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드물게도 이번 작품은 로맨스라죠. 일반 소설 코너에 있지만 테마 중 하나가 사랑과 무관하지 않아요.
크리스마스가 떠오르는 낭만적인 소설입니다. 그래서 트리 사진도 좀 첨부했어요.
도서명: 파이브 피트
저자: 레이첼 리핀코트, 미키 도트리, 도비아스 이아코니스
* 이 작품은 넓은마을 도서관 1번 소설에 1번 일반소설 부분에서 다운이 가능합니다.
* 소개글 서평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 이게 무슨 뜻인가 했다. ‘파이브 피트’라니, cm 체계 거리표에 익숙한 내게는 귀에 영 낯선 표기였다. 덕분에 시간이 좀 지나서야 이것도 거리 표현 단위 방식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5(five)피트인가 하는 점이었다. 소개글에서 이 소설이 이름도 생소한 CF로 통하는 불치병 ‘낭포성 섬유증’과 관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주로 외국인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유전질환으로, 점액이나 액체를 분비하는 모든 샘 조직이 손상되서 비정상적인 진한 분비물을 생산하는 질환이라고 한다. 췌장이나 폐에서 심하게 발생해 반복적으로 폐가 감염되며 후유증으로 각종 폐질환 등이 생기는데, 전 세계적으로 약 7만 명 정도가 이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같은 Cf 환자 사이에 가까이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다. 자칫 감염의 위험성이 있어 서로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안전 거리 6피트(약 180cm)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버젓이 5피트, ‘파이브 피트’로 찍혀 있다. 이 불일치에 호기심이 생겼고 도서를 다운받게 되었다.
‘너’라는 감염, 사랑의 거리 5피트!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면 안 돼. 다른 환자들과 네 안전을 위해서.”
주인공은 스텔라와 윌, 십대 소녀 소년이다. 둘은 똑같이 불치병을 앓고 있지만 CF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꽤나 다르다.
스텔라는 계획을 세우며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잘 웃고, 자기관리에도 철저하고, 유튜브 활동도 하고,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앱을 스스로 개발하는 등 낭포성 섬유증만 아니라면 정말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이다.
그에 반해 윌은 약간 발랑 까진 반항아 기질을 타고 났다. 치료 따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니 합법적으로 자유가 주워지는 18세가 되면 병원을 뛰쳐 나가겠다는 생각을 가진 소년이다. 그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것이, 낭포성 섬유증에다가 ‘B. 세파시아’라는 악성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상태가 더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외국을 다녔어도 병원만을 전전했을 뿐 여행을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자신의 삶, 자유로운 미래를 꿈꾼다. 비록 그 시간이 짧다고 해도 병원에 처박혀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스텔라는 이런 윌을 그저 두고볼 수가 없다. 그녀는 살고 싶고, 또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명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안다. 또 누군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이유로 윌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편 윌은 스텔라에게 끌리는 마음을 인식하고, 그녀를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을 걸어 스텔라의 ‘치료 계획’에 협조하기로 한다. 초콜릿 푸딩으로 약을 먹는 법을 배우고, 병원 체육관에서 같이 운동도 하고, 의료 조끼를 입은 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단, 6피트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이 거리는 둘을 위해서라도 꼭 엄수해야 한다. 자칫 폐의 감염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6피트, 그것은 윌도 그렇지만, 스텔라를 위한 간격이다. 자칫 윌의 B. 세파시아 박테리아가 감염이라도 되는 날에는 폐 이식자 명단에서 탈락하는 건 물론, 그녀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스텔라에게 나는 죽음이다. 스텔라와 함께하지 못하거나, 그 곁에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보다 나쁜 게 하나 있다면, 스텔라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거다. 더욱이 그게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면.”
하지만 6피트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좋아하면 손을 잡고 싶은 게 당연하고, 상대가 힘들어할 때는 그를 안아주고 싶기 마련이다. 최소한 숨소리가 닿는 거리 안에서 그 옆자리를 지켜주고 싶다. 적어도 체온이 느껴질 간격 안에서 내가 네 곁에 있다고 알리고 싶다.
그러나 윌은 그럴 수 없다. 스텔라가 언니의 빈자리로 움츠려 있을 때, 절친 포의 상실로 힘들어할 때, 나름대로 곁을 지키고 위로를 건네지만, 그것은 위생 장갑을 통한 온기였고, 수술용 마스크 너머의 격려였다.
한편 그 점에서는 스텔라도 사정이 같다. 윌의 꿈을 응원하고 싶지만, 엄마와의 갈등을 잘 풀어가라고 다독이고 싶지만, 그것은 눈짓으로 보내는 지지였고, 입으로 전하는 응원일 뿐이다. 6피트, 180cm의 간격을 둔 채. 다가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채. 손을 맞잡기 위해서는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새삼스레 인지한 그 사실에 윌은 스텔라와의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것이 소녀를 위한 길이기에. 그러나 스텔라는 용기를 내서 둘의 간격을 깨뜨릴 결심을 한다. 그녀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이렇게 선언한다.
“다시 말해, 나는 또 우리는 지금껏 CF라는 병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았으니, 제가 그걸 다시 빼앗아 오려고 합니다. 저는 30.48cm를 훔치려고 합니다. 12인치. 거지같은 1피트의 공간, 거리, 길이.”
‘사랑’으로의 전염, 삶을 위한 용기로의 1피트!
나는 책을 읽으며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에게 공감했다. 우선 병원이 지겹다 못해 넌더리가 나는 윌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어릴 적 안과에 가는 게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이대와 고대와 서울대, 병원 리스트만 봐도 라인업이 화려하다. 물론 그 모든 병원들은 내 눈을 낫게 하지 못했다. 어릴 적 시달린 탓인지 병원은 내게 꺼림칙한 공간으로 자리 매김이 되었다.
그런 한편 윌의 어머니의 심정에도 공감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내가 잔존 시력이 있던 시절, 안과에서 작은 망원경 같은 기구를 손에 들고 시력 테스트를 받은 일이 있다. 그 기구를 시력이 있는 왼쪽 눈에 대고 벽에 걸린 판에 있는 글자나 숫자를 읽게 하는 것. 결과적으로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초반에는 뭔가 보이긴 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판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한 걸로 기억한다. “혜령아, 왜 그래....”라고. 한숨과 탄식, 그리고 체념,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간절한 바람.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인, 절박한 애원과도 같았던 부름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잘못한 것 같아 겁이 덜컥 났었다. 엄마가 실망할 것 같았고, 미안했고, 사실 병원에 두고 갈까봐 조금 쫄았다. 엄마는 질책하는 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딸자식의 눈이 조금이라도 더 보이기를 바랐을 뿐. 시각장애인으로 세상 산다는 게 녹녹한 일이 되지 못하니까. 아마 윌의 엄마도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싶은, 좀 더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스텔라의 입장에도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랬지만, 가족들을 위해 강해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결코 선천적인 투사가 아니라 병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린 제약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힘을 내고 발버둥을 쳤을 따름이다. 나도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장애’라는 건 인간을 약간 성숙하게 만드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한계선이 아닐까.
내게도 윌과 스텔라 만큼은 아니지만 ‘시각장애’라는 불가피한 선천적 제안이 걸려 있다. 때문에 이 글의 인물들에게 제법 많은 공감을 일으켰던 것 같다. 물론 시각장애가 몇 년 후에 죽거나 목숨을 위협할 만큼의 장애는 아니다. 하지만 낭포성 섬유증 CF처럼 시각장애로 인해 생활에 제약이 따르는 건 맞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보통의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 복지콜이나 바우처 택시 걱정없이 어딘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학원이든 문화센터든 장소와 강사에 국한없이 원하기만 하면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고 있다. 일반인들이 하면 일상이고 생활의 활력이 되는 일들이, 장애인이 하면 곧장 ‘도전’으로 그 레벨이 올라간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스텔라가 낸 용기의 가치 역시 잘 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말이다. 아니, 차라리 어떤 면에서는 내가 사정이 더 낫다. 최소한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온전한 자신의 삶을 누리고 가꾸기 위해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건 이 작품 ‘파이브 피트’의 주인공들과 동일하다. 딱 1피트, 12인치, 약 30cm의 간격, 그들은 용기를 내어 그 거리만큼 다가서기로 한다. 하지만 윌과 스텔라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한 12인치가 아니었고, 약 30cm의 간격도 아니었고, 또 그저 1피트의 공간 역시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다.
내가 흰지팡이를 들고 슈퍼에 가서 혼자 물건을 고를 때 용기가 필요했듯 그들 또한 그랬다. 시각장애인이 음성신호기가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에 치일 수 있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듯, 그들 또한 그랬다. 삶을 CF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인생을 낭포성 섬유증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나는 ‘장애’로 인해 꿈을 접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오늘의 현실을 보았다.
더불어 머릿속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함께 떠올렸다. 윌은 병원에 갇힌 삶보다 비록 그 시간이 한정적이라 해도 자유로운 삶,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인생을 원했다. 그런 한편 스텔라는 질병이 빼앗았던 자신의 삶을, 그녀의 인생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돌려받기로 결심한다.
우리에게,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차이가 있을 뿐 한정적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일하다. 꼭 시한부나 난치성 질환을 겪는 이들만 해당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막말로 내일 갑자기 사고를 당해 인생 종막을 겪을 수도 있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럼 남은 건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내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사안이다. ‘장애’라는 한계선에 안주할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나름대로 즐기며 살아볼까? 누구에게든 1피트의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럼 나는 그 찰나에 12인치, 혹은 그보다 더 넓은 간격의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런 단상이 이 감상문을 적는 지금 뇌리를 맴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사랑(love)이다. 그러나 내가 연애 세포가 살짝 미달 수준이라 그런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게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과 스텔라의 이야기는 참 보는 맛이 있었다. 책은 스텔라와 윌의 시점이 서로 교차하며 전개되는데, 그 덕에 두 주인공의 감정선이 한층 뚜렷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또 만화나 그림, 풍경이나 상황 묘사가 제법 디테일해서 책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꽤 선명하게 이미지화가 된 것도 좋았다. 내용 전개가 흔히 불치병 연인 스토리의 정석을 보여주는 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석이란 건 언제나 먹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들 저런들 투덜대면서도 내심 정석적인 해피앤딩을 바라기 때문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덧붙여 이 책은 저자가 3명이나 되는데, 알고 보니 미키 도트리와 토비아스 이아코니스가 먼저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했고, 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레이첼 리핀코트가 소설을 풀어냈다고 한다. 영화는 지난 4월에 개봉한 모양인데,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책으로 즐기는 게 더 나은 선택일 것 같다.
전체적인 총평을 요약하자면, 추운 겨울, 누군가와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있는 별 장식물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언젠가 내 삶에서 1피트의 용기가 필요할 때, 스텔라와 윌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