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 노영용, 김명희, 김명숙, 김명덕, 김명주, 장현민, 현지 거주인 홍사택
일 정 : 2003년 1월 19일 ~ 2003년 1월 25일
작성자 : 김 명 주
작성일 : 2003년 1월 29일
참 고 : ‘신명조’체는 김명주가 작성하고 ‘궁서’체는 다른 기록을 참고하였음
일년 전부터 캄보디아에 가기로 ‘김명’ 자매들은 일정액씩을 積立해 왔다. 2003년 1월 초순쯤으로 계획된 여행은 항공편 예약이 어려워 겨우 1월 19일로 날짜가 잡혔다. 항공편을 예약하는 과정에 얼마나 어려움이 있었는가를 이야기하기에는 오덕 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에 생략하기로 한다.
1월 17일 상경하여 큰언니 집에서 하루를 묵은 후 18일 간단한 볼일을 보고 오후에 신길동 명덕언니 집에서 集結하였다. 명숙언니가 아들, 형부와 함께 왔고 명현언니가 기정, 은정을 데리고 왔고, 소주 두병과 맥주 두병을 마시며 자매간의 회포를 풀었다.
2003년 1월 19일(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떡국으로 療飢를 한 다음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명희 언니 內外가 와 계셨고, 나머지 언니들이 티켓팅을 하는 동안 나는 현민이와 함께 병무 신고처에 가서 출국 신고서를 작성하였다. 현민이는 兵役 未畢者이기 때문에 광주에서부터 갖추어야할 서류가 장난이 아니었다.
인천공항은 처음 와보는 곳이다. 말하자면 해외여행은 처음이라는 뜻이다.
오전 10시 50분 타이항공(TG629)으로 좁은 좌석에서 언니들과 담화를 나누며 5-6시간여를 방콕을 향하여 구름 위를 날았다. 홍콩을 경유한 관계로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 홍콩공항의 면세점을 훑어보았다. 명희언니는 아들 정권이 준다고, 명숙언니는 남편 오삼락 형부 준다고 ‘카뮤 XO'를 구입하였다. 홍콩공항에서 45분 쉬었다가 다시 비행기에 오르는데 여승무원이 우리 항공권을 보고 ’김명‘이 4명이나 계속되니 고개를 갸우뚱하여 우리끼리 키들거리고 웃으면서 전부가 아니고 1/2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방콕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갈아타는데 搭乘口를 찾는 과정에서 초조해하면서 헤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짧은 영어와 칼같은 時間觀念, 그리고 無經驗, 당황스러움 등이 복합적인 原因으로 작용하여 땀을 뻘뻘 흘렸다. 그 과정에서 뺀질뺀질한 한국남자를 보았는데 우리 자매들은 그를 ‘인간성 제로’라고 命名하기로 했다.
프놈펜으로 향하는 비행기 역시 타이항공(TG698)으로, 방콕으로 오는 비행기보다 격이 낮아 캄보디아의 위상을 보는 듯 했다. 프놈펜으로 가는 시간은 夕陽 무렵이어서 창을 통해 바라보는 붉은 하늘은 신이 創造한 아름다움이었다. 프놈펜 공항에 도착하여 비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50대 초반의 신사(그는 사업차 캄보디아에 자주 온단다. 그를 우리 자매들은 ‘인간성 입빠이’라고 명명하였다.--참고로 우리 ‘김명’ 자매들의 言語는 우리 영역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理解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도임을 밝힌다.)의 親切한 안내로 쉽게 解決되었다.
1인당 20달러 비자를 내고 가방을 찾는데 애써 준비해온 반찬을 넣은 가방(홍형부가 20년 만에 먹어본다는 갈치 속젓이 들어 있는 가방)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홍형부가 공항까지 나오셨다. 우리는 ‘셀퍼’를 만난 듯 반가웠고, 홍형부가 공항 관계자에게 가방 분실신고를 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프놈펜 시내에 있는 ‘프린세스 호텔’로 향하였다. 호텔 봉고는 우리나라 ‘그레이스’였다.
형부가 예약해 놓은 방 3개에 명희, 명숙, 명주 자매가, 현민이와 노형부가, 명덕언니와 홍형부가 짐을 풀었다. 旅毒을 풀면서 방콕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인천공항의 여직원에 대하여 침을 튀기며 성토를 했다.(결국 우리의 무경험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判明되긴 했지만)
현민이는 프놈펜 시내를 구경한다고 나갔는데 무질서 투성인 곳에서 무슨 일이라고 당할까 염려스러웠지만 이내 들어온 것을 보고 안심했다.
2003년 1월 20일(월요일)
6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마련된 식사를 하고 역시 ‘그레이스’ 봉고를 타고 시엔립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船着場으로 갔다. 모든 經費의 계산이나 記錄은 은행누나인 명희언니와 노형부께서 하셨는데(명희언니 내외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퇴직한 분들이어서 대단한 숫자 감각이었는데 원주율의 소숫점 이하 10자리, 모든 歷史的인 사건의 년도 등을 거뜬하게 외우고 계셨다.)
하룻밤 방 3개에서 자고 아침 식사하는데 450 달러 정도 소요되었다니 무척 비싼 편이었다.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프놈펜의 市場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60년대 수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버린 옷을 이곳으로 보내는지 우리 글이 새겨진 옷 또는 가방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 놀라고 感歎해 마지않는 것은 그들의 交通秩序였다. 車線은 두말할 것 없고 심지어는 중앙선의 槪念도 없었고 신호등은 거의 없어 사거리에서는 아찔아찔했으나 그들은 대단히 여유롭게 그들 나름대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1인당 25달러인 시엔립까지 가는 7시 30분 배를 탔다. 東洋 最大의 호수라는 ‘톤렌샵’ 호수(乾期에는 서울의 5배 크기라고 한다.)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바다와 같았다. 배안에서는 에어컨이 세게 작동해서 너무 추웠다. 노형부께서 船長에게 부탁을 했으나 에어컨을 조절할 줄 모를 뿐 아니라 作動하는 것 자체가 고장이 나서 추운 곳에서 5시간을 떨 수밖에 없었다. 간혹 水平線 너머로 보이는 구름, 배가 물을 가르고 가면서 일으키는 물거품이 햇빛의 굴절작용으로 인하여 무지개빛을 연출하였고, 한가롭고 신비한 숲, 숲 아래에 그림같이 지어져 있는 그들의 집, 더위 때문에 地上에서 높게 지어진 집에 그네를 여유롭게 흔들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상적인 水上家屋 등이 우리네 풍물과는 다른 정취를 느끼게 했다. 시엔립 선착장 부근의 수상가옥은 그들의 生活水準을 엿볼 수 있었다. 食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 흙탕물에서 해결된다니 소름이 돋았다. 우리나라 60년대 말 지붕마다 자랑스럽게 솟아있던 잠자리 같은 TV안테나가 여기에도 우뚝 솟아있다. 水上學校도 있었고 거기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는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5시간을 배에서 시달리며 시엔립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려는데 이상야릇한 냄새에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서양사람들과 시커먼스들에게서 나는 야릇한 냄새인 줄 알고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졌지만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선착장의 오염된 물 때문이었다. 명희언니와 명숙언니는 ‘해치캉’이리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명덕언니와 나는 모르는 單語였고 우리는 ‘시궁창’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아마 宿所를 안내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일단 봉고를 계약하였다. 앙코르 왓에 가까운 호텔까지 가는데 1인당 1달러였다.
韓國人이 運營하는 ‘지구촌 식당’에서 김치찌개, 돼지갈비, 김치볶은밥 등을 먹고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모리나(Molina) 호텔의 하나에 10달러씩 하는 방 3개를 구했다. 프놈펜의 ‘프린세스’ 호텔과 거의 비슷한 수준인 것에 비하면 무척 싼 편이었다. 旅裝을 풀고 좀 쉰 다음 이곳 市場을 구경하자는 의견에 모두들 찬성하였다. 시장까지 가는 길은 서민들의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탔다. 외국여행에서 그 나라의 過去를 보려면 博物館을 未來를 보려면 圖書館을 現在를 보려면 市場을 구경하라는 말이 있다. 이곳 시장은 정말 오랜 內戰으로 시달려온 캄보디아인들의 찌들린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기념이 되는 간단한 선물들을 몇 개 사는 과정에서 끈질지게 따라다니는 팔, 다리 없는 거지들(內戰 때 설치해 놓은 지뢰의 피해로), 아기를 업고 구걸하는 어린이들..... 우리는 그들에게 잔돈을 주어야 했다. 팔다리 잘려나간 장애인들을 보니 어릴 적 운동회 같은 특별한 날 손목에 쇠갈구리를 내보이며 겁을 주었던 傷痍軍人들이 생각났다. 사실은 그들을 무서워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긴 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歷史의 被害者로 보호를 받아야 하거늘. 현민에게 이곳 아이들을 보고 현재의 삶에 불만을 가지지 않은 것도 큰 敎訓이 되겠다 했더니 黙言으로 同調한 듯했다.
사탕수수 물도 맛이 괜찮았다. 현민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파리가 드글드글하다는 이유로 시원한 사탕수수 물을 먹지 않았다. 먹을 것을 약간 사들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모두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오토바이보다는 차라리 걸어가겠다고 나섰다. 무릎이 아프다는 명숙언니와 안내자격인 홍형부는 오토바이보다는 한 단계 위인 人力車를 타고 가는데 남지나해의 南風과 야자수와 잘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의 生活相을 낱낱이 볼 수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는 꾀죄죄한 학생들, 하교하는 학생들의 가벼운 모습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紅燈街에서 요란한 화장과 가슴팍을 거의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夜花들, 주택가로 와서는 우는 아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젊은 엄마, 몇몇의 친구들과 모여 談笑를 나누고 있는 靑年들, 그들 중 한 청년이 ‘한국어’라고 써진 책을 가지고 있기에 짧은 영어로 한국어 선생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한다. 열심히 하라는 격려인사로 作別하였고, 그들 군중 속에 소들이 여유자적하게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길에 익숙하지 않아 잃을 뻔했지만 그런대로 큰 고생 안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2003년 1월 21일(화요일)
6시 30분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호텔에서 마련한 식사를 하는데 南國 사람들의 음식에는 하나같이 야릇한 香料가 섞여 나와 숙언니는 한 숟갈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호텔의 안내로 예약한 봉고가 8시까지 왔다. 하루 빌리는데 35달러였다. 봉고는 日製 ‘토요타’로 아주 새것이었다. 차 윗부분이 선루프 장치가 되어 있어 푸른 하늘과 나무들이 싱그럽게 보였다. 숲을 지나는 부분에서는 옛날 남원의 정화극장에서 보았다는(나는 전혀 기억에 없다) ‘딸 칠형제’라는 영화를 기억하면서 주제곡(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로 자전거 타고 달리는 어쩌고 저쩌고....)을 부르기도 했다.
1인당 20달러씩 하는 티켓을 사서 드디어 앙코르(‘도읍’이라는 뜻)에 入城하였다. 앙코르 왓을 둘러싼 맑고 큰 호수. 그곳은 마치 커다란 거울을 펼쳐 놓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모든 지상의 것이 대칭 그대로 물 속에 비치고 있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앙코르 톰
해자와 함께 다리 양쪽에 각각 24성인, 24악인이 있는 곳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곳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고 해자(호수)를 천천히 건넜다. 일정한 크기의 돌에 문양을 새겨 마치 모자이크하듯 맞추어 놓은 不可思議한 조각에 感歎을 금치 못했다.
앙코르 톰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는 유일한 불교건축이다. 바이욘에 있는 200여 개의 얼굴은 부처의 얼굴이기도 하고,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기도 하고 크메르족의 미소라고도 전해진다.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인 앙코르 톰은 '커다란 도시'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큰 성곽도시(가로 세로가 3 Km)이다. 이곳에는 왕궁은 물론, 종교 건물과 관청 건물도 있었던 앙코르 제국의 중심지였다. 앙코르 톰은 동일한 시기에 존재한 유럽의 어떠한 도시보다도 큰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는데 거의 100만에 이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웅장하고 위대한 건축을 이루었던 앙코르 제국도 15세기에 갑자기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몇 차례 앙코르 제국의 위업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캄보디아에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앙코르 톰은 각 변이 약 3km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라테라이트로 쌓은 성벽의 높이는 약 8m, 내부 넓이는 145.8ha(약 44만 2천 평)에 달한다. 성벽의 바깥에는 폭 100m의 수로를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했으며, 정 사방에 있는 출입구와 이어지는 네 길은 바욘과 만나지만, 승리의 문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동쪽 출입구가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이 왕 테라스로 이어지는 긴 회랑과 만나도록 되어 있다. 사람의 얼굴을 사방에 새긴 높은 고푸라(성 입구에 세우는 커다란 탑이나 구조물)가 외곽을 사방으로 둘러싼 성벽들의 중앙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쁘라삿쯔롱이라고 부르는 작은 사원이 이 성벽의 코너마다 세워져 있다.
앙코르 톰 남문을 통해 숲이 무성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욘 사원이 나오고 근처에 바푸온 사원, 왕궁, 코끼리 테라스, 피미아나까스 등 의 유적지가 있다. 앙코르 톰의 거대한 성벽과 그 안의 중심사원인 바욘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안의 다른 유적지들은 그 전에 이미 만들어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간 곳이 따프롬
12세기 중반-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들어진 寺院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조각에는 나무와 풀잎들이 엉키어 있었고, 피부병을 앓는 듯한 개가 모래바닥에 온몸을 뒹굴면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긴 숲터널을 걸어 들어가는데 길 한켠에서 다리가 잘려나간 장애인들이 우리가 한국인임을 感知하였는지 그들의 고유 악기로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그들에게도 달러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원은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나간다. 아침에 오는 것이 정글의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사원 이름은 '브라흐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아버지를 위해 쁘리아 칸을 지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따 프롬은 통행로만 만들어 놓은 것을 빼고는 전혀 복구를 하지 않은 사원이다.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방문객들은 사원을 처음 탐험한 사람들의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여지도 많이 있다. 이 사원을 소개하는 책자나 안내서들에는 이곳을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어떤 곳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정말로 열대 무화과나무들과 가지로부터 뿌리가 내려와 땅에 박힌 보리수나무 등이 어떻게 사원을 덮을 수 있었고, 이 나무들이 무너지면 사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자연의 생명력 앞에 무력해지는 인간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白人畵家 한 사람이 거대한 문어가 빨판 달린 긴발을 늘어뜨려 사원을 움켜쥐고 있는 것같은 모습, 자연과 건축물이 調和를 이룬 모습을 精巧하게 그리고 있었다. 보고 느낀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表現하는 재주를 가진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새삼 느꼈다.
따 프롬에서 현민이는 그들의 고유악기(10달러)를 하나 샀다. 우리나라의 해금과 비슷하다고 하여 우리는 그냥 ‘해금’이라고 명명하였다. 숙언니는 뱀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북(10달러)을 구입했는데 장구를 배운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런 대로 가락을 맞추어 演奏하였다. 망고라는 과일의 시원한 물을 사서 마시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은 비교적 한가하고 여유로웠는데 9명의 동서들 중에 누가 가장 잘생겼나,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不倫, 등의 시시껄렁한 유머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은 대충 11시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한곳을 더 보자는 의견이 있어 간 곳이 반따이 끄데이
매우 한가하고 고즈넉한 곳으로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에 지어진 사원
이 건축물에서는 바욘 스타일과 앙코르 왓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자야바르만 7세 때 이 건물은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질이 떨어지는 부서지기 쉬운 사암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은 탓에 지금은 많이 무너져 그 성격을 정확하게 추정하기가 어렵다. 改築과 補修가 지어진 이후로 몇 차례 있었던 것 같으며, 그로 인하여 건물의 의미를 추정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 건축물에 관한 碑文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데, 그 구조는 따 쁘롬과 비슷하지만, 덜 무너졌고 또 덜 복잡하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위험한 야생 사슴이 살게되어 사람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동쪽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앞에 커다란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곳은 춤추는 소녀들의 홀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테라스에 조각된 춤추는 압싸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이 테라스의 북쪽에는 기둥들이 보이는데, 이 기둥들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집의 기둥의 잔해라고 한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중앙 탑과 회랑들이 있는데, 많이 무너져서 구분이 힘들다.
긴 회랑과 문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 15도 각도로 서서 찍는데 일렬로 서다 보니 어깨들에 가려 길게 보이는 회랑과 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민이의 말투가 웃겨 또 한바탕 폭소...
반따이 끄데이에서 나와 점심을 먹기고 했는데 성밖으로 나가 먹다보면 시간낭비가 심하다 하여 성내에서 대충 때우기로 했다.
점심을 먹기로 자리잡은 상가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쓰라쓰랑
10세기 중엽 라젠드라바르만 왕때 처음 지어졌고, 11세기말, 혹은 12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재건축하였다. 왕족의 목욕탕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700■300m의 웅장한 넓이의 호수이다. 반띠아이 끄데이의 동쪽 입구 맞은 편에 있다.
점심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앙코르 왓이 새겨진 티셔츠를 파는 아이들의 맑고 티없는 웃음, 始終一貫 외국인에 대한 好奇心과 장난기 섞인 말로 접근해 오는 13-4세 정도의 여자아이가 귀엽기 짝이 없다. 먹던 비스켓을 나누어주니 벌떼 달려들 듯 주변의 어린아이들이 줄을 섰다.
여기서도 역시 향료 때문에 먹지 못하기는 매한가지. 특히 명숙언니가 심하고 나도 거의 같은 수준 (穀氣를 끊었다고 하여 또 한바탕 웃음)
점심을 먹고 난 후 한참을 쉰 다음 메인 사원인 앙코르 왓으로 향하였다.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호수를 건너는 긴 다리(해자)를 건너야 했고 이곳 역시 나가신(머리 7개 달린 뱀)이 곳곳에서 지키고 있었다. 중앙 사원으로 가기 전에 다리의 양쪽에 대칭으로 똑같은 건물이 있는데 도서관으로 쓰였거나 아니면 천체관측소로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단다. 도서관으로 추측되는 건물 뒤쪽의 잔디밭에는 짝을 잃은 듯한 말 한 마리가 ‘히이잉’거리며 뛰어 다니는 바람에 약간 두렵기도 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 한국어를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으며, 마침 패키지로 여행온 사람들 속에 끼어 안내자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앙코르왓은 수르야바르만2세가 힌두신 비쉬누에게 바친 사원으로 37년간 지어졌다.
사원 안의 조각, 부조, 설계, 균형등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는 앙코르왓은 앙코르의 많은 유적지 중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앙코르왓은 우주의 축소판을 상징하는 석조 건축물이다. 중앙탑은 사원의 정중앙에 세워져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며 5개의 탑은 메루산의 5개의 큰 봉우리를 나타내고, 성벽은 세상 끝을 둘러 싼 산맥, 사원을 둘러싼 호수(해자)는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사원의 3층 중앙탑은 천상계를 상징하고, 2층은 인간계, 1층은 미물계.
1층의 부조 회랑에는 섬세하고 뚜렷한 많은 양각이 새겨져 있다. 부조 조각의 주제는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인도의 전설과 경전, 앙코르시대의 전승기록. 또 주제와 관련시켜 동쪽 벽엔 해뜨는 곳이라 탄생, 서쪽은 해지는 곳이라 죽음에 관한 주제를 표현한 것 등이다.
가장 유명한 '우유의 바다에서 휘젓기'는 악마와 신이 불로장생의 묘약을 추출하기 위해 우유의 바다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압사라(춤추는 여신)들이 춤추는 모습이 살아 있는 듯.
남쪽회랑으로 접어드니 지옥도가 나타난다. 인간에 대한 염라대왕의 심판이 3단계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명도 2단계에 걸쳐 조각되어 있다. 사신들에게 끌려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스러운 얼굴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고, 지옥에서 갖은 벌을 받고,고통스러워 하는 모습들이 조각되어 있다.
동서남북의 회랑에 새겨진 부조만 제대로 감상하려도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회랑감상을 끝내고 2층으로 오르면 벽면에 아름다운 춤추는 선녀 압사라의 부조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것들은 하나도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이 없다.
3층으로 오르려면 경사도 70-80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 오르면 앙코르왓 건축구조의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대차기로 유명한 명덕언니가 먼저 오르고 노형부가 다음, 그리고 나와 현민이가 오른다. 노형부는 위에 올라서 명희언니에게 위험하니 올라오지 말라고 하시지만 명희언니와 숙언니도 이내 올라오고 만다. 위에서 내려가는 것은 정말 아찔할 정도이고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것 같다.
동서남북 네 개의 방에 지성소가 있고, 그곳에는 갖가지 자세들의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앙코르 왓은 힌두교사원이지만 15세기이후 불교화되면서 비쉬누신상 대신 불상으로 교체된 듯하다.
회랑을 돌면서 벽화에 대해 설명하던 안내자가 앙코르 왓의 3대 신이 어떤 어떤 신이냐는 질문에 여행객 한 사람이 ‘베드신’이라고 답해서 일행은 또 한번 爆笑를 떠뜨렸다.(비쉬누신, 가루다신, 시바신)
몇몇의 한국인 아줌마들이 천원짜리 지폐를 놓고 중앙의 부처상에게 合掌을 하기에 나도 그렇게 하면서 靈驗하다면 우리 현민이 持病 좀 가져가 버리라고 祈願하였다. 현민에게도 너도 부처님께 건강을 祈願하면서 합장을 하라고 했더니 군소리 없이 행한다.
앙코르 왓의 중앙 사원을 비롯한 모든 내부공간을 다 돌다 보니 너무 피곤하고 다리가 아파 패키지 여행객들과 헤어져 사원의 가장 왼쪽이고 남쪽 회랑 끝 방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쉬기로 했다. 쉬면서 노형부의 손녀딸(수빈)에 대한 자랑이 있었고 홍형부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 ‘있시 상게’ 등의 여유로운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참고로 손자손녀의 자랑에 대한 벌금은 내지 않았음을 밝힌다. 우리가 쉰 곳은 중앙탑을 기준으로 해서 네 개의 탑 중에서 왼쪽의 남쪽에 있는 탑에 해당하는 곳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공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유심히 보았더니 박쥐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돌침대(돌바닥)에 잠시 누워 탑의 꼭대기를 통해 보이는 하늘조각을 보면서 길게 누운 네로 황제의 행복함이 이와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 긴 회랑을 타고 왼쪽의 북쪽 탑쪽으로 가서 처음에 올랐던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중앙탑 아래를 맨발로 지나면서 크메르인들의 숨결을 피부로 느꼈다.
맨 아래층으로 내려와 정문으로 통하지 않고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 문으로 나와 잔디밭을 걸었고 밖에서 바깥쪽 회랑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랐다.
나는 이 어머어마한 앙코르 유적지를 보면서 어릴적 보았던 율부린너(빡빡이 배우)가 나오는 ‘왕과 나’라는 영화에서 신전(궁전)을 짓기 위해 노상 백성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던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유적이 있기까지에는 백성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으랴!
성밖으로 나가는 길에서 ‘김명’ 자매 일행은 뱀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북을 사들고 몹시 滿足해 하시는 노형부의 長短에 맞추어 ‘대한민국 짜라짜 짝짝’을 연거푸 외쳐봄으로써 우리 일당이 한국인임을 알렸다. 몇몇의 젊은 청년들이 익숙한 장단이었는지 함께 동조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월드컵의 영향이 컸음을 실감했다.
오후 네시에 토요타 봉고 기사를 만나 캄보디아 내전 당시의 유골을 진열해 놓은 킬링필드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던 ‘왓트마이’라는 곳을 갔다. 수많은 유골을 쌓아 놓았고 거기에는 학교도 있었는데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선생과도 간단한 談話를 나누기도 했다.
다음으로 日沒을 볼 수 있다는 프롬 바켕으로 향했다.
일몰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짧은 시간에 볼 수 있는 곳을 하나만 더 가자고 했으나 현지안내인(봉고기사)은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못알아들었는지 바로 프롬바켕에 우리를 내려놓고 만다.
프롬바켕은 67m 언덕에 있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15달러씩 받고 코끼리 등에 타고 올라가는 商術을 부리기도 했다.
앙코르 왓 북쪽 1,300m / 앙코르톰 남쪽 400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67m 높이의 언덕 위에 위치한 사원이다. 동쪽편의 언덕으로 오른다(계단이 일부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 왓의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똔레쌉 호수 옆에 있는 프놈 끄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복의 북동 방향, 프놈 꿀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석양이 질 무렵의 모습이 아름다워 저녁나절에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이곳은 시바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니 프롬바켕은 세계의 인종시장이 된 듯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모인다. 모든 여행객들은 하루의 여정을 이 일몰을 보는 것으로 마치나 보다. 멀리 서쪽으로 보이는 인공호수 서바라이(West Baray), 그 호수로 떨어지는 산호 빛의 환상적인 해, 몸을 약간 북쪽으로 돌려보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정글, 그 정글 속에 이 앙코르 유적이 몇 백년 동안 숨겨져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서쪽 하늘에는 열기구가 유유히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열기구를 타고 캄보디아 곳곳을 감상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어두워지면 여기까지 올라온 가파른 계단을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가기가 어렵다는 홍형부의 말씀에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내려왔다.
명숙언니와 명주, 현민이는 해외여행이 처음이어서 比較分析할 수는 없지만 일본, 사이판, 캐나다, 미국 등을 여행한 명희언니와 유럽일대를 여행하고 이탈리아의 유적을 침이 마르도록 讚揚한 명덕언니는 앙코르 왓을 다시 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어마어마한 앙코르 유적지를 시간관계로 하루에 마쳐야한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의 숙소 모리나 호텔로 돌아왔다.
2003년 1월 22일(수요일)
다시 프놈펜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해치캉’의 선착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홍형부의 휴대폰 행방이 묘연해서 잠시 술렁이긴 했지만 이내 봉고의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곳에 오던 날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이곳의 새벽장이 열리고 있어 한결 활기차 보였고 人波로 인해 ‘해치캉’의 냄새나 모습은 감춰진 듯 하다. 後進國일수록 시간관념이나 좌석표의 지정된 자리 등이 불분명해서 우리는 좌석 때문에 고생 좀 해야했고, 출발하는 시간도 定時보다 40분이나 늦었다. 5시간을 배를 타고 톤렙샵 호수를 달려 프놈펜 선착장에 도착하니 ‘프린세스’ 호텔의 봉고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캄보디아에 오던 날 잃어버렸다던 반찬가방을 ‘프린세스’ 호텔 주인이 찾아다 놓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우리 입맛에 맞는 젓갈, 김치, 된장국, 깻잎 등으로 포식한 다음 프놈펜 시내에 있는 곳곳을 구경하였다.
봉고를 2박 3일동안 대절(120달러)해서 먼저 간곳이 '뚜올슬랭(Tuol Sleng) 학살 박물관' 독일의 히틀러 나찌 정권 못지 않게 인간의 尊嚴性을 말살하고, 동족(同族)에 대한 살육을 저지른 장소이며, 1975년 이전까지는 증등학교 건물이었으나, 폴포르 정권시기에 보호감옥소 "S-21"로 바뀌면서 많은 良民을 理念의 명분하에 고문하고 학살했던 곳이다. 폴포트 정권이 캄보디아를 공산화하기 위하여 불순분자들의 처형장소로 삼았다는 학교 건물. 쿠메르루즈군은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자마자 즉시 남녀노소할 것 없이 도시 주민들을 모두 시골로 추방했다. 그 결과 1975년 4월에서 77년 1월 사이에 잇단 기근과 질병, 학살, 처형 등으로 적어도 200만명(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4)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도 추정에 불과할 뿐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단다. 폴포트는 중국을 뒤로하고 캄보디아를 공산화하기 위하여 지식인, 조금이라도 서구의 냄새(프랑스의 식민지였으므로 프랑스 냄새가 있었을 것)가 나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였다 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고문 기구, 정치범들의 한 평도 못되는 독방, 그때 희생된 넋을 잃은 듯한 사람들의 사진(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10세 안팎 소녀의 큰 눈망울은 잊을 수 없다.), 캄보디아 외무부 장관 부인이었다는 여자가 아기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옆에 같은 인물(외무부장관 부인)이 사진 찍는 의자가 앉았는데 그 의자의 뒷부분에는 쇠 송곳 있어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젖먹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놓는 장면, 여성들의 젖꼭지를 잘라내고 그곳에 전갈을 집어넣는 장면, 손톱을 빼는 장면, 물고문하는 장면, 삐쩍 마른 사람을 당나귀 묶어가 듯 하는 장면,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어린아이를 공중에 던져 쇠창으로 꿰뚫는 장면을 보고 급기야 토악질이 날 것 같아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런 일이 1975년에서 1979년의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나’하는 의구심이 생겼고, 머리 속에 시종일관 광주사태가 생각났다. 관람료는 1인당 2달러.
다음으로 간 곳이 캄보디아의 국왕이 사는 곳(Ministry of the Royal Palace)
관람료는 1인당 3달러로 국왕이 사는 곳답게 카메라 所持를 금지하고 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잔디밭, 실버불탑, 궁전, 바닥의 타일과 같은 문양으로 짜여진 5m■20m(추정)정도로 큰 양탄자, 儀典 때 입던 衣服, 등 '王宮'은 1866년 노도롬 왕에 의해 건축된 톤레삽 강을 바라볼 수 있게 건축된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다. '실버 파고다'는 불상을 모신 사원의 바닥이 실버타일로 만들어졌고, 사막 전체를 둘러싼 캘러리와 사원내부, 사원주변의 탑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다. '코끼리 실'은 1892년 건립했고, 최근 현재의 왕비인 노니니스의 근위병들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노도롬 왕 시절의 코끼리 군단의 각종장비와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왕족 중 누군가가 그림에 관심(재주)이 많은지 그림을 많이 전시해 놓고 있었다.
나는 이 왕궁을 구경하면서 폴포트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시하누크 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서 최규하 대통령의 무기력한 모습이 클로즈업된 것도 사실이다.
국립박물관을 보기로 했으나 형부의 농장을 가려면 어두워져 교통상 문제가 있다 하여 생략하기로 하고 홍형부의 농장으로 향했다. 프놈펜으로부터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도중에 재래 시장에 들러 상추, 바나나 등의 과일을 샀다. 봉고의 성능은 너무나 낡고 저질이어서 마치 비포장 도로를 털털거리고 달리는 듯 했다. 가는 도중 홍형부와 함께 하는 분(장회장님, 신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는 길에 두 집에 축의금을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나름대로 파티를 자주 하는데 한국인이 참석해 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한다. 한집에서는 캄보디아의 盛裝을 한 안주인과 남편이 직접 봉고 있는 곳까지 와서 이곳 도지사도 와 있으니 우리 일행에게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가라고 성화이나 말도 통하지 않고 갈길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홍형부 농장으로 가는 도중에 한국의 CJ(신세계 제일제당)에서 운영하는 농장이라는 곳도 보았다. 그런 대로 한국인이 많이 진출하고 있는 모양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땅덩이, 톤렌샵 호수에서 보았던 수평선, 이곳에서는 지평선이 끝이 없다. 캄보디아는 국토의 크기가 우리나라 남북한의 0.8배, 남한의 2배정도 된다는데 우리나라는 국토의 75 %가 山岳인데 이곳은 75 %가 들이란다. 물론 아직도 정글로 덮여 있는 곳이 많긴 많지만 말이다. 홍형부 농장이 가까워지니 거대한 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산을 따라 올라가면 태국까지 이어진단다.
그렇게 2시간 여를 달려 형부 농장의 입구에 당도하였다. 캄보디아 文字로 써진 간판을 나는 멋지게 읽어 내렸다. ‘한국인 홍사택의 농장’이라고. 사실은 곧 멋지게 ‘아리랑 농장’이라고 명명하여 간판은 붙일 예정이란다.
농장에 도착하니 그림같이 지어진 형부의 집과 장회장님, 신장로님의 집이 보였고 관리인, 가정부 등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식구들대로 준비해온 반찬으로 성대한 저녁을 먹고(여행을 하면서 오히려 몸무게가 늘 정도이다.) 테라스에 놓여 있는 멋진 등나무 의자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이렇게 밝고 많은 별을 보기는 참 오랫만이다. 물론 나는 어릴 적 가끔씩은 보았지만 현민이는 이렇게 많은 별은 처음이란다. 저쪽으로 보이는 장회장님 댁에서는 장회장님과 신장로님이 앉아서 談笑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가시나무새’라는 TV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2003년 1월 23일(목요일)
6시 30분에 일어나 형부집의 앞마당을 둘러보았다. 형부가 심었다는 이곳의 나무, 나무들 사이에 심은 고추나무. 그러나 형부는 서울토박이로 농사에는 손톱만큼의 경험도 없어 어려움이 많은 듯 했다. 그러는 사이 가정부 아주머니는 식사를 준비하였고 이곳에 고용된 어린 소녀가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장회장님과 신장로님을 아침 식사에 초대했으나 장회장님은 어제 피곤했던지 늦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고 不參하였다. 아침을 먹으며 신장로님의 한국 정치계에 대한 궁금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퍽이나 溫和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化粧을 하는 사이 가정부 아주머니는 우리 옆에 앉아 화장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홍형부 사모님께서 미리 준비한 립스틱과 화장품 이것저것을 건네 주면서 방법을 알려주고 입술을 빨갛게 칠해 주었더니 얼굴을 감추며 수줍어하는 모습이 善良하기 그지없다.
형부 농장을 걸어서 구경하였다. 넓고 넓은 땅, 거기에 심어진 열대 과일나무, 바나나, 豚舍, 원두막 등이 겉으로 보면 아름답고 낭만적인 듯 하나 홍형부 사모께서는 막막하나 보다. 들어간 돈도 많을 것인데 아무쪼록 하시는 사업이 순조롭게 잘 운영되기를 마음 속 깊이 祈願해본다. 우리가 農場을 구경하기 위해 걷고 있는데 장총을 든 젊은 군인이 警護를 하고 있었다. 웬일이냐고 했더니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인지라 군인들이 사설 경호원 노릇을 해도 국가에서 黙認해준다고 한다. 사설 경호 댓가로 받은 돈의 절반은 국가에 반납한다고 하니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을 알 듯도 하다.
농장에서 명덕언니는 홍형부와 사진을 여러 장 박았다. 서울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아들이 운영하는 농장을 보여준다는 깊은 뜻이 있단다.
오늘은 이곳 농장에 또 다른 귀한 손님이 와 계셨다. 의료봉사는 하러 왔다는 한의사 두 분이다. 우리는 그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형부의 농장에서 다시 3시간 정도를 남으로 남으로 달려(봉고의 성능상 시속 60Km였음을 밝힌다.) 시하누크빌이라는 휴양지에 도착하였다. 프놈펜에서 서남쪽으로 2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수심이 깊은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다. 곱고 하얀 백사장과 푸른 코코넛 나무의 그늘이 넓게 펼쳐진 해안과 다양한 섬들이 있는 시아누크빌은 따뜻한 해수로 인해 1년 내내 해수욕이 가능하고, 요트, 스노클링, 스쿠바다이빙 등의 해양스포츠 애호가들에게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항구는 1960년에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건설되었다.
에머랄드나 혹은 비취빛의 환상적인 바다와 야자수 사이로 부는 훈훈한 바람(우리가 여행할 때는 乾期로 아주 덥지는 않은 기후였음),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고급 중국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형부와 홍형부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시고 老益壯을 과시하셨다.(혹시 노형부는 노익장이라는 용어가 거북하신 것은 아닌지). 현민이는 모래성을 애써 만들었으나 이내 파도가 휩쓸고 가버렸다.
신장로님이 소개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방을 정하였다. 방 하나에 15달러. 우리는 상당히 호화로운 여행을 즐기고 있다. 왜냐하면 일행의 모두가 50대가 넘었고 나는 40대 후반, 현민이만 21살이다 보니 쉴 수 있는 공간은 최대한 편안해야 하기 때문이지 않나 하는 나의 생각이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매우 만족스러울 정도로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몸을 좀 쉬고 오후에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오덕(五德)’과 관계되는 퀴즈로 또 한바탕 웃었다. 해변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현지인들이 찐게와 불에 구운 꼴뚜기, 산호 등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다. 저녁나절의 밤바다에서 묻어 나온 바람은 形言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밥을 해달라고 해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우리나라의 신선로와 비슷한 용기에 새우와 게를 넣어 만든 찌개는 남국의 야릇한 향이 배어 있었다.
밤이 되면서 바다의 흔적은 없어지고 파도소리만 귓전에 맴돈다. 해변의 비치 침대에 누워 쉬니 모두들 닷새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2003년 1월 24일(금요일)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프놈펜으로 가는 일만 남았으니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었다. 호텔의 체크아웃을 하는 시간까지 한 방에 모여 홍형부의 사업구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아무쪼록 모든 일이 순조롭게 술술 풀려나가기만 바랬다.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閑談은 나누면서 행복해 하였다. 이곳에서는 은행출신인 노형부의 숫자감각이 가히 상상을 超越한 것이라는 것이 입증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여정의 마지막을 시하누크빌로 정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가를 찬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 시하누크빌의 아름다운 海邊에서 일제시대에 정신대로 끌려가 어딘지도 모른 곳에서 머나먼 고국을 그리워했을 우리 옛여성들의 아픔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다녀간 ‘훈’ 할머니 생각이 떠올라서인가? 훈할머니는 그후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오후 1시경에 시하누크빌을 출발하였다. 온 길을 다시 거슬러 프놈펜으로 향하는데 올 때와는 다르게 봉고의 성능이 아주 기가 막혔다. 홍형부와 헤어지는 시간이 가까워오니 명숙언니의 제의로 홍형부와 덕언니가 스킨쉽(명숙언니는 우리 자매의 용어로 ‘찌댄다’는 말을 사용하였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해서 봉고를 세우고 자리바꿈을 하기도 했다. 앞자리의 세 자매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며, 뒷자리의 현민이는 자는 척을 하는 능청을 떨기도 했다. 홍형부 농장을 거쳐 조금 더 가니 버스 휴게소 같은 곳이 나왔다. 형부가 다시 농장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홍형부와는 그냥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모두들 격려 반, 위로 반으로 作別인사를 했고, 명덕언니는 워낙 대차니 남편과 작별을 하면서도 eye water(눈물, 나중에 태홍이는 snow water이라고 표현)을 흘리지 않는다는 명숙언니의 말에 한바탕 웃으면서 우리 ‘김명’ 자매식의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면서 拍掌大笑를 했다.
또한 딸 아홉을 낳을 때마다의 부모님 심정을 그럴 듯 하게 나타낸 말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그럴 듯 했다. 足一(첫딸에 만족), 惑二(딸 둘은 혹시 그럴 수 있다.), 過三(딸 셋은 지나치다), 甚四(딸 넷은 심하다), 五忿(딸 다섯을 낳고 보니 분하고 원통하다), 六怒(딸 여섯을 낳고 나니 화가 난다), 七驚(딸 일곱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八嘆(여덟째 딸이라나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九笑虛虛(너무나 허무해 웃음이 나온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일곱째인 나(명주)를 낳고는 ‘驚’을 외치셨겠구나...
공항에 도착하여 여러 수속을 밟는 동안 ‘프린세스’ 호텔의 사장님 내외를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2003년 1월 25일(토요일)
방콕을 거쳐 인천공항에는 아침 7시에 도착하였다. 큰언니네 집으로 가서 늘어지게 한숨을 자고 ‘김명’ 자매들의 파티가 막내 주최로 있었다. 막내 말에 의하면 돈을 벌 기회가 너무 많아 여행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돈을 주체할 수 없단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고, 막내의 막춤과 원맨쇼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파티의 의미는 거창했다. 동명이과 준선이의 제대기념, 현민이의 入城, 태홍과 명희언니의 생일, 캄보디아 여행단의 귀국 등등 이름 붙이기 나름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많은 자매들 중 직장, 건강의 이유로 일부만 참여했다는 점이고, 앞으로 이런 기회가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음에는 터어키와 그리스로 갔으면 하는 희망사항도 나왔다.
♠ ♠ ♠ 사진이 나오면 스캐너 작업을 하면 더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좀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수정하고 보완하려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