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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상행 중에 어느 산사의 화장실에서 급한 볼일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화장실 입구에 써 붙인 해우소란 간판을 보고 매우 의미 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 곳 화장실에서 손을 씻거나 몸단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출발 당시부터 속이 몹시 거북하여 절에 이르기까지 불안했었는데, 그 근심 덩어리를 그 곳 해우소에서 참으로 시원스레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생리적 욕구를 해결한 연후에 내가 더욱 편안한 심정으로 산과 절의 분위기에 젖어 들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호칭이 얼마나 적절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근심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망우는 죽어서나 가능한 일이지만(망우리는 공동묘지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근심을 풀어 버린다는 '해우'는 산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자연적인 배설 행위인 것이다.
인간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이 좁은 공간을 일러 화장실이란 신선하고 사치스런 호칭을 붙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57년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에도 화장실은 단지 화장하는 곳으로만 되어 있지 변소의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또한 변소란 호칭도 개화기 이후 생긴 것으로, 그 이전에는 뒷간이란 고유어가 쓰이고 있었다.
여기서 뒷간의 '뒤'는 흔히 앞뒤의 뒤의 뜻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실은 사람의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로, 흔히 "뒤를 보다."라고 하면 배설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뒷간은 홀은 한자어로 측간으로도 불리었는데, 한자(?)는 본음이 '측'이나 때로 '치' 또는 '칙'으로도 읽히기 때문에 요즘도 지역에 따라 치간, 칙간, 측간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뒷간 곧 변소란 이름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구시(세), 돗통, 동세, 드내실, 복간, 빈소, 서각, 자근집, 잿간, 정나, 통시, 헛간, 치깐 등 약 100여 개의 방언을 갖고 있다. 방언뿐만 아니다. 작은집, 향수다방, 홀로다방, 자연의 집, 명상의 집 따위의 은어는 더욱 다채롭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 원인은 이곳이 과히 향기로운 곳이 못되며, 옷을 벗고 배설 행위를 하는 곳이라 이를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그 명칭조차 꺼렸기 대문으로 보인다.
한때 화장실의 이름을 영어의 W.C.로 대신한 적이 있었다. W.C.란 Water Closet의 약자로 수세식 변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시골의 재래식 뒷간에도 W.C. 간판을 써 붙였으니, 이는 일종의 은어나 금기어로서 그 의미보다는 기호의 표시로 쓰인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위싱톤 광장이니 윈스톤처어칠, 웰컴과 간은 많은 은어를 낳게 하였다.
대소변을 칭하는 우리말에는 본래 '말'(고대어 표기로는 ' ')과 앞서 말한 '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대소변이 마렵다고 하는데, 이 '마렵다'가 고대어 '말'의 흔적이다. 또한 옛날 궁중에서 대변을 '매우'라고 했는데 이 역시 '말'과 관계 있는 어사라 생각된다. 매우는 한자를 붙여 梅雨로 쓰는데 여기서 임금이 쓰시던 이동식 변기인 '매화들'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곧 한자어 梅雨桶의 '梅'가 매화이며, 또한 전라도 속어에 "똥싸고 매화타령한다."라는 말에서 매우가 매화로 전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말'이나 '뒤'가 대소변을 칭하는 높인말로 쓰인 반면 똥(고어 표기로는 )이나 오줌(고어로는 오좀)은 이보다 낮은말 (하대어)로 쓰인 듯하다. 배설 행위를 일컬어 말, 뒤, 변은 말보다, 뒤보다, 변보다와 같이 '보다'라는 접사가 붙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소변만을 따로 일컫는 소마, 소피, 소수 역시 오줌의 높임말로 '보다'라는 말이 접사로 붙는 것이다.
언어란 시대에 따라 또는 사회·문화의 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뒷간 또는 측간이 변소로 변하고, 이 변소가 WC로, WC가 다시 화장실로 변화하였다. 흑자에 따라서는 이 변화를 발전이라고 볼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뒷간 또는 변소라고 하면 왠지 구린 냄새가 나고, 화장실이라 하면 비누나 향수 냄새가 나는 듯한 인상을 갖고 있는 한 것은 발전임엔 틀림이 없다.
이젠 화장실은 말 그대로 화장(단장 또는 분장)만 하는 방이 아니라 대소변을 보는 변소의 명칭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굳이 옛말을 쓰자고 주장할 수 없음은 사실이나 다만 할아버님의 기침 소리가 밴 뒷간이란 이름이 그야말로 뒷전으로 밀려남이 아쉬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