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가나가와 현에 위치한 가마쿠라(Kamakura). 과거 한 세기 이상 전 일본을 다스렸던 가마쿠라 막부의 영화가 남아 있는 이곳은 왠지 아련하면서도 자유로운 묘한 매력을 가진 도시이다
1 일본 최초의 전차 에노덴. 옛날 느낌이 물씬 난다
2 유럽풍 정취가 가득한 가마쿠라 골목길
3 때 이른 사쿠라
4 에노덴에서 내다본 아련한 기찻길
가마쿠라. 동경역에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멋쟁이 도시, 가마쿠라. 가마쿠라를 떠올리면 꿈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것은 12세기부터 한 세기 이상의 세월 동안 전 일본을 다스렸던 가마쿠라 막부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그 이후로 발달한 외국문물 덕분에 유럽풍의 소도시 느낌이 공존해서이기도 하다. 일본 관동의 남서부 가나가와 현에 위치한 해안 마을 가마쿠라는 ‘관동 지방의 교토’라 불리기도 하는데 은밀하고 향 냄새 나는 교토와 비교해볼 때,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마쿠라는 좀더 ‘놀기 좋은’ 아니면 ‘날라리’같은 도시다. 한때의 영화가 남아 있어 그 자존심이 세지만, 바닷가 마을답게 그 분위기는 자유로워 보인다고나 할까. 그런 극과 극의 매력이 가마쿠라를 현실 속의 마을이 아닌, 아득한 어딘가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린다. 과거와 현재, 도시와 바닷가, 전통과 서양 문물, 가마쿠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구석마다 숨어 있다.
1 일본의 국보 대불
2 하세역 주변 카페의 메뉴
3 가마쿠라의 이름난 멋쟁이 숍
가마쿠라로 가는 길동경에서 가마쿠라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다. 동경역이나 신주쿠역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 신주쿠역에서 후카가와까지만 갔다가 가나가와 현 바닷길을 달리는 기차 ‘에노덴’으로 갈아타 에노덴의 종점인 가마쿠라에서 내리는 방법, 시부야에서 요코하마까지 40여 분 만에 내달려서는 요코하마에서 반나절 관광을 하다가 가는 방법 등이다. 가마쿠라 종점으로 직통 기차를 타는 것이 빠르겠지만, 사실 가마쿠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옛 맛이 일품인 ‘에노덴 타기’다. 후카가와역에서 에노덴에 오르면, 이시가미역을 지나 야나기코 지역이나 쇼난 카이간 코엔역을 차례로 보게 된다. 가마쿠라로 들어가는 전주곡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답고 정갈한 전형적인 일본의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전원풍경 너머로 바다가 함께 달린다는 것. 어느새 에노덴은 인기 만점의 관광 명소 ‘에노시마’에 닿고, 에노시마에서 관광객이 한 차례 내리면 다시 자이언트 사이즈의 불상으로 유명한 ‘하세’역에 정차한다. 이렇게 가마쿠라 주변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붙어 있어서, 에노덴이라는 느릿한 옛날 기차의 노선을 이뤄낸다. 단출한 차림으로 짐 없이 떠난다면, 가마쿠라까지 가는 동안 마음에 드는 아무 역에서나 내려 걷고, 먹고, 느낄 수 있으니 기차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로망’을 실천할 수 있는 동선. 중간 중간 기차를 내려 둘러보고 싶은 유혹을 꾹 참고 일단 가마쿠라에 들어섰다면 고마치 거리로 가자.
1 먹을 곳, 볼 곳 많은 하세역 주변 풍경
2 레스토랑과 파티세리를 함께 운영하는 유키노시타 입구
고마치에서 쇼핑을고마치 거리는 가마쿠라의 오래된 상점가이다. 대대로 같은 자리에서 콩조림을 만들고, 수제 햄을 파는 가게들이 프랑스풍의 레스토랑이나 독일식 소시지 가판대 등과 섞여 있다. 가마쿠라에 내리자마자 이 거리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는 숍들의 영업시간이 비교적 ‘짧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부촌이라서일까? 가마쿠라 상점가는 인파가 많은 금요일 저녁에도 5~6시경이면 슬슬 문을 닫는 분위기다. 쇼핑을 하거나 저녁 먹을 맛집을 체크하고 싶다면 늦어도 3시 전에는 돌아다녀야 하니 서두를 필요가 있다. 역사가 있는 동네답게 가마쿠라 쇼핑의 중심은 역시 ‘먹을거리’다. 특히 수제 햄이 유명하여 생햄, 스모크햄, 살라미 등 다양한 종류의 고급 햄을 살 수 있다. 가마쿠라 하무토미오까라는 상호의 햄 가게는 무려 1백년이나 같은 상표, 같은 맛으로 햄을 공급하고 있다는데, 값이 만만치 않게 비싸다. 큰맘 먹고 6백엔대의 생햄을 집으니, 종이비누처럼 얇고 투명한 햄이 10장 이내로 들어 있다. 잘 익은 멜론에 곁들이거나 오렌지 잼을 바르거나 아니면 으깬 통후추에 톡 찍어서 당장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독일식으로 만드는 수제 소시지 가게를 또 찾아나선다. 길의 거의 끝 쪽에 있는 소시지 전문점 아루카마 카페(Arukama Cafe)는 흥겨운 곳이다. 육식 좋아하는 이들의 에너지가 숍 안에 가득하다. 경쾌한 음악, 냉장 쇼케이스 가득 채워진 각종 소시지와 가공 육류들이 캔디 가게에 들어온 애들처럼 어른들을 흥분시킨다. 한술 더 떠서 숍 한쪽에서는 유혹적인 냄새를 폴폴 풍기며 소시지를 구워 팔고 있으니, 이곳을 그냥 지나가기란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힘들겠다. 직접 배합해 만든 하우스 머스터드까지 판매를 하니, 이것저것 따져보고 고른 소시지와 머스터드까지 함께 챙겨야 그 맛이 보장된다. 방금 튀겨낸 쌀과자를 달콤한 간장 소스에 담갔다가 재빨리 김 한 장을 둘러주는 길거리 간식이나, 당일 아침에 찐 모찌를 특제 콩가루에 굴려 손에 쥐어주는 찹쌀떡 등은 50엔부터 1백50엔 사이. 걷다 보면, 하나씩은 다 맛보게 된다. 그래서 이 거리를 하릴없이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간식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유난히 행복해 보인다. 천천히 걷는 내 걸음을 뒤에서 쫓는 이도 없고, 걸음을 멈추고 옷에 묻은 콩가루를 손수건으로 떨어내도 관심 갖는 이 하나 없다. 다들 제 입이, 제 눈이 행복한 모양이다.
1 가마쿠라 골목의 헌책방이 정겹다
2 부슬비가 잠깐 내리는 천변
3 모던한 양식집 간판
4 마라쿠라의 아침 시장
화려한 색감과 맛, 가마쿠라 야채고마치 거리를 어느 정도 섭렵했으면 길의 중간쯤에 있는 오래된 문방구를 끼고 골목으로 돌아든다. 문방구를 돌자마자 나오는 헌책방에는 철 지난 가부키 포스터가 붙어 있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읽을 줄 안다면, 헌책방 가판대에 쌓인 1백엔짜리 책들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도 좋다. 그 길을 따라 쭉 걸으면, 단독주택을 개조하여 케이크와 차를 파는 집이나 간단한 파스타와 와인 한잔 할 수 있는 식당이 간간이 눈에 띈다. 작은 철길이 하나 나오고, 길을 건너면 멋쟁이 사장님이 앤틱 안경을 쓰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양장점 겸 앤틱숍이 눈에 띈다. 거기서 몇 발짝만 가면 인기 만점의 고급 잼가게인 ‘로미 유니(Romi-unie)’가 보이는데, 간판을 구태여 찾지 않아도 대롱대롱 입구에 매달린 귀여운 모양의 티스푼 표시가 무언가 달콤한 것을 파는 집임을 말해준다. 상상할 수 있는 달콤한 것들을 모조리 잼으로 만들 수 있는 ‘잼 아틀리에’로, 동경에서 젊은 커플들은 이곳의 잼을 사러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고. 잼가게 구경이 끝나고 또 몇 발짝 채 가기도 전에 일본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꿀가게가 나온다. 일본의 옛날식 목조 주택을 그대로 재현한 멋들어진 외관에, 꿀단지를 지키는 푸우 곰을 닮은 할아버지가 안에 계시다. 꿀의 종류도 많고, 꿀과 관련된 다른 제품들도 판매하는 인기가 너무 많은 집인데, 점원이 따로 없어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자, 그러면 가마쿠라에서의 한끼는 무얼 먹어야 후회가 없으려나. 일단 수타 소바(일본식 메밀 면) 하는 집이 두어 군데 눈에 띈다. 스테이크 하우스나 경양식을 하는 레스토랑도 보인다. 하지만 가마쿠라까지 갔다면, 동경에 비해 가격이 훌륭한 프렌치 요리를 반드시 맛보기를 권한다. 나의 선택은 ‘메종 드 유키노 시타’라는 이름의 프랑스풍 브라세리. 간판에 브라세리라 적혀 있지만, 내부나 메뉴는 전반적으로 브라세리로 불리기에는 클래식하다. 이 집의 유명세를 모르고 정말 우연히 찾아간 나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셰프는 뉴욕의 미슐랭 스리 스타급 레스토랑에서 오래 수련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런치는 오전 11시부터, 디너는 오후 5시부터 먹을 수 있는데 시골 동네의 레스토랑을 생각하고 예산을 잡는다면 다소 비싸게 느껴질 법도 하다. 일단, 저녁 식사를 기준으로 야채 요리 코스는 3천엔대, 유키노시타 주방장 특선 코스는 5천엔대, 와규를 곁들이면 6천엔대, 최고급 코스는 8천엔대 이상이다. 가마쿠라에서 소규모로 재배하는 야채는 일본 내 고급 레스토랑들에서 앞다퉈 공수해갈 만큼 인기가 높기 때문에, 가장 권하는 메뉴는 3천엔대의 야채 코스메뉴. 감자 크림수프, 빨간 무와 오렌지로 만든 샐러드며 차게 굳힌 두유에 녹즙으로 만든 소스를 쓰는 등 일단 입맛을 확 살려주는 서너 가지의 전채가 나온다. 그 다음 코스가 압권인데, 가마쿠라의 야채를 딱 맞게 익혀서 구운 토마토로 맛을 낸 맑은 수프를 한 접시에 담은 요리로, 국물을 몇 모금 떠 먹으며 겉은 흐물거리지 않으나 속은 부드럽게 익은 가마쿠라산 야채들을 씹노라면 벌써 봄볕이 내 안에 가득 퍼지는 듯 밝은 기운이 감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코스 요리를 간소화한 것이 런치 메뉴. 점심에는 가마쿠라 야채 요리와 밥, 미소 수프 등을 곁들인 세트 메뉴를 1천5백~1천8백엔 정도로 먹을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정도 수준의 프렌치 요리를 동경에서 먹는다면 분명 두 배 가까운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큰맘 먹고 먹어보는 것이 결국 남는 셈이라고 자신을, 일행을 설득해봄 직하다.
1 에노덴에서 내려 우연히 찾은 해변가 카페
2 건강해 보이는 서퍼들
3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나는 하세역 주변 풍경
가마쿠라의 아침3박4일, 4박5일 일정으로 동경에 간다면 하루쯤 시간 내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가마쿠라다. 언급했듯이, 가마쿠라뿐 아니라 에노덴을 타고 돌아다니며 놀 수 있는 소도시들이 줄줄이 엮여 있어서 후딱 둘러보고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지만. ‘가마쿠라 프리 패스(Kamakura Free Pass)’라는 1천5백엔대의 티켓을 구입하면, 신주쿠-가마쿠라 간 왕복 차편에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에노덴을 탈 수 있으니 알아두면 편리하다. 동경에서 부지런을 떨어 아침 일찍 출발할 수만 있다면, 이른 아침부터 열리는 가마쿠라 시장을 구경할 수도 있다. 시장을 둘러보면, 왜 동경의 유명한 셰프들이 ‘가마쿠라 야채’만 고집하는지 알 수 있는데. 특히 무 종류가 발달하여 깍두기를 담글 만한 큰 무에서부터 순무를 닮은 동그란 아이, 서양 무처럼 빨간 아이 등 종류가 줄줄이 이어진다. 쌉싸래한 맛을 내는 식용 꽃이며, 싱싱한 배추 등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동네 주민들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시장 안의 작은 명소인 ‘이치바상 시퐁 케키’집의 시폰케이크는 꼭 한 조각 먹어보아야 하는 명물. 입에 넣자마자 스르륵 눈처럼 사라진다. 갓 구워 따끈한 채로 한 조각씩 썰어두기 때문에 일찍 시장에 나오느라 때를 놓친 아침 대용으로 알맞다.
가마쿠라의 작은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가 신주쿠로, 동경역으로 되돌아가는 기차에 오르면 마음이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파도에 제멋대로 엎드린 서퍼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해변을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폴짝 내려서 나도 바다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다. 멋진 서퍼와 눈인사를 나누고, 시원한 바다 냄새를 맡고, 바다가 보이는 커리집에서 게으른 점심을 먹고 싶다. 이렇게 나른한 마음으로 꾸벅 졸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신주쿠든 동경역이든 일본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다는 장소에 내리게 된다. 그리고 오늘이든 내일이든 공항으로 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곧 내 냄새가 밴 이불과 베개, 오래된 벽지가 나를 반겨줄 것이다. 그리고 가마쿠라 상점가를 누비며 콩떡을 사 먹던 것은 꿈이었나 싶을 것이다. 이렇게 아련한 느낌만으로 남는 도시가 바로 가마쿠라다.
1 가마쿠라 잼가게 로미유니
2 가마쿠라 아침시장 속 시폰케이크집
3 고마치거리 끝에서 만나는 교차로는 신사와 이어진다.
4 유럽풍 상점가를 닮은 세련된 가마쿠라역 주변 풍경
TRAVEL INFORMATIONHOW TO GET THERE 가는 방법은 두 가지. 도쿄역, 시나가와역에서 요코스카센을 타고 1시간, 가마쿠라역에서 하차하거나 신주쿠역에서 쇼난신주쿠센을 타고 후지사와역에서 하차, 에노덴으로 갈아탄 후 가마쿠라역까지 간다.
HOTEL 에노덴 시치리가하마역(七里ガ浜)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가마쿠라 프린스 호텔((0)467-32-1111, www.princehotels.co.jp/kamakura)이 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가격은 3만엔대. 료칸에서 머물고 싶다면 하세역(長谷)에서 도보로 3분 거리인 타이센카쿠(對僊閣, (0)467-22-0616)를 추천. 조식 포함 1인당 7천5백엔 선이지만 2인 이상, 객실은 5개뿐이며 영어는 통하지 않는다.
RESTAURANT 수타소바집 가마쿠라 야마지(山路, (0)467-25-2249, 오전 11시∼오후 7시)는 고마치 거리에 있는 유명한 수타소바집이다. 다이죠시대부터 있었던 곳으로 덴뿌라와 곁들이는 덴자루(2천1백엔)를 꼭 먹어볼 것. 메종 드 유키노시타(Maison de 雪ノ下, (0)467-61-227(오전 11시∼오후 10시)는 일본산 식재료를 이용하여 신선함이 돋보이는 프랑스 요리를 맛 볼 수 있다. 와인 리스트를 따로 갖추고 있으며 서비스도 수준급. 2층에 레스토랑이 위치하고, 같은 건물 1층에는 유키노시타 파티세리(Patisserie)가 있는데 특히 마카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