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출생과 병역에 대한 비밀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일반에 루머로 제기돼 있던 아이템 이상의 충격적인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의 아버지 이름은 33살까지 이덕쇠였다이명박 가의 호적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본 시대에 일본말과 한문으로 기록됐던 이명박의 부친 이충우씨의 제적등본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충우로 알려진 아버지 이름은 ‘이덕쇠’였습니다.
당시를 살았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나, 옛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들을 보면 하인들 이름에 ‘쇠’라는 이름이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마당쇠’ ‘떡쇠’ ‘돌쇠’ ‘꺽쇠’ 등 등. 그런데 자서전에는
이명박이 아버지를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이 몸에 밴 전형적인 양반타입”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름 ’덕쇠‘를 보는 순간 양반의 이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쇠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소화 14년(1939)에 이름을 충우로 개명했고, ‘이유’ 란에는 ‘허가에 의해 이름을 덕쇠에서 충우로 바꾸었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33세에 개명을 한 것입니다
이충우에 대한 새로운 호적등본이 나왔습니다. 1960년대에 ‘가로’(횡)체로 새롭게 작성된 등본이었습니다. 이게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단기’ 시대에 태어났고, ‘서기’ 시대에 결혼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제 제적등본을 떼어보니 1961년 이전에는 ‘단기’ 연호로, 1961년 이후에는 ‘서기’ 연호로 표기돼 있었고, 횡서체가 아니라 종서체로 작성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충우의 새 등본은 횡서체로 작성돼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 등 모든 가족들의 기록들이 ‘서기’연호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충우의 호적이 1960년대에 새로 제작됐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구 호적과 새 호적이 틀리게 기록돼 있다. 호적세탁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호적을 다시 기록하려면 옛날 호적상에 나타난 변경사항들을 그대로 사진 찍듯 옮겨놓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구 호적에는 이덕쇠가 이충우로 개명됐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는데 새 호적에는 이 개명사항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개명을 했다는 사항이 호적에 필수 기록항목인지의 여부를 알아보니 위해 저는 4월 6일, 가정법원의 호적과와 동사무소를 찾아 물어 보았습니다. 개명은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사항’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구 호적에는 이덕쇠가 채태원과 결혼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귀선, 상은, 상득, 귀애가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 생산된 자손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새 호적에는 이충우가 채태원과 결혼을 했고, 귀선, 상은, 상득, 귀애가 모두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 탄생된 자손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새 호적에는 왜 이 중요한 개명 기록이 빠져 있으며,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모두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로 세탁되어 기록되어 있을까요?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옛날에는 ‘개똥이’를 한문으로 ‘개동’이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양반으로 묘사한 이명박에게는 ‘덕쇠’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페이지 단위로 호적 갈아끼우기 의혹까지새 호적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또 이상한 사실들이 발견됐습니다. 아래 사진들과 같이 이충우씨의 새 호적등본을 보니 이충우, 채태원 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의 이름 옆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습니다. 아마도 1968년도에 찍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새 호적에는 모든 식구들 중에, 유독 이상득과 이명박이 기록돼 있는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1968년에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던 어느 날, 서기는 모든 식구에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고무도장을 찍었을 터인데 유독 정치인 형제가 들어 있는 2개 페이지에 들어 있는 4명의 식구들에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그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호적 서기가 한 가정에 속한 다른 가족들에게는 모두 고무인을 찍으면서 유독 정치인이 돼 버린 이상득과 이명박이 등재돼 있는 2개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놓고 저는 이런 해석을 내려 보았습니다.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던 1968년, 이충우 가문의 호적을 담당했던 서기는 모든 식구들에게 일괄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기 위해 고무도장을 다 찍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는 호적에는 유독 이상득과 이명박이 들어가 있는 2개 페이지에만 고무도장이 빠져 있다. 고무도장을 찍은 후의 그 어느 날, 호적 서기는 고무도장이 찍혀 있던 2개 페이지를 뽑아서 파기하고, 새로운 2개의 페이지를 만들어 대신 끼워넣었을 것이다"
저는 이를 호적세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서전은 실화가 아니라 희망사항
구 호적에는 이덕쇠의 맏형인 ‘이무특’의 8남매에 대한 기록들이 질서 있게 모두 다 정리돼 있습니다. 이무특은 1924년 9월까지 남매를 포항에서 낳고, 10년 후인 1934년에 셋째 아이부터 줄줄이 일본 오사카에서 낳았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이덕쇠의 맏형인 이무특은 1924년과 34년 사이에 일본 오사카시로 가서 이덕쇠와 이웃하여 나란히 살았습니다. 오직 이덕쇠의 바로 위의 형인 이경특만이 1934년에 포항 그의 아버지 주소 옆으로 분가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땅뙈기에서 농사를 지은 사람은 3형제 중 이경특 혼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박 자서전 38쪽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충우는 포항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경북포항시 북구 홍해읍 덕성리 농사꾼 집안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작은 땅 뙈기는 두 형에게 돌아갔으므로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 . 1935년 고향친구 몇 사람과 함께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고용됐다”
자서전을 보면 이덕쇠의 두 형이 한국에 남아 있고, 이덕쇠만 오사카로 간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구 호적을 보면 이덕쇠는 맏형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이웃해 살았습니다. 자서전이 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서전에는 1935년에 아버지가 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자리 잡고 돈을 벌어 포항에 나와 어머니와 결혼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6남매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구 호적을 보면 이덕쇠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1930년 1월에 귀선이를 낳았고, 만 1년 1개월만인 1931년3월에 채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기 13개월 전에 첫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1935년도에 총각이었다니 이런 황당한 만화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 구 호적을 보면 모친 채태원씨는 1938년에 포항에 돌아와 귀애를 낳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명박과 이말분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39년 6월 6일에 이름을 이충우로 바꾸고, 9월에는 분가를 했습니다. 채씨가 1938년에 포항에 돌아와 귀애를 낳을 때, 그녀에겐 4살, 7살, 9살배기 아이들이 딸려 있었습니다. 벌어먹기 바빴다는 이덕쇠는 아마도 일본에 남아 있고, 채씨만 포항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가정도 가능합니다. 여튼 6남매를 모두 일본에서 낳았다는 자서전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이덕쇠와 채씨는 1941년에 이명박을 1945년 3월에 이말분을 일본에서 낳은 것으로 호적이 정리돼 있습니다. 이복 형제 여부는 채씨가 1938년 12월, 4째 아이인 귀애를 포항에 돌아와 낳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느냐, 아니냐에 의해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이복형제설의 초점은 바로 이 대목에 있습니다. 만일 해방 후, 덕쇠와 채씨 사이에 갈등이 있고, 화목하지 않았다면 이는 바로 이복형제설에 관련한 갈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걸 근거와 논리에만 의존해야 하는 저로서는 이 이상의 추리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채씨의 사망신고, 만 8년씩이나 미룬 이유가 무엇일까?
새 호적을 보면 채태원씨는 1964년 12.15일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에서 사망했고, 사망신고는 1972년 2,22일, 이귀선의 남편 김갑원씨가 했습니다. 사망신고가 만 8년이나 지연된 것입니다. 채태원씨는 55세에 사망했고, 사망 당시 이충우는 57세였습니다. 사망신고가 이렇게 상식을 초월할만큼 지연된 것도 이해되지 않고, 사망신고를 아버지가 하지 않고 맏사위가 한 것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충우씨는 1982년9.21일, 75세로 경기 이천군 호법면에서 사망했습니다(영일농장). 이 이상한 사실에서 많은 짐작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부인이 사망했어도 모를 만큼 혹시 이충우씨가 부인 채씨와 왕래하지 않고 별거하는 사이로 지낸 것이 아니었을까? 혹시 맏딸과 채씨가 충우씨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을까? 사망신고를 빨리 하면 재산이 이충우에게 빨리 갈 것이고, 그게 싫어서 사망신고를 질질 끈 것은 아니었을까. . . .만일 별거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세간의 루머처럼 배다른 형제 문제로 인해 사이가 벌어진 것은 아닐까 . . .
마음먹고 분석을 하다 보니 제 머리 속에는 이런 게 떠올랐습니다.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 비정상적인 일에는 의혹과 상상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원인은 이명박이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질문자들에게 신경질을 내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고소하는 등의 이상 반응을 보이며 신뢰를 잃은 데에 있습니다. 이명박이 바로 의혹을 부른 장본인인 것입니다.
50세 전후의 어머니, 30세 전후의 큰 누나는 당시의 타워팰리스에서 잘 살았는데!
이렇게 어머니와 누나가 시쳇말로 눈나오게 잘 살고, 이상득은 가정의 지원으로 서울대에 갔는데 이명박만은 그토록 눈물나게 고생을 하고 자랐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시절, 리어카를 끌어가지고는 먹고 사는 문제만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고대의 학비는 매우 높았습니다. 리어카를 끌어서 학비를 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학생회장 선거에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리어카를 끌어가지고 학생회장 선거 비용을 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무협지나 만화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50대 초의 어머니는 30세 전후의 큰 누나와 함께 초호화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들을 리어카 꾼으로 고생시켰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명박 자서전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 낼 것
누군가가 1960년대에 이충우에 대한 새 호적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덕쇠라는 이름이 일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득과 이명박이 기재된 페이지는 다른 페이지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통념으로 이런 것을 혹시 ‘호적세탁’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많은 분들의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명박씨가 그냥 자연인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입니다. 기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투명성이 없는 행동과 거짓말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따져야 할 것입니다. 구 호적을 보면 이명박의 자서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거짓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명박의 아버지와 큰 아버지의 가족들이 대가족 단위로 모두 일본에서 살았습니다. 이 부분 역시 자서전과 많이 다릅니다.
여기에 더해 이명박이 결혼하고 자식들을 생산한 데 대한 기록들이 참으로 무질서 합니다.
처: 김윤옥 혼인신고일 1973년 4월30일
자; 주연 1971년12월11일생 신고일 75년2월5일 출생장소: 필동(병원표시 없음)
자: 승연 1973년6월1일생 신고일 75년2월5일 출생장소: 필동(병원표시 없음)
자: 수연 1975년5월19일생 신고일 79년8월6일 출생장소: 영등포(병원표시 없음)
자: 시형 1978년3월7일생 신고일 79년8월6일 출생장소: 한남동(병원표시 없음)
이명박 부친에 대한 새 호적이나 이명박이 거느리는 직계 가족에 대한 호적이 무질서한 공사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작거리 인생들도 이 정도로 험한 호적기록은 갖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소를 당하지 않았다면 위 사실들은 세상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병역비리에 대한 조사결과를 내놓을 것입니다. 병역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저는 이명박의 자서전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을 낼 예정입니다.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는 그의 자서전은 즉시 판매중지 돼야 할 것입니다.
2007.4.6.
[시스템클럽 지만원]
댓글도 올려본다 ///////////[수컷여우]
고대경영 61학번인 이명박이 대학입학을 위해 리어카를 끌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어렵게 생선장사를 했다는 것은 이명박 강연에서 직접 들은 말이다
그리고 이명박이 입학금때문에 대학등록을 포기하려 할 즈음 시장통 사람들이 이명박 어머니의 인품을 믿고 이명박에게 시장 쓰레기를 치워주는 조건으로 등록금을 미리 빌려주었다는 얘기도 당시에는 참으로 감동스럽기 까지 했다
그런데 이명박의 어머니가 1964년 12.15일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에서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명박의 모친은 시장통에서 생선을 팔면서 맨션아파트에 살았다는 얘기인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는 당시로선 현재의 타워팰리스 아닌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추론해보면
가정 1. 이명박의 자서전 및 강연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정 2. 이명박에게는 이복형제들이 있고 누나들과 이명박은 사이가 좋지 않다
당시 한강맨션에 거주할 정도면 이명박의 누나들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이나 가정불화로 따로 생활했다.
시장통에서 생선장사를 한 어머니는 채태원이 아니라 이명박의 친모이다
만약 가정 1이라면 이명박의 도덕성은 더 이상 가치가 없개되고 가정 2라면 다른곳에서 불거지기전에 이명박 스스로가 밝힐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장인의 빨치산 경력이 문제가 되었을 때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란 대응으로 오히려 여성표를 모으는 결과로 전화위복한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