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이웃에 손곳노인이 살았다. 그냥 손곳노인이지 내력이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연세는 많았으나 자식이 없어서인지 마을에서 천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손공원노인이었고 평생을 보부상으로 지낸 분이었다. 손공원을 우리는 송곳으로 연상하여 손곳노인, 손곳노인하며 불렀던 것이다.
보부상은 보상인 봇짐장수와 부상인 등짐장수를 일컫는 말이다. 봇짐장수는 주로 잡화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황화장수나 방물장수들로 여자들이었으며, 등짐장수는 지게에 물건을 지고 다니는 남자들을 말한다. 봉화지역에서는 등짐장수를 등금쟁이, 또는 선질꾼으로 부른다.
고려시대부터 생겨난 보부상 조직은 이성계의 개국을 도와 삼척에서 오백나한을 석왕사로 옮겼다. 이때 보부상 두령이었던 백달원은 후대 보부상들이 대두령으로 신격화한다. 충남예산 상무사에는 보부상 접장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백달원을 주향으로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으며 상업활동을 하면서도 임진왜란 때는 행주산성전투에 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에 식량을 운반하였으며 정조의 화성(華城) 축조시에는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였고, 홍경래(洪景來)의 난에는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강화도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는데 기여했다. 1882년에는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발한 민영익(閔泳翊)이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들을 이끌고 동대문까지 도달하여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을 내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도 동원되어 동학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898년에는 황국협회가 보부상을 이용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보부상은 나름대로 철저한 조직을 갖추고 두령인 접장(接長)이 일행을 통솔하였으며, 조선말에는 전국적인 상단(商團)으로 결집된다. 해상공국, 상리국, 상무사 등으로 보부상 조직은 이름이 바뀌면서 조직원들은 나름대로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맡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영위, 접장, 반수 등 우두머리급 조직원과 공원으로 불리는 하부 조직원이 있었던 것이다. 손공원도 그런 보부상 조직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손공원은 평생을 보부상으로 지내다가 늙어서 할머니 한 분을 얻어 우리 마을에 들어와 종신지처로 삼았고 이 불쌍한 노인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기둥감을 베어 오고, 날개를 엮어 초가를 지어 주었던 모양이다.
뒤뜰이장터는 지금은 물야저수지로 변했지만 1940년 대까지도 성황을 이룬 큰 시장이었다. 뒤뜰이에서 박달재를 넘으면 금정광산으로 들어가고, 또 얼마를 더 들어가면 상동광산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우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최북단이 뒤뜰이였고 이곳에서는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금정광산에 있는 수만 명 광부들의 생활물자는 뒤뜰이장을 통해 들어갔다. 보부상들은 뒤뜰이장터에 집결했고 말을 매어두는 마방거리까지 생겼다. 등금쟁이들은 이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뒤뜰이 주변에 집을 짓고 농토를 마련했던 것이다.
등금쟁이들은 쪽지게를 지고 다녔다. 쪽지게는 보통 지게보다 좀 적었고 무게도 가벼웠다. 짐을 지고 일렬로 산길을 가다가 잠시 쉴 때면 우두머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몸을 획 돌려서 지게목발을 내려놓았다. 지게작대기를 지게목에 괴는 것이 아니라 다리 사이로 들이밀어 잠시 지게를 지탱하면서 서서 쉬었다. 그래서 선질꾼이라 한다. 오전 약수터를 지나 박달재를 넘으면 조재, 금정, 우구치로 갈 수 있다. 이 길은 바로 보부상들의 주된 통로였다. 박달재는 경상도에서 강원도 땅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이곳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을 위한 장소라기 보다는 박달재를 넘는 사람들의 안전을 빌기위한 기도처였다. 등금쟁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이 고개를 넘었을 곳이고 수많은 애환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곽개천이라는 보부상이 오전약수터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을 넘는 보부상의 역사는 연원이 길다. 애전마을에 살던 보부상이 죽으면 그가 소유한 땅은 마을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60년대에는 수십 두락의 땅이 마을 공동 소유로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냥 땅을 부쳐먹기 미안해서인지 몰라도 해마다 보부상 위령제를 지내왔다. 물야저수지가 들어서자 이장이었던 장학조 씨가 중심이 되어서 보부상 위령비를 세우고 지금도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소외된 삶을 살았던 보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별로 없듯이 보부상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충남 예산과 경북 고령에 보부상과 관련된 자료와 유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일제가 보부상 조직을 와해시킨 후 마지막 보부상들이 머문 장소가 봉화가 아니었나싶다. 봉화는 우구치, 상동광산과 가까운 곳이었고, 철암, 장성, 황지에 탄광 붐이 일어 수많은 광산 노동자들이 몰려 들었으며, 이들에게 필요한 생활물자제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이웃에는 강원도 철암, 장성, 황지 쪽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우리 할머니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마땅한 생활의 방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안면간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땅으로 장삿길을 떠났다. 비록 양반이라고 해도 일제말기에는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황금의 땅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등금쟁이들은 쌀, 옹기, 채, 자리, 새우젓 등을 지고 다녔으며 보상들은 비단, 무명, 삼베, 잡화 등을 머리에 이고 박달재를 넘어 다녔다.
울진 십이령고개에 있는 내성행상불망비는 접장 정만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기 위한 철비다. 울진, 삼척, 영월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세워진 성황당은 보부상들과 무관한 곳이 아니다. 고령이나 예산에는 보부상 박물관을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봉화에서도 보부상 길을 정비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첫댓글 매우 훌륭한 생각입니다..^^
북한산 둘레길..제주 올레길..지리산 둘레길 보다 역사와 문화가있는 "봉화 보부상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