제는 사실상 서울 시청 경찰청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민원을 감당할 수 없다며 일선 담당 경찰서들에선 다들 기겁을 했지만 영화의 취지에 공감, 공분해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 경찰청의 허가로 서울 시내 도로 촬영과 통제는 상당 부분 해결됐다. 물론 한 장소에서 대략 5~6시간을 확보해 동선을 만든 후 재빨리 촬영을 끝내야 했기에 매 촬영 하루 전 정확한 콘티와 철저한 계획은 필수였다.
거리 촬영의 두 번째 고단함은 너무도 확연하게 변해 있는 장소들 때문에 생겨났다. 건물 외벽을 완전히 리뉴얼한 갤러리아백화점, 멀티플렉스로 변모한 충무로 대한극장은 15년 전의 느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대표적인 장소. 궁여지책으로 바꿔야 했기에 제작진의 스트레스가 컸다. 갤러리아는 그래서 남산 케이블로 바뀌었다. 물론 역시나 섭외는 힘들었다. 15년 전과 변함은 없고 실제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던 롯데월드 역시 섭외가 힘들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장소인데 유괴영화라니 이게 웬 말. 하지만 롯데월드는 범인이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며 회오리를 돌리는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라 다른 곳으로 대치할 수 없었다. 하루 대여비 2천만 원을 주겠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롯데월드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놈 목소리> 쪽도 타협이 불가능했다. 결국 롯데월드 안으로 제작진이 들어가기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음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다.
롯데월드 앞 사거리에서도 문제가 속출했다. 한경배 역의 설경구가 아들 상우를 애타게 부르며 안타깝고 절실하게 뛰어가는 장면을 찍기로 한 날이었다. 일단 희뿌연 가로등 밑을 달리며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아내기엔 도로 가로등 불빛이 너무 약했다. 영화를 찍으면 노출이 맞지 않기 때문에 스탭들은 가로등 안 전구를 다 갈아주고, 가로등 위에 조명등을 전부 따로 달아줘야 했다. 조명팀이 촬영 6시간 전에 현장에 나와 가로등 전구를 다 바꾸고 세팅을 해놓은 후 이윽고 카메라를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등장한 어느 구청직원으로 인해 가로등 위의 전구들을 떼어내고 그날 촬영을 접은 일이 벌어졌다. 6시간 걸려서 붙인 전구를 겨우 10분 만에 철거하게 만든 ‘가로등 이 씨’의 사건 외에도 <그놈 목소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는 현장의 나날을 통과해야 했다. 현재 멀티플렉스로 변모한 충무로 대한극장도 실화와 달리 장소를 변경한 곳 중 하나다. 15년 전의 흔적을 내기 위해 대한극장 건너편의 극동극장이 선택됐다. 촬영 당시 극동극장 건물은 문을 닫고 임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절대 손도 못 대게 하는 건물을 촬영해야 했고, 복안으로 건물 앞에 차를 한 대 대서 포스터를 걸려고 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곳이 범인이 지정해놓은 지점인 극장임을 관객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극동극장 촬영이 끝난 날 박진표 감독은 “마의 극동극장, 다 찍고 나갑니다”라고 시원한 클로징 멘트를 남겼다.
주요 건물뿐 아니라 주변부를 만드는 것도 힘들었다. 15년 전의 일을 재현하다 보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도 많았다. 우선, 주변의 차를 전부 15년 전 브랜드의 차들로 바꿔놓아야 했다. 제작진은 아예 옛날 차들을 구입했다. 옛날 차량의 대여료가 하루 한 대에 40만 원. 20회차 촬영을 진행할 때 한 대에 100~150만 원, 비싸면 400만 원 가량인 옛 차를 사는 것이 훨씬 실속 있는 장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올드 브랜드 차량 12대를 사서 지하 추자장이나 차 신을 찍을 때 늘 이 차들을 주변에 깔아놓고 촬영을 진행했다. 도로에서 대량의 차들이 등장해야 하는 신에서는 옛날 차 동호회를 통해 차량을 대여했다. 15년 전 유행하던 카폰을 차에 달아야 하는 문제도 난관에 부딪혔다. 범인이 아버지를 괴롭히는 최적의 무기로 사용했던 카폰은 15년이 흐른 2006년엔 아예 개통조차 불가능한 구시대 산물이 돼버렸다. 제작진은 모양은 카폰이지만 실제론 휴대전화 선을 연결했고 그 카폰을 들었을 때 강동원의 ‘그놈 목소리’와 통화하도록 작업을 했다. 이 외에도 15년 전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CG 업체 EON이 현재 대량의 CG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요즘 서울의 현란한 간판들을 지우고 15년 전 간판들을 그려 넣고, 서울의 모든 도로에 새겨진 전용차선을 지우고, 지나가는 버스의 색깔을 바꿔야 하는 어마어마한 CG 지우개질. 2006년의 흔적이 지워질 때 1991년의 아픔이 살아났다.
설경구, 밤새 달린 더스틴 호프먼
<그놈 목소리> 촬영현장에서 감독과 배우, 스탭들 사이엔 금기시되는 말이 하나 있었다. "네 아이라고 한번 생각해봐.“ 박진표 감독은 촬영장에서 한 번도 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차마 입으로 꺼낼 수 없을 만큼 절실하기도 했고, 그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 배우들이 부모의 심정에 다가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범인의 협박전화에 시달리며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서 있기 위해 설경구는 자기 몸을 영화에 내맡겼다. 영화 초반엔 조금 듬직하고 각이 잡힌 뉴스 앵커의 모습이었다가 아이를 유괴당한 후부터 급격히 말라가는 아버지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일단 로케이션을 하면서 대략 시간의 흐름대로 촬영을 하다 보니 설경구는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몸을 세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다시 불려야 했다. 영화 초반에 아파트 내부에서 범인의 전화를 붙들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절망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세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찍으면서 점점 살이 빠지다 보면 세트 촬영의 마지막은 거의 영화의 후반부가 돼, 아버지 설경구는 완전히 말라붙고 예민한 상태로 남게 됐다. 그렇게 미치도록 세트 촬영을 끝내고 나면 다시 초반에 섭외가 안 돼 진행이 힘들어 미뤄뒀던 로케이션 장면들을 몰아서 찍어야 했고, 그 신들이 영화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터라 설경구는 다시 살을 찌워야 했다. 몸을 불리고 빼기를 한 영화에서 두세 번이나 반복해야 했으니 배우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몸을 맞춤으로써 마음이 따라가게 한다”는 설경구의 의지는 극단적인 단식으로까지 나타났다. 안수현 프로듀서의 비유를 빌자면 "영화 속에서 밤새 뛰어온 장면을 찍어야 했던 더스틴 호프먼과 로렌스 올리비에 중 설경구는 더스틴 호프먼과다." 특히나 <그놈 목소리>의 설경구가 그렇다. 안수현 프로듀서는 “연기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유유자적 신문을 읽고 있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달리 실제로 집에서부터 밤새 촬영장까지 뛰어온 더스틴 호프먼은 그냥 그 인물이 돼서 현장에 와버린 거다. 설경구 선배도 그렇게 현장에 왔다”고 말한다. 그는 감독이 “그 아버지가 무슨 밥을 먹겠어, 무슨 잠을 잤겠어”라고 말하면 정말 안 자고 오고, 안 먹고 왔다. “아마 밤새 술 먹었겠지”라고 하면 정말 밤새 술 마시고 한숨도 안 자고 왔다. 그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설경구의 태도는 현장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스탭들의 태도도 변화시켰다. 박진표 감독이 아무리 신나는 음악을 틀어놔도 설경구의 존재감 때문에 현장엔 항상 긴장이 흘렀다.
세련된 미시형 주부에서 밤새도록 전화기를 붙들고 오열하던 어머니로 변모하는 김남주 또한 자신을 던지기는 마찬가지. 미칠 것 같은 심정 때문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신에서 텅텅 소리가 나도록 가슴을 쳐대더니 그 다음날 현장에 온 김남주의 가슴은 멍으로 시꺼멓게 뒤덮여 있었다. 가슴이 탄다, 시꺼멓게 된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현한 김남주의 살벌한 멍자국은 분장이 아니라 실제 흔적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부모의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긴다. 아버지와 어머니 곁을 지키는 경찰의 김영철과 고수희, 형사 부장 역의 송영창까지 모두 이 회오리 안에 동참한다. 박진표 감독은 “이 영화가 재밌다, 어쨌다라는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분명 영화에 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놈 목소리‘ 역으로 캐스팅된 강동원도 이 에너지파의 영향을 받았다. 단 한 번도 화면에 자신의 실제 얼굴을 내밀지 않지만 그는 자기 녹음분량이 없을지라도 매일매일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일종의 상대역인 설경구와 김남주에게 '그놈 목소리’가 되어 전화를 걸어줬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부모의 심정을 유지하는 데엔 현장에 상주한 ‘그놈 목소리’ 덕이 컸다. 제작진은 수많은 전화통화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ADR를 전혀 따지 않고 100% 현장녹음을 진행했다. 제작진은 봉고차 한 대를 구해 내부를 방음장치를 갖춘 녹음실로 만들고 매번 현장에 그 차를 대동시켰다. 봉고차 안에는 항상 녹음기사 둘과 제작부 한 명, 연출부 한 명, 그리고 강동원이 타고 있었다. 한여름에 녹음 때문에 에어컨도 못 켜는 상황에서 사람까지 꽉 들어찬 봉고차 안은 그야말로 찜통. 100% 현장녹음이라는 전례 없는 시도는 이런 의외의 희생을 통해 이뤄졌다.
우린 널 기억한다
<그놈 목소리>는 촬영 시작 후 25일 동안 17회를 찍었다. 당시 대대적인 장마로 충무로 대다수 영화팀이 2~3회차 촬영을 넘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17회의 촬영기간 동안 <그놈 목소리>는 14회차에 달하는 촬영분량을 비를 피하는 대신 비를 안고 찍었다. 비오는 날 실내 들어가서 찍고, 실외에서 비가 오면 막고서라도 찍고, 비를 아예 맞고서 찍고, 비가 오는 장면으로 바꿔서도 찍고. 그랬기에 제 시간 안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뜨거운 8월, 호우주의보가 내려 강북 강변도로가 거의 물에 잠긴 날에도 <그놈 목소리>는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세트 촬영이 끝난 촬영 후반부 40여일 가뭄이 계속 되더니만 영화의 후반부 중요한 인물이 발견되는 한강 고수부지 신에서는 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한강에 비가 떨어지는 모습은 CG로도 해결이 안 되는 터라 한숨을 쉬었던 제작진의 고민을 단번에 해갈시킨 단비였다.
44억의 순 제작비가 투입된 <그놈 목소리>는 현장의 부득이한 상황으로 촬영을 접었던 7회차를 포함해 총 70회차로 촬영을 마감했다. 2006년 7월 7일 크랭크인해 11월 3일 크랭크업하기까지 지 영화 속 피 말리는 44일의 기록을 찍어낸 스탭들의 3개월 20일은 눈 깜짝 할 사이 흘러갔다. 촬영을 진행하는 매 순간마다 ‘형호가 도와주려는 것과 그놈이 방해하는 것’ 사이의 기싸움 같은 게 느껴졌다는 안수현 프로듀서의 말은 단순한 영화 스탭의 자기합리화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촬영 내내 스탭과 배우들 사이에서 “그놈이 잡힐까? 잘 살까? 자수할까? 잡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얘기가 오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절실했고, 긴장했고, 고민했다. 박진표 감독은 “모든 것을 떠나서 우린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15년 전엔 나 혼자였지만 이제는 우리, 이 사회가 널 기억할 거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 사건 당사자였던 이형호 어린이의 부모들도 격려의 전화를 걸어왔다. 유려한 카메라 워크와 미술, 조명, 사운드, 후반작업을 배제하고, 정해진 스케줄과 예산 안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그놈 목소리>는 그 교과서적인 원칙들을 지켜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 영화다. 무난한 차선보다 최우선을 선택하기 위해 타협을 미루고 미뤘던 <그놈 목소리>는 오는 2월 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단 한 번의 추가촬영도 없이, 디렉터스컷을 만들 만큼 버리기 아까운 장면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하나의 버전으로 완성되는 <그놈 목소리>는 뜨겁고도 냉정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