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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던 고갱이 다툼 끝에 파리로 돌아가버린 크리스마스이브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 휴지에 싸서 한 여인에게 선물로 준다. 고흐는 결국 동네에서 쫓겨나 생레미 정신요양원으로 이송된다. 고흐가 귀를 치료했던 아를 시립병원 2층에서 그는 정원을 그렸다. 지금은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기념관이 된 이곳에서 정원의 분수와 꽃밭, 노란색 기둥을 쳐다보며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아를에서 차로 30분 정도 가면 생레미 정신요양병원이었던 생폴드모솔 수도원이 나온다. 고흐는 이곳에서 1년 동안 머물렀는데, 아침에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렸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밤하늘의 별빛이 파도처럼 흘러가는 그림이다. 정원에는 고흐가 병원에서 그린 그림을 보며 산책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중엔 고흐가 동생 테오 부부가 조카를 낳았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렸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도 있다. 생명력이 넘치는 봄날의 프로방스 풍경이 담겨 있었다.
●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닮은 미술관
요즘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가장 뜨거운 관심은 2021년 6월 개관한 ‘루마 아를’ 뮤지엄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었던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신작이다. 외벽에 1만1000개의 알루미늄 패널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4개의 은빛탑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하늘로 솟아올라 간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 속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타오르고 있다. 금속 패널 군데군데 창문 모양의 유리박스 56개가 달려 있다.
외벽은 햇빛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면모하는데, 특히 밤에 조명이 들어오면 환상적이다. 건물의 푸르스름한 외관은 고흐의 그림 속 밤하늘이 되고, 오렌지색 조명이 들어온 창문은 맴도는 별빛이 된다. 아랫부분 원통 모양의 유리 건물인 드럼(Drum)은 아를의 로마 원형경기장을 모티브로 했다.
이곳은 1938년부터 프랑스의 국영철도회사(SNCF)가 소유하던 철도 보관소였는데, 현재는 정원과 전시공간, 예술가 작업실, 호텔, 카페 등이 지어졌다. 루마 아를 내부 로비에는 2층에서 1층까지 내려올 수 있는 미끄럼틀이 있다. 작가 카르슈텐 횔러의 작품으로, 자칫 엄숙해질 수 있는 박물관에서 웃음을 주는 장치다.
루마 아를 9층 테라스에는 프로방스산맥과 론강, 습지를 볼 수 있는 파노라믹 뷰가 펼쳐진다. 1층 로비에 있는 ‘드럼 카페(Drum Cafe)’에서는 동서양의 퓨전음식을 즐길 수 있는데, 천장에 빨강 초록 노랑 등 각종 배관이 노출돼 있다. 파리의 퐁피두센터 외관을 보는 듯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아를 이우환 미술관 1층에 전시된 돌과 철로 된 ‘관계항’ 작품.
아를 시내에 2022년 4월에 문을 연 ‘이우환 미술관’도 핫플레이스다. 일본 나오시마,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어 아를에 세 번째로 지어진 이 화백의 세 번째 작품 전시공간이다. 16∼18세기 3층 대저택 ‘오텔 베르농(Hotel de Vernon)’을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미술관 1층과 야외 테라스에는 돌과 철로 구성된 ‘관계항(Relatum)’ 작품 10점이 설치돼 있고, 2층에는 점과 선으로 이뤄진 회화 작품 30점이 전시돼 있다. ‘점 하나 찍으면 1억 원’으로 불리는 이 화백의 대형 작품을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이곳에는 이 화백의 친구인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82)의 콘크리트 작품도 있다.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어두운 공간의 끝까지 들어가면 발밑에 하늘이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세잔의 아틀리에. 세잔이 그렸던 사과와 정물이 그대로 놓여 있다.
아를이 고흐가 사랑한 도시였다면, 엑상프로방스는 폴 세잔(1839∼1906)의 도시다. 도심 북쪽 고지대인 로브 언덕에는 세잔이 죽기 직전까지 사과를 그리던 아틀리에(Atelier Cézanne)이 있다.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작업실 가운데의 테이블에는 세잔 그림 속 사과와 물병, 접시가 지금도 그대로 놓여 있다. 또한 세잔이 입었던 물감 묻은 작업복과 모자, 석고상과 해골, 이젤과 팔레트, 모네와 주고받은 편지 등이 놓여 있다. 구석구석 세잔의 숨결이 느껴져 지금이라도 한쪽 문을 열고 세잔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세잔의 아틀리에 뒤쪽 언덕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화가들의 땅(Terrain des peintre)’이 나온다. 세잔이 사과와 함께 죽기 직전까지 그렸던 생트빅투아르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지점이다. 세잔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뾰족한 산과 삼각형, 네모꼴 모양의 집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세잔처럼 수첩을 꺼내 생트빅투아르산을 펜으로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칠하고 있는 관광객들의 입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가볼 만한 곳=프로방스의 대표적인 농산물은 올리브다. 아를에 있는 ‘마리위스 파브르(Marius Fabre)’는 1900년부터 4대째 천연 올리브 오일과 카마르그 습지의 소금 등 천연재료만으로 만드는 마르세유 비누의 명가다. 피부에 좋은 프로방스 전통 수제비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로마 원형경기장 옆 레스칼라두(L’escaladou) 레스토랑에서는 부야베스(bouillabaisse)를 맛볼 수 있다. 지중해에서 잡은 생선에 양념을 넣어 끓인 수프에 우선 빵을 찍어 먹다 보면, 테이블에서 직접 뼈를 발라 접시에 담아준다. 40년째 엄마와 딸로 이어지는 손맛은 비린 느낌 하나 없는 프로방스 전통 생선요리를 맛보게 해준다. |
아를·엑상프로방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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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기자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raphy@donga.com
도시라는 정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도시를 산책하고 탐사하는 즐거움을 함께합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건축물로 재탄생[전승훈의 아트로드]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에 문을 연 이우환 미술관[전승훈의 아트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