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헤르만 헷세의 '저녁구름'

[이동민]

헤르만 헷세의 ‘저녁 구름’

    나의 거실 겸 서재의 동쪽 벽에는 발코니로 통하는 좁은 문들이 있는데, 그 문들은 5월부터 9월이 꽤 깊을 때까지 열려 있다. 그 앞에는 한 걸음 너머에 반 걸음 깊이인 아주 자그마한 석재 발코니가 매달려 있다. 이 발코니는 나의 소유이다. 이 발코니 때문에 나는 몇 년 전 여기에 눌러 앉기로 작정했다. 또 이 발코니 때문에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늘 어떤 감사의 마음 같은 것을 느끼며 다시 여기 나의 태생 집으로 향하곤 했다.

 집을 아름답게 하고 사는 것, 그리고 창에서 보면 뻬어나게 아름다운, 멀리 트인 전망을 가지는 것은 일찍이 나의 자랑이자 나의 재주였다. 그렇지만 전에 내가 즐겼던 그 어느 전망도 이 곳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 대신 벽에서는 횟가루가 군데군데 떨어지고, 벽에 걸린 융단이 너덜너덜 하더라도 -여러가지 안락한 시설이 없더라도- 이 전망 때문에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발코니 앞에는 해묵은 남국의 과수원이 산기슭을 따라 가파르게 내리뻗어 있다. 우듬지가 두터운 부채 모양인 종려, 동백, 석감, 마모사, 박태기 나무 하며 완전히 참등덩굴로 덮여 버린 주목들이 늘어서 있고, 장미 넝쿨을 올린 좁은 테라스도 몇 개 있다.

 나의 세상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 이 집에 취한 듯한 해묵은 과수원이다. 또, 내려다보면 그 꼭대기가 보이는 밤나무 숲이 우거진 몇 개의 조용한 작은 계곡도 그렇다. 밤나무 숲 우듬지에서는 밤낮으로 나무파도 소리가 들리고, 저녁이면 부엉이 울음 소리가 건너온다. 이 숲은 세상으로부터 집들과 사람들 및 소음과 먼지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그러나 만큼 나는 세상을 아주 등진 것은 아니고, 또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럭저럭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아무려나 우리 마을로 올라오는 길이 하나 있다. 그 위로 매일 다니는 우편 자동차가 없더라도 좋은 편지가 온다. 안 와도 좋을 방문객을 여기로 실어다 준다. 그 중에는 가끔이나마 반가운 편지, 반가운 손님도 있다.

 현관문을 잠가두는 시간에는 세상의 어떠한 부름도 나에게 닿지 못한다. 그것은 오후의 몇 시간인데 대개은 저녁 시간까지 연장된다. 그럴때면 초인종도 없는 대문은 짐겨있다. 그러나 내가 정원의 테라스를 발 아래에 두고 나의 난장이 발코니에 앉아 있을 때 나를 방해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럴 때 나는 정원과 숲의 계곡 저 너머에 구세주의 모습이, 그리고 그 위에 자비의 성모상이 서 있는 것을 본다. 플레차의 길게 뻗친 반짝이는 지류와 코머 호 저편, 그리고 이른 봄 늦게 까지도 산 꼭대기에 눈을 이고 있는 높은 산들을 바라본다.

 가끔씩, 저녁에 그렇게 앉아서 저 건너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고지에서 떠다니고 있는 저녁 구름을 건너다보고 있을 때 나는 만족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저 밑에 내려다본이는 세상을 보며 생각한다. 누가 내게서 너를 훔쳐 가도 좋다고. 나는 이 세상에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세상에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세상도 나의 혐오에 충분히 응수를 하고 앙갚음을 하였다. 여태 살아 있으니, 세상과 싸우면서 견디어 온 셈이다. 또 성공을 거두는 공장 주인이나 공장 주인이나, 권투 선수 혹은 영화 배우는 못 되지만 열 두 살 때부터 머리에 새겨두었던 시인이 되었다. 여러 가지를 배우는 중에도 세상이라는 것에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바라지 않고, 그저 조용히, 주의 깊게 자기의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주는 게 많다. 그것은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 세상의 총아들은 알지 못하는 무엇이라는 것도 배웠다. 관망한다는 것은 탁월한 재간이다. 세상을 살면서 얻어진다. 치유력이 있고, 아주 유쾌한 재주이다.

  나는 이런 재주를 저녁 구름에서 배웠다. 저녁, 나의 시간에 이렇게 작은 발코니에 앉아 있을 때면 언제나 구름과 함께 있다. 높은 곳에 올라 앉아 있는 새둥지 같은 나의 집은 구름 한 가운데를 들여다 본다. 비가 오면, 그리고 이 지방의 특유의 거칠고 사나운 악천후에 구름들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발코니의 격자 난간에도 걸린다. 신발 속까지 기어들어 온다. 저 바깥에는 구름들이 몸부림친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푸른 산골짜기를 달리다가, 차가운 검은 호수 속으로 내닫기도 한다. 빨려들 듯이 푸른 하늘로 치솟는다.

 옛날 젊었을 때 나는 구름에 대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지녔다. 늙어가고 있는 이즈음에는 구름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전처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만큼,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가 벌써 다시 어린아이로 되어가느라고 바빠진 노인들이 것이다.

 열정이란 멋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에게 보다 잘 맞는 것은 유머요 웃음이다. 스스로가 덧없는 저녁 구름의 유희같은 존재인 것처럼 범사를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일, 세상을 비유로 변용시키는 일,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제격인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붓을 든 주제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 장마가 막 걷혀 습기는 남아 있으면서도 맑고 화창했던 어제 저녁에는 구름이 정말 굉장했다. 방금까지도 긴 층을 이루어 하늘에 가로 놓여 있던 구름이 덩어리가 되어 낮게 드리우기도 한다. 거센 바람에 날려 천처니 돌을 말리더니 모두가 한데 꼬여 점차 혼자 소리없이 일하고 있는 압연기 로울러의 현상이 되어 갔다. 방금 그렇더니 또 금세 온 하늘이 알알하고 싸늘한 녹청색 기운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리본과 쿠션으로 조직하였다가 천천히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더니, 서서히 몸체와 alfe가 불어나는 거대한 봄의 모습이 된다. 그러더니 지금 1분도 안 된 사이 한눈을 팔았더니, 하늘은 텅 비어 있고, 섬광처럼 싸늘하고 맑기만 하다. 구름은 모조리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서 못 펴고, 지평선에 꾹 눌려 있다. 위쪽은 힌빛과 황금빛이다. 때로는 새파랗게 길게 끌려 있어 흡사 비행선 같기도 하고, 고래 같기도 한 형상이 되었다. 모두 입체적으로 딴딴하게 뭉친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장밋빛과 황금빛이 보석 같은 산봉우리를 떠나자 대지는 모두 그 빛을 잃고 하늘에만 아직 날빛이 남아 잠시 빛나고 있었다. 그름배들은 센 바람이 부는대도 겉으로 봐서는 꼼짝하지 않고 엉거주춤 산등성이 바로 윙에 정박해 있어서 차거워져 가는 그들의 색깔에 아직은 빨강과 구릿빛 갈색이 조금 섞여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들을 그때 그때 알아보려면, 맞바람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구름을 놓치자 말고 잘 보고 있어야만 했다. 구름들이 딱딱하고 굼떠서 미동도 하지 않을 듯이 보이는 동안에도 실은 그들의 형태가 줄곧 안에서 겉으로 혹은 속에서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름은 겉으로는 독실한 척 하지만 일과가 끝나고 나서 하는 장난짓거리는 다 했던 것이다. 마치 학교 담에 붙어 서 있는데 선생님께서 지나가시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미처 돌아보실 겨를도 없이 달아나 버려, 보이지 않고 담장 너머에서 왁자한 웃음소리만 어지럽게 들려오는 그런 소년들처럼.

 그런데 그 사이 길다란 구름들 중의 하나가 다른 구름들 위로 헤엄쳐 올라가, 녹색 하늘 속에서 저 혼자 장밋빛으로 떠돌다가 갑자기 송두리째 밝은 붉은 색으로 활활 타오르면ㅅ너 아주 예쁜 고기 모양이 되어 갔다. 빛을 내는 한 마리 거대한 금붕어가 푸르스름한 작은 지느러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웃으며 더 없이 즐거워하며 죽음을 향하여 빛이 마지막으로 스러져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의 금붕어는 살아 있을 시간이 없어져 버렸다.

 벌써 꼬리 쪽에서는 점점 갈색이 짙어져 무거워 오고 배 쪽은 더 파래지고, 벌써 그 밝은 빨간색과 황금빛은 등허리 맨 위 가장자리에서만 불타고 있었다.

 그래 금붕어는 번개같이 꼬리를 오그라뜨리고 머리를 부풀려 아주 동그랗게 되어 버렸다.

 그러더니 빛이 스러지고 마지막 황금빛도 잃어버리게 되는 동안 금붕어는 돌돌 뭉쳐 단단해지더니 그 공에서 — 마치 혼을 다 뿜어 내어 놓으려는 듯이 — 잿빛 베일의 두 가닥을 뿜어 내었다.

 뿜어내고 또 뿜어내다가 흩날리면서, 점점 엷어져 가는 베일 속에 풀려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직 그렇게 재미있는 종류의 자살을 본 적이 없었다. 이 금붕어 녀석들은 덩어리로 뭉쳐지자 그 자신의 혼을, 그 자신의 실체를 저 혼자의 힘으로써 입으로, 아가미로, 숨구멍으로 뿜어 내었고 저 자신도 비실체 속으로 뿜어내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일찍이 내가 저 아래,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 나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했을 때, 나는 여러 가지를 체험했었고, 이해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것도 함께 많이 보아 왔었다. --- 그러나 물고기의 처신에서 본 그토록 아련한 무엇, 그토록 아기의 장난기가 섞인 무엇인가를 어느 사람이나 민족, 의회 같은 곳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내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시절 저 바깥 세상에서 본 것도 적지는 않았다.

 금붕어는 떠났다. 그리고 오늘 누린 나의 기쁨도 사라졌다. 안에서는 아주 아름답고 좋은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나는 또 한 시간을 나의 금붕어와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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