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코모두스 황제(재위 AD180년 ~ AD192년)
이 황제는 욕을 배부르도록 먹은 황제다. 아버지는 지금도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 받는 “기마
상(騎馬像)”을 남겼지만 이 황제는 사자대가리 가죽을 머리에 쓰고 멍 하게 눈을 뜨고 있는
半身像(헤라클레스 흉내)을 남겼다. 로마 황제들 중 단죄 되었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도미티아누스’는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완벽히 구제해 주었고 ‘네로’마저도 금융, 외교, 大
화재 후의 로마 재정비 등에서 는 출중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끔찍이
사랑을 받으면서 등장한 ‘칼리굴라’와 이 ‘코모두스’는 지금까지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다.
著者는 위의 두 영화를 자세히 설명하고 그 제작자들이 갖는 의문 즉, “현명한 황제가 깜이 안
되는 아들을 왜 선택했을까? 또는 왜 帝位가 이어졌을까?”를 ‘아우렐리우스’의 암살이라는
상황으로 각색했다는 것이다. 또한 ‘코모두스’를 선택하지 않고 소위 능력 있는 자를 선택했으
면 내란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예상 했다. 능력자를 선택해서 제위를 넘겨준 황제들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논리다. 그리고 ‘코모두스’가 어려서 특별하게 못난
짓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웬만해서는 아들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률적으로
도 공동황제였던 아들을 쉽게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불행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여야 할 이유도 없다. 또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모델일 수도 있었던 기병대장 ‘막시미아누스’는 ‘코모두스’가 황제가 된 후 6년경에
집정관이 되었다. ‘코모두스’가 아버지 황제를 죽일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영화는 영화다.
역사 기록이 들어가기는 해도 역사는 아니다.
● 전쟁 종결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지만 ‘아우렐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10년이나 질질
끌었다. 아들이 적을 섬멸하고 속주로 만들기를 바랐지만 ‘코모두스’는 아버지가 죽자 전쟁을
끝내자고 했다. 큰 매형을 비롯한 휘하 장군 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현역은 현역이다. 삭막한
북부 전선에서 고생하는 것이 싫었든 어쨌든 협상을 하고 새 황제는 로마로 돌아갔다. 목이
조였던 게르만 족들은 얼씨구나 하는 상황이었다.
● 60년의 평화
후세의 역사가든 당시의 역사가든 ‘코모두스’에 대한 악평은 같았는데 게르만 족과의 협상을
나쁜 정책판단이라고 평했고 도나우 강 너머의 “보헤미아 지방(현 체코의 서부 지역)”을 속주
화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도 그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著者 ‘나나미’는 한 수 접어서 보았다. “다키아(현 루마니아)”를 ‘트라야 누스’가 속주로
만들어서 안전을 도모했으나 도나우 강의 국경방어선으로 보면 二重 방어선이고 군단도 증가
되었다. 보헤미아를 속주로 만들었다 해도 등뒤의 도나우 강과 이중 국경을 위한 군단이 증강
배치되고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있었을 거라는 분석이다.
지금은 영국이 “신사의 나라”이니 “해가 지지 않았던 제국”이라느니 하고 폼을 잡지만 그 곳
은 황량한 “야만의 땅”이었다. ‘카이사르’가 처음 그곳에 진출해서 점령한 이유는 갈리아 세력
중 反로마 세력이 피난처로 그곳을 활용할 수 없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또 스칸디나비아에서
야만인들이(게르만의 일파) 지금의 스코틀랜드(칼레도니아)로 넘어 들어와 분탕질을 해대기
때문에 3개 군단을 상주시켰다.
東邦은 물론이고 에스파냐, 심지어 북아프리카에서도 인재가 등용되어 황제도 되고 원로원
의원, 집정관, 군단장도 되었으나 브리타니아에서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다키아, 보헤미아
에서도 없었다. 그래서 著者는 이런 황막한 전쟁을 ‘코모 두스’가 끝낸 것도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코모두스’가 원대 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좀 찝찝한 구석이 있다. 그의 행동은 한국 젊은이들이 휴전선 철책선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강남이나 弘大 앞에서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는 가설을 ‘코모두스’에게
적용 하면 된다.
이런 결정을 로마 시민들은 굴욕적인 강화로 치부했다. 엘베 江에서 라인 江으로 물러선 ‘티베
리우스’와 티그리스(Tigris) 江에서 유프라테스 江으로 되돌아온 ‘하드리아누스’가 내내 욕을
먹은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코모두스’의 이 결단(?) 은 향후 60년간 평화를 이루었다. 그 이유
는 ① 게르만족과 사이 좋게 지내게 된 것 ② 20년의 전쟁으로 로마 군의 녹슬었던 전력이
되살아났다는 점이었다.
● 인간 ‘코모두스
그 이후 11년간 ‘코모두스’의 행적은 빵점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날씨가 아주 좋은데도 홍수
가 걱정되어 미리 둑을 검사하러 나가는 오지랖이 너무 넓은 사람이었다. 일반 시민들과 원로
원은 그게 싫었다. 반대로 꼼짝도 안 하고 태평성대의 덕을 본 ‘안토니수스 피우스’황제에게는
100점을 주었다. 회사에서 부장이나 임원, 사장이 너무 부지런 떨고 나대면 사원들이 몹시
피곤하다. ‘코모두스’가 ‘하드리아 누스’ 흉내만 냈어도……다행히 그의 시대에는 내우외환
(內憂外患)이 없었다. 민심도 괜찮았다. 그의 애첩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누나가 개입된 황제 암살기도로 황제의 성격이 변한다.
● 누나 ‘루킬라’
이 누나는 6남매 중 제일 위였고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모델이다. 영화 와는 다른
이미지다. 아버지와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했으나 5년 살다가 갑자기 ‘베루스’
가 죽어 19살에 과부가 되었고 다시 충직한 ‘폼페이아누스’와 재혼했다. 하지만 출신의 급이
다르다고 남편을 홀대했다. 내소박이다.
이 여자는 영화에서는 현모양처로 나오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첫남편도 아버지와 공동황제
였고 자신은 아버지가 “황후”라는 칭호를 내려주었고 아버지, 남동생 ‘코모두스’까지 황제라는
사실에 콧대가 말도 못했다. ‘코모두스’의 아내가 자식을 낳으면 “황후” 칭호가 주어지고 자신
은 오리알이 될 것이 두려워 동생 황제를 죽이려고 했다. 욕심이 화가 되고 화가 넘치면 죽는
수가 있다.
● 음모
엉성한 암살계획- 후임황제 후보: 고모의 아들 즉 고종사촌 ’코드라투스’. 자객: 퀸티아누스
(남편의 조카),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도나우 전선 책임자로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무관. 이 것으로 목숨을 지킴.
암살은 실패했고 현장에서 잡힌 자객과 후보 황제는 즉결 처분되었다. 누나는 카프리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착 직후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의심 많은 폭군”으로 바뀌었다. 근위
대장도 해임되고 죽었다. 의심받은 원로원 의원 6명이 처형되었다. 다른 매형 1명도 처형되었
다. 집안 싸움을 용서치 않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 처음 5년
이래저래 골치 아픈 정치나 험악한 변경생활을 싫어한 황제는 통치에 관심이 없어졌다. 이를
대행한 것이 큰 매형 ‘폼페이아누스’ 밑에서 훈련 받고 帝國의 국경 경험이 많은 근위대장(2명
중 한 명은 암살사건 때 억울하게 처형)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 였다. 지금의 평화는
불안 불안한 평온인데 이를 잘 대처한 것이 ‘페렌니스’였다. 북아프리카나 브리타니아에 문제
가 조금씩 생겼는데 도통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그렇다고 뭔가를 보여주지도 않는 황제 때문이
었다. ‘페렌니스’가 독단적으로 잘 막아낸 결과였는데 이를 원로원에서 싫어했다.
‘코모두스’는 대외활동도 폐쇄적으로 가는 곳만 갔다. 마음의 병으로 의심이 많았다. 노예
출신 하인이 입방아를 찧어 황제의 의심병이 도졌다. ‘페렌니스’는 가족과 함께 이유도 없이
기습, 살해되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 가족 살해가 이것과 흡사하다.
간신 짓을 한 해방노예 출신의 그리스人 ‘클레안드로스’가 황제의 최 측근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또 사건을 만들었다. 황제의 다른 두 매형을 황제 암살 음모죄를 씌워 죽였다. 황제는
귀찮은 아내도 간통죄를 씌워 유배 후 죽였다. 영화에 나오는 못된 ‘코모두스’가 맞다. 그런데
도 은퇴한 큰 매형과 다른 군단장들은 先帝 ‘아우렐리우스’ 와의 약속을 들어 황제를 처결하지
않았다. 원로원도 썩어서 매관 매직에 눈이 벌건 ‘클레안드로스’를 추켜세우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제국이 돌아 간 것은 일선 행정체계가 잘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람이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하는데 이 간신이 무상배급용 밀에 손을 댔다. 배급량이 줄자
서민들이 황제의 저택으로 대거 몰려가 항의했다. 놀란 황제가 간신을 군중들에게 내주자
즉시 살해되었다. 그의 재산을 몰수했으나 황제는 그 돈으로 검투사 시합을 열고 제가 직접
내려가 칼 싸움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 영화에서는 그 짓 하다가 죽는 것으로 나온다.
● 로마의 헤라클레스
‘코모두스’는 앞 5년은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대신 뛰었고 다음 5년은 하인 ‘클레안드로스’가
해먹었다. 이게 대 로마제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도대체가 무능한 황제는 통치하는 법
을 잊었다. 영화에 나오듯이 그렇게 후딱 죽었으면 어찌 괜찮은 황제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첩과 그의 남편(침실담당 하인) 그리고 근위대장에 둘러 쌓여 살다 보니 사람 들이 다 떠났
고 원로원도 엉망진창의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냥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대회만
즐겼다. 힘만 센 이 者는 자신을 ‘헤라클레스’라고 칭했다. 사자대가리 가죽을 머리에 쓰고
(헤라클레스가 그렇게 하고 다녔다.) 낭아곤을 들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흉내 낸 동상이 발견
되었다. 그래서 歷史書도 그랬고 영화에서도 ‘아우렐리우스’의 자식이 아니고 황후가 검투사
와 私通해서 낳은 자식이라는 얘기도 생겼다. 엄마 황후나 아버지가 통곡을 할 일이었다.
● 암살
이 “꼴통 황제”는 AD192년 12월 31일 암살되었다. “참 죽기 좋은 날이네.” 우리 영화의 유행하는
대사 중 하나지만 한 해가 지는 날에 세상을 떠났으니 하는 말이다. 어처구니없이 애첩과 그 남편과
자객이 공모했는데 자객은 황제의 레슬링 코치였다. 목욕 중인 황제를 레슬링 기술로 목을 졸라 죽였다.
31살 12년 치세였다. 범행 동기는 전혀 모른다고 한다. 시신은 그냥 묻어버렸고(나중 황제묘로 이장)
원로원은 후임 황제도 정했다. 살해범 셋 다 그리스 인들인데 그날 밤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제국의 꼬락서니가 이런 상태로 흘러간다.
개차반이지만 정통성은 갖고 있던 ‘코모두스’가 후임 선정도 없이 살해되었으니 후임 황제 후보들은
치열한 경쟁과 정통성(Legitimacy) 확보가 중요했다. 원로원은 ‘코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네로, 도미티아누스에 이어 세 번째 처벌인데 누가 보아도 ‘코모두스’는 벌 받아 싸다. 뭘 한 게 있어야
이름을 지우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름을 지울 문서나 비문도 없었다고 한다.
첫댓글 " ‘코모두스’가 ‘하드리아 누스’ 흉내만 냈어도……" 직장에서도 무능하고 하는 일 없이 셍월만 보내지만, 위사람 눈치는 기막히게 잘보는 아첨꾼이 출세하고, 고지식하고 부지런하여 여기저기 부딛치는 열성분자는 찍혀서 빛을 못 보는 사람도 있고, 정말 세상 일은 수학 공식처럼 딱 부러지게 적용되지 않더라.
그런 아부형과 무능이 합친 자들이야 말로 참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위에 썼듯이 너무 나서서 자기가 다 한다든가 또는 나서서 생색내개를 좋아하는 상사를 만나면 이것 또한 골치 아픈 일이기도 하다. 내가 직장 생활 중 40대 후반에 대학 과 2년 선배가 직속 임원으로 왔었다. 그런데 그는 비교적 청렴하고 일은 열심히 하는데 자존심이 하늘 끝이고 부하들 중에는 많이 나서서 활동적인 척(?)하는 사람과 -물론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 공격적인 사람을 많이 쳐주는 상사였다. 나하고는 어쨌든 맞지 않아 결국 다른 사건을 빌미로 내가 사표를 내고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겼다. 당시 고참 부장인 내가 사표를 내서 사장이 섭섭히다고 하기는 했었다. 사람끼리 참 잘 만나기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물며 저런 대 제국을 감당할 황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