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4,15-16.23ㄴ-26>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Al atardecer de aquel día, el primero de la semana, estando cerradas, por miedo a los judíos, las puertas del lugar donde se encontraban los discípulos, se presentó Jesús en medio de ellos y les dijo: «La paz con vosotros». Dicho esto, les mostró las manos y el costado. Los discípulos se alegraron de ver al Señor. Jesús les dijo otra vez: «La paz con vosotros. Como el Padre me envió, también yo os envío». Dicho esto, sopló sobre ellos y les dijo: «Recibid el Espíritu Santo. A quienes perdonéis los pecados, les quedan perdonados; a quienes se los retengáis, les quedan retenidos».
«Recibid el Espíritu Santo»
Mons. Josep Àngel SAIZ i Meneses Obispo de Terrassa
(Barcelona, España)
Hoy, en el día de Pentecostés se realiza el cumplimiento de la promesa que Cristo había hecho a los Apóstoles. En la tarde del día de Pascua sopló sobre ellos y les dijo: «Recibid el Espíritu Santo» (Jn 20,22). La venida del Espíritu Santo el día de Pentecostés renueva y lleva a plenitud ese don de un modo solemne y con manifestaciones externas. Así culmina el misterio pascual.
El Espíritu que Jesús comunica, crea en el discípulo una nueva condición humana, y produce unidad. Cuando el orgullo del hombre le lleva a desafiar a Dios construyendo la torre de Babel, Dios confunde sus lenguas y no pueden entenderse. En Pentecostés sucede lo contrario: por gracia del Espíritu Santo, los Apóstoles son entendidos por gentes de las más diversas procedencias y lenguas.
El Espíritu Santo es el Maestro interior que guía al discípulo hacia la verdad, que le mueve a obrar el bien, que lo consuela en el dolor, que lo transforma interiormente, dándole una fuerza, una capacidad nuevas.
El primer día de Pentecostés de la era cristiana, los Apóstoles estaban reunidos en compañía de María, y estaban en oración. El recogimiento, la actitud orante es imprescindible para recibir el Espíritu. «De repente, un ruido del cielo, como de un viento recio, resonó en toda la casa donde se encontraban. Vieron aparecer unas lenguas, como llamaradas, que se repartían, posándose encima de cada uno» (Hch 2,2-3).
Todos quedaron llenos del Espíritu Santo, y se pusieron a predicar valientemente. Aquellos hombres atemorizados habían sido transformados en valientes predicadores que no temían la cárcel, ni la tortura, ni el martirio. No es extraño; la fuerza del Espíritu estaba en ellos.
El Espíritu Santo, Tercera Persona de la Santísima Trinidad, es el alma de mi alma, la vida de mi vida, el ser de mi ser; es mi santificador, el huésped de mi interior más profundo. Para llegar a la madurez en la vida de fe es preciso que la relación con Él sea cada vez más consciente, más personal. En esta celebración de Pentecostés abramos las puertas de nuestro interior de par en par.
MISA DE LA VIGILIA (Jn 7,37-39) «De su seno correrán ríos de agua viva»
Rev. D. Joan MARTÍNEZ Porcel
(Barcelona, España)
Hoy contemplamos a Jesús en el último día de la fiesta de los Tabernáculos, cuando puesto en pie gritó: «Si alguno tiene sed, venga a mí, y beba el que crea en mí, como dice la Escritura: ‘De su seno correrán ríos de agua viva’» (Jn 7,37-38). Se refería al Espíritu.
La venida del Espíritu es una teofanía en la que el viento y el fuego nos recuerdan la trascendencia de Dios. Tras recibir al Espíritu, los discípulos hablan sin miedo. En la Eucaristía de la vigilia vemos al Espíritu como un “río interior de agua viva”, como lo fue en el seno de Jesús; y a la vez descubrimos que también, en la Iglesia, es el Espíritu quien infunde la vida verdadera. Habitualmente nos referimos al papel del Espíritu en un nivel individual, en cambio hoy la palabra de Dios remarca su acción en la comunidad cristiana: «El Espíritu que iban a recibir los que creyeran en Él» (Jn 7,39). El Espíritu constituye la unidad firme y sólida que transforma la comunidad en un solo cuerpo, el cuerpo de Cristo. Por otra parte, Él mismo es el origen de la diversidad de dones y carismas que nos diferencian a todos y a cada uno de nosotros.
La unidad es signo claro de la presencia del Espíritu en nuestras comunidades. Lo más importante de la Iglesia es invisible, y es precisamente la presencia del Espíritu que la vivifica. Cuando miramos la Iglesia únicamente con ojos humanos, sin hacerla objeto de fe, erramos, porque dejamos de percibir en ella la fuerza del Espíritu. En la normal tensión entre unidad y diversidad, entre iglesia universal y local, entre comunión sobrenatural y comunidad de hermanos necesitamos saborear la presencia del Reino de Dios en su Iglesia peregrina. En la oración colecta de la celebración eucarística de la vigilia pedimos a Dios que «los pueblos divididos (...) se congreguen por medio de tu Espíritu y, reunidos, confiesen tu nombre en la diversidad de sus lenguas».
Ahora debemos pedir a Dios saber descubrir el Espíritu como alma de nuestra alma y alma de la Iglesia.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일어난 사실(事實)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체험을 전하기 위해 구약성서 표현들을 빌려 각색한 장면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想起)시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그들의 언어에 혼란을 일으켜,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강립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그 흩으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는 인간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상호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존중하며, 살리는 사회이고, 그것은 다채로우면서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강요와 통제는 생명을 죽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에서 함께 읊은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교하면서 그들이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의무 사항으로 채택된 것은 1215년(제4차 라테란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면, 엄청남 보속, 곧 고행(苦行)을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히 심어 주기 위한 개인고백 고해성사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한 번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또 한 번은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마르코복음서(16,16)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위협이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고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다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죄의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복음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1,29)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당신의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 숨결로써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주며, 그들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자기 척도(尺度)로써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서(8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視野) 협착증(狹窄症)’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시야가 협소한 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획일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하느님은 다양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광활한 시야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
<성령, 일치, 용서>
"...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일과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린 일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구분되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오순절 날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일은 '사랑'이고,
우리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먼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용서할 것입니다.
용서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일치를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도 용서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기가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노력하지도 않고, 서로 남 탓만 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셔도 우리가 그 도움을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권한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따라서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도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또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또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에게 용서하지 않을 권한도 주셨을까?"
예수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어떤 죄를 짓든지 회개하면 다 용서받겠지만,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한다."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용서할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이 적용될 뿐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먼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면 교회 공동체가 모두 따라 하게 될 것이고,
교회 공동체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감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참으로 하나가 된다면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도, 남북통일도 용서와 사랑 없이는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이 설교를 했을 때,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었다는 것은(사도 2,7-12)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그날 그곳에서는 일치와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비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자기 스스로 받기를 거부하면 성령의 은사도, 말씀의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