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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인 7 - 한반도의 적국인 당나라에서 활약한 여러 반역자들!
1. 돌지계와 이근행
고구려는 고구려인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고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함께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
이며 고구려 기병은 주로 말갈인인데.......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
守之䇿 32년(590년) 에 평원왕이 진(陳) 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
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며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평원왕은 중국 통일 이전에 수나라에 3년간 무려 7차례나 조공 사절을 보내는등 공을 들이다가..... 끝내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두려워 밤잠을 못자는 중에도 수나라 무기 기술자를 빼내오는 등 애를 씁니다.
수나라가 등장하니 거란의 출복부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 (內附) 한 데다가 속말
말갈의 일부 무리가 고구려를 배신하고 수나라에 합류하니... 이때 추장인 돌지계 (突地稽)
의 아들이 고구려 - 당 전쟁과 나당전쟁 때 맹활약을 하는 당군의 지휘관 이근행 (李謹行) 입니다.
평원왕 사후 영양왕은 수나라 침공이 임박했다고 여겨 선제 공격에 나서니 598년 말갈 기병 1만
이 요하를 건너 요서 (遼西) 임유관을 공격한 것인데.....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분노한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 합니다.
그전에 속말말갈의 돌지계 (突地稽) 는 부 (部) 의 추장으로 고구려를 배신하고는 그에 속한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나라에 내부하니..... 수나라는 영주(營州) 에
거처하게 하고, 수금자광록 대부 (授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 (遼西太守) 에 제수합니다.
이후 당은 돌지계에게 영주 총관의 직을 제수했으며 유흑달 (劉黑闥) 이 모반하자...
돌지계는 정주에 와서 진왕 (秦王) 에게 상서하여 부절을 청하였고, 이 군공
으로 기국공 (耆國公) 에 봉해졌으며, 그의 부를 옮겨 창평(昌平) 에 거처하게 합니다.
고개도 (高開道) 가 돌궐의 병력으로 유주를 공격하자, 돌지계가 맞아 싸워 승리하니 우위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이씨 성을 하사했으나 돌지계는 얼마안가 죽었고 그 아들이 이어받아 중국식으로 성씨를 바꾸니 이근행
(李謹行) 으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 기록에 자주 등장하며 그외 북방 유목 민족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이근행은 용모가 장대하고, 용맹은 군중을 뒤덮었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영주 도독이 되었는데 가동 (家童) 은
수천명에 이르러 재물로써 스스로 웅걸이 되니, 이인(夷人)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라고 기록됐습니다.
적석 도(積石道) 경략대사가 되었는데, 논흠 릉(論欽陵, 가르친링) 이 10만을 거느리고 황중 (湟中)
을 노략질하였다. 나후 (候邏, 보초, 순찰) 가 알아채지 못하는데, 병사들은 땔감을 구하려
반이상이나 흩어져 있었다. 이근행은 오랑캐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치를 꼽고
북을 치고 문을 열어 살펴보게 하였다. 논흠릉은 복병이 있는지 의심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666년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대막리지 연남생의 다급한 요청으로 당나라군이 파견될 때, 이근행은
좌감문위로 임명되어 글필하력, 고간, 설인귀 등과 함께 고구려로 와서 연남생을 맞이하였습니다.
당나라 고종이 이적을 필두로 고구려를 다시 치기로 하니 이근행은 667년 이적, 설인귀 등과
함께 신성등 16성을 함락하고 진격해 평양성을 함락했으며..... 설인귀 2만을 제외한
이적 등 당군 장수 대부분 귀국하자, 670년 고구려인 검모잠이 안승을 세워 들고 일어납니다.
그러자 당나라 장수 고간이 동주도행군총관 (東州道軍大總管) 이 되어 이근행과
함께 검모잠을 치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으며
이근행은 671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에 남아있던 부흥군 무리를 격파합니다.
이근행은 672년 평양으로 가 한시성 (韓始城) 과 마읍성 (馬邑城) 을 정복하고 백수산 (白水山)
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도우러 온 신라군과 싸웠는데 초전에는 수천명이 죽어 황해도
석문 (石門) 까지 후퇴하는데 신라군의 기세에 눌렸다기 보다는 관구검 처럼 유인전술인가 합니다.
신라군이 추격해 오자 당군은 되돌아 서서 반전하여 몰아붙여 대아찬 효천 (曉川), 사찬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 능신 (能申)· 두선 (豆善), 일길찬 안나함 (安那含)· 양신 (良臣) 등 신라군 대장 전원을 죽이고 신라군을
몰살시키니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도 달아나는데 석문 전투 대패로 대경실색한 문무왕은 서라벌 수비를 강화합니다.
석문 전투에서 신라 야전군 전부를 상실해 회전(야전) 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된 문무왕은
“축성과 수성전” 에 치중하며 한편으로는 소규모로 기습하면서 먼저 당나라에는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며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는데.... 급찬 원천을 보내 당군 포로 170명을 송환하면서
은 3만 4천푼, 구리 3만 3천푼, 바늘 400개, 우황 120푼에 금 120푼을 보내며 사죄문(표문)을 올립니다.
사죄문이 너무나도 길어서 여기에 다 실을수는 없고 십분지 2로 줄이노라면.... “신은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 옛날 신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상국의 은혜를 입어 겨우
찢어 죽는 것을 면했사온데,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 해도 그 크나큰 으혜를 어찌
보답하겠습니까? 머리를 깨트리고 재가 될지언정 그 자애로움을 어찌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쓰게되어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되었사온데 신이 형벌을 받아
죽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린 신하가 되었고 죽어서도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부디 들어주십시오. 남산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다 기록할 수가 없고 수풀로도 신의 죄를 묶을 형틀을 만들기에는 부족합니다.”
“백제인들이 상국과 이간시키려고 했기에 부득이 죄를 지었사온데 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시더라도 일의 정황을 아뢸수만 있다면 달게 죽음을 받을 것이오니, 관을 실은 수레
를 옆에 두고 머리에 바른 흙이 마르지 않은 가운데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 (당나라) 의
처분을 기다리오니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 죄를 지었음을 아뢰옵니다.”
그후 당군은 남하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675년 음력 9월 29일 매소성 (연천군 )에서 신라군이 당군 4만 혹은
20만 (삼국사기) 을 물리치니 매소성 전투인데, 말갈 출신 이근행이 당군 20만명을 이끌고 매소성에
진을 쳤고 신라군이 이를 공격해 적을 도망하게 하고 전마 30,380 필과 그에 필적하는 병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20만명은 나당전쟁에 파견된 당군의 연 총 병력이었고, 매소성 전투에
참여한 당군 병력은 대략 4만 전후 라고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저 전투에서
신라군이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당나라 병사가 전무하며 오직 말과 병기만 얻었다는 것입니다?
675년 2월 계림도 대총관 유인궤는 칠중성을 공략해 신라군을 격파한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
갔으며, 그 대신에 이근행 (李謹行) 을 안동 진무대사 (安東鎭撫大使) 로 삼고, 매소성에
주둔하여 경략케 하였는데, 이근행이 세번 싸워 모두 이겼다. -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서라벌과 나라의 존망을 걱정한 문무왕이 당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빌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를 했는데... 675년
9월 설인귀는 신라인 김풍훈을 길잡이로 신라의 천성 (泉城 파주) 에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니 신라의 장수
문훈 (文訓) 등이 2만 신라군을 이끌고 맞서 싸워 1,400명 목을 베고 40척 함대를 탈취했으며 말 1천필을 획득합니다.
천하의 설인귀도 임진강 하구 바다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포위망을 뚫고 겨우 살아날 정도의 대패였는데,
이러한 대 참패에 당나라는 만회하기 위해 이근행의 4만의 병력을 매소성 일대에 주둔시킨 것입니다.
신라군은 북한산성을 출발해 매소성 근처 수철성 일대에 주둔 시켰다. 그리고 9월 29일 교전이 시작되는데,
이근행이 군사 20만명(?) 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 3백 8십 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삼국사기》권7 신라 본기 문무왕 下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습격하여 패주 시키고 전마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 병장기도 이와 맞먹는 수치였다.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전투를 가리킬 때 삼국사기에선 "싸워서 (戰)"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매소성 전투에서는 "우리 군대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我軍擊走之)" 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전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성을 공격했던 부대는
보급을 담당하던 부대였는데 이 부대가 격퇴 되니.... 군량이 떨어진 당군이 물러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당군은 기병 3, 보병 7의 분포로 보급의 중요성은 보병 부대 보다 중요했는데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는 것은
보급문제일 것이라는 것이니, 그런데 매소성 이후에 당나라는 석현성 (石峴城, 개풍군) 을 함락시켰고,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총 18번 신라군을 공격했으며 많은 신라 성주가 싸우다 전사하는 피해를 입습니다.
즉 매소성 전투가 당나라의 병력에 큰 타격을 준 전투는 아닌 듯 보이지만, 매소성의 패전으로
당군은 신라 전선 남침이 임진강 근처에서 막혔고 결국 침공을 포기하게 되는 기점이 됩니다.
사실 나당전쟁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갈랐던 전투는 기벌포 전투로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으니
“또한 우리 병사가 당나라 병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의
목을 베고 전마 2백 필을 얻었다.”(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四)
하지만 매우 중요한 거점인 매소성 (경기도 연천) 에서 승리 (실제 전투는 없었음?)
를 거둠으로써, 나당전쟁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4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도망갔으며.... 그 결과 중요 요충지인 매소성을 얻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 당나라 서쪽 토번이 군사적으로 강성해지는데,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당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있었으니...... 신라 전선을 담당하던 이근행과 그의 부대가 청해로
이전 배치되었고 그 덕분에 신라는 방어를 강화하고 내부 사정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라는 당군 하나 하고만 싸우지만 당군은 동쪽에서 신라 그리고 서쪽에서 토번
군과 싸우니 양면 전선인데.... 이 시기에 토번의 침공으로 인해 신라전선 총사령관 유인괘가
군사를 대거 데리고 가는 바람에 이근행이 20만이 아니라 불과 4만으로 매소성에 주둔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임진강 하구 천성(파주) 에 상륙하려던 설인귀 보급부대가 패하니 군량이 떨어져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전투
없이 그냥 철수한 것이고...... 이후 보병은 군량이 없으니 다시 남하하지 못하고 대신에 말갈 기병을 동원해
신라군을 여러차레 공격하다가 토번 전선이 위험해지니 이근행은 한반도에서 철수해서 토번으로 달려간 것 입니다!
이근행은 674년 청해 (青海) 에서 토번을 격파하니 당은 새서를 내려 공로를 치하하고
연국공 에 봉했는데, 다음해인 675년 대군을 이끌고 신라 정벌에도 나서 승승장구
했으나 매소성 전투에서 보급 물자를 빼앗기고 다시 급박해진 토번 전선으로 달려갑니다.
이적이 당군을 데리고 장안에 개선한후 2만으로 평양에 주둔한 설인귀가 군사를 데리고 토번으로 가니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날수 있었고..... 신라전선 총사령관 유인괘가 병사를 데리고 토번으로
달려갔으며, 이근행 마저 토번으로 가야하니 당나라는 신라 전선을 포기한 것으로.... 동서
2개의 전쟁을 치르는 당나라의 고민인데, 그는 사후 유주 도독이 추증되고 건릉 (乾陵) 에 배장되었습니다.
2. 당에 항복해 자기가 지키던 임존성을 공격한 흑치상지
660년 나당연합군에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니 왕과 귀족에 상류츨 1만 3천명이 당나라로 잡혀갔는데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운동 지도자이자 당나라의 무장으로 백제 서부 (西部) 사람인데 묘지명에는
원래 부여씨로 부터 나왔지만 흑치 (黑齒) 에 봉해져 자손들이 성씨로 삼으면서 흑치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날래고 용감하면서도 지략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질,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다. 기호, 욕망
을 가볍게 여기면서 명예, 가르침을 중하게 여겼고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져
끝을 알수없을 정도로 맑았으며 원대하면서도 신중함, 성실함, 온화함, 선량함을 가졌다 “
흑치상지는 말갈계 고구려인 이다조와 왕방익, 정무정과 함께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 되었는데,
20세에 집안 대대로 맡아온 달솔 (達率) 이 되어 풍달군장 (風達郡將) 을 겸하게
되었으며 660년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부흥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합니다.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 왕자, 태자를 가두고 군사를 풀어 백제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
하니 흑치상지는 고향 서부로 피신해 사람들을 모아 임존성에 목책을 쌓고 지키니
귀부한 무리가 3만여명이나 되었으며 소정방이 공격했지만 물리치고 많은 성을 회복합니다.
사타상여와 함께 부흥군 지도자 귀실 복신에게 호응했지만 663년 복신이 일본에서 5천 왜군을
거느리고 나와 백제 왕위를 이은 풍왕과 대립하다가 처형되고 풍왕이 부른 왜의 구원군인
1천척 3만 마저 백강 전투에서 대패해 풍왕이 고구려로 달아나니 부흥군의 거점은
임존성 하나만 남게 된지라.... 흑치상지는 사타상여와 함께 무리를 인솔해 당나라에 항복 합니다.
항복 당시 당나라군의 지휘관 유인궤는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식량을 주며 임존성을
공략할 것을 명하니, 당나라에서 수군을 이끌고 왔던 손인사가 "그들이 무슨 야심이
있을줄 알고 무기에 식량을 대주겠는가? 한번 배신한 놈들은 믿기가 힘들다." 라며 반대합니다.
유인궤는 "그들은 당나라에 대한 충심과 지모가 있어서 믿어주면 공을 세울 것이다. 그러니까 두번 다시는
배신 못하게 도망칠 곳 부터 없애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대답하니 흑치상지 와 사타상여는
유인궤의 명을 수락해...... 지수신이 남아있는, 자신들이 살았던 임존성의 동료 백제 부흥군을 공격합니다.
2차대전때 일본 항공모함의 하와이 기습으로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에 살고있던 20만명의 일본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갇혔는데.... 그후 전쟁이 길어지자 미군은 저 일본인들에게서 지원병을 받으니 그 숫자가
2만명이 훨씬 넘었는데 미국은 이들을 고국인 태평양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유럽전선으로 보냈는데....
당나라는 흑치상지 본인이 수성했던 자기 성을 공격해 동료 전우들을 죽이게 했습니다. 2번 배신을 막기 위해?
장안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명에는 664년에 절충도위가 되어 웅진성을 지키게 되자
사람들이 기뻐했고 672년 에는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 (行帶方州長史) 가 덧붙여
지고 그후 사지절, 사반주 제군사, 사반주 자사로 옮겼다가 상주국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670년 신라와 당 사이에 나당전쟁이 발발했고 흑치상지도 당나라 치하 웅진도독부의 신하로 신라
군과 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신라의 공세가 강화되어 웅진도독부도 안동 도호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쫓겨나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기면서..... 흑치상지도 백제 땅을 떠납니다.
당고종이 흑치상지를 좌령군장군, 웅진도독부사마로 임명했고, 부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를 덧붙여 봉해졌으며, 묘지명에는 당 고종이 그의 선함을 칭찬
하며.... 지조와 학식 있는 군자로 대우했다고 하는등 당에서의 인망이 높아집니다.
677년에 토번이 당을 공격하자 유인궤의 부장으로 조하도경략부사 (洮河道經略副使) 로 참전하니 다음해 9월
12일 당은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에게 패하여 유심례가 전사, 이경현은 칭하이성 시닝(西寧) 승풍령이라는
고개에 포위되었는데, 흑치상지가 밤에 결사대 (백제인?)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습격해 이경현을 구해냅니다.
이 공로로 흑치상지는 좌무위장군 하원군부사로 임명되었고 680년 7월에도 하원을 노략질하는 토번 가르친링
을 물리쳐 유인궤, 이경현의 대사(大使) 보직을 넘겨받게 되었으며, 681년 5월 21일에는 토번의
논찬파를 양비천에서 격파하고 양식, 가축 등을 거두니 좌응양위대장군 (左鹰揚衛大將軍) 으로 승진합니다.
684년 11월 4일에는 강남도 대총관이 되어 서경업을 토벌했고 686년 돌궐 힐질리시가한이
하동도 (河東道)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연연도부대총관
(燕然道副大總管) 이 되어 양정(兩井) 에서 2천 기병을 거느려 돌궐군 3천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687년 돌궐은 당의 삭 주(朔州) 를 침공했는데, 흑치상지는 연국공, 식읍 3천호 우무위위 대장군 (右武威衛
大將軍) 으로 임명되고는 신무도경략대사 (神武道經略大使) 로서 이다조 (李多祚), 왕구언
(王九言) 등을 부장으로 황화퇴 (黄花堆) 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40리를 뒤쫓아 사막 쪽으로 몰아냅니다.
그런데 우감문위중랑장 (右監門衛中郞將) 찬보벽(爨宝璧)이 조정에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것을 청했고, 측천무후도 흑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
(懷遠軍經略大使) 로써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돌궐을 쫓게 했는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 흑치상지와 사전 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해 당군 1만 3천 명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습니다.
흑치상지가 당의 무장으로 복무하면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패전이었으니... 이 패전 책임을 물어
찬보벽은 처형당하고 대장 흑치상지도 심문 받던중, 혹리 주흥 (周興)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짜고 반역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투옥당하고, 689년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습니다.
흑치상지가 죽은 뒤 아들 흑치준이 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흑치상지
는 가까스로 역적의 누명을 벗고, 낙양의 북망산에 묻힐 수 있었는데,
의자왕, 연남생 등 삼국 통일 전쟁기 인물 중 여기 북망산에 묻힌 사람이 많습니다.
흑치상지는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린 백제인중 한명으로 수당 쟁패기, 동돌궐, 서돌궐, 토욕혼, 토번,
백제에 이르기까지 50년 경력 동안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소정방이 낭패를 본 경험이 2번으로 그중
하나가 흑치상지니 백제 부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무주 정권의 대표 무장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7세기 후반 당나라의 주 전선이었던 돌궐과 토번, 서경업의난 등 굵직한 전쟁마다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특히
가르친링으로 대표되는 반당파 무장들에게 당나라 장수들이 망신을 당했는데, 그 가르친링이
최전성기였던 와중에 흑치상지가 전선에 부임한 7년 동안은 토번이 설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흑치상지는 (당에) 항복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동료였고 한때는 당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임존성을
함락시키는데 앞장을 선 것이죠. 흑치상지의 행동은 부흥군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 입니다."
- 계명대학교 사학과 노중국 교수의 평, KBS 역사추적 '비운의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신자 인가'
삼국사기에 그의 열전이 실린 것에 대해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영웅인 귀실 복신은 열전을 안 썼으면서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진압하기까지 한 흑치상지는 열전을 써 넣었다" 며 비판했습니다.
의자왕이 아들 41명을 중용하면서 흥수와 성충등 신료들을 숙청하고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태자 교체등 급진적
이면서도 무리한 왕권 강화를 시도한데다가, 백제 부흥군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도침을 죽인 복신은
풍왕에게 죽는등 막장에 치닫는 부흥군의 분열이 아니꼽게 보여 백제 부흥운동에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부흥운동 자체를 비하하고 좌절한 나머지 백제 부흥 자체를 부정하고 진압에 나선 흑치상지의 행동은
논리의 모순을 보여주는데, 시대를 앞서 간 변절자 모델 흑치상지처럼 멸망한 백제, 고구려 유민
가운데 본국 보다도 외국인 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거나 서쪽 사막이나 초원, 정글에 강제이주 되거나 해서 평생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다 죽어갔는데, 당 왕조가 한족 이외 이민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출세할
기회를 제공한 개방적인 사회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엄연히 신분 차별이 존재하는 전근대 사회 였습니다.
"정말 흑치상지는 결국에는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용병으로써 이용만 당하다가 죽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그렇잖아요 . '이러자고 조국을 배신했을까?' 무상한 거예요." - 류근 시인의 평. KBS 역사저널 그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