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시간. 인간의 시간[제3편]
강정의 시들에는 우리 안에 얼어붙어 있는 수성(性)이 있다. 수성은 껍질과 가죽을 찢고 나오는 동물 내부의 날카로움이다. 동물은 대상을 잡고 삼키기 위해 공격한다. 공격하기 전에 공격할 대상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대상을 쫓아 달리는 게 동물이다. 동물은 먹잇감을 포획하고 그 살을 찢어 먹는다. 동물의 공격성은 본성의 일부다. 이를테면, “나는 태양과 싸우는 고아/봄의 목전부터 벌써 가을 저녁 빛이 그립다/타오르기도 전에 꺼져가는/핏빛 난리의 뒤편을 보고 싶은 것이다/육식하는 새들이 오래 쪼다가/한 뒷박 엎질러놓은 사람의 내장으로/천지를 다시 발라보고 싶은 거다/뚝뚝 제 몸을 쪼개 강물 위에 써놓은/볕의 마른자리에서/흙속에 묻힌 아이의 유골을 파헤치며/처녀의 눈물로 사라진/여름의 자궁을 헤집고 싶어라”(「미스터 크로우) 같은 구절에서 수성의 징후는 물씬하다. 핏빛 난리, 육식, 내장, 몸, 유골, 자궁 따위 명사는 말할 것도 없고, 쪼다, 쪼개다, 발라보다, 파헤치다, 헤집다 따위 동사는 ‘동물적인 것’ 말고는 떠올릴 게 없다. 동물적인 것의 응집으로서 그 수성이 아무리 징그럽다 해도 동물은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안에 숨은 동물성의 발견은 동물과의 구조적 동형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동물-되기에 더 가깝다. 동물-되기란 무엇인가? 이진경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해설하는 책 『노마디즘』에서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와 힘을 나의 신체에 부여하는 것”, “어떤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적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바꾸고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내 그 동물의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고양이의 발톱, 독수리의 눈, 늑대의 이빨, 두더지의 앞발 등등의 동물 기관을 모방해서 제 신체기관의 양태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수영을 하면서 개구리의 영법을 쓰고, 권투 선수는 벌이 쏘듯 재빠르게 상대에게 잽을 날리고, 무예에 통달한 사람은 사마귀 같은 자세로 상대에게 타격을 입힌다. 동물-되기는 동물의 신체적 감응으로 내 몸을 감염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를 잠시 여민 채
세상 그늘진 곳에서
순간을 영원 삼아 쉬어가던 몸
잠든 털 올들 사이
부대끼는 바람결에 꽃을 매달고 울대를 움켜쥔 이것은
제 살을 쥐어뜯는 몽매 같기도,
더 큰 울음을 내성케 하는 먼 과거의 엄명 같기도 하다
나는 응당 그래야 하는 심장의 지령에 따라
사위를 둘러본다
다만, 갑자기 어두울 뿐이다
이제, 몸안의 빛을 꺼내 나를 죽이고
죽인 나를 채찍질해 몸의 이끌림에 투신해야 할 때,
숨겼던 발톱과 이빨이 저만의 생기를 시위라도 하듯
점점 끄무러져가는 노을 아래 더 붉은 촉광으로 망막의 혈기를 끌어올리고
위장은 무슨 쓰다 만 비문(碑文)처럼 정직하게 비어간다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나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이
이토록 뜨겁게 부딪친 적 또 있었을까
-강정, 「호랑이 감정」 부분
시에 동물들이 나올 때 대개 동물 생태보다는 동물에 빙의된 자아의 감응들을 보여준다. 강정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집 『귀신』(2014)에는 동물 시편으로 「호랑이 감정」과 「사슴의 뜨거운 맹점」을 꼽을 만한데, 이들 시편이 ‘호랑이’와 ‘사슴’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 안의 추상과 상상, 혹은 동물이 아니라 동물적인 것이다. ‘동물성’은 우리 안의 바깥이다. 이때 안과 바깥은 서로를 비춘다. 그러니까 동물은 우리 자아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인 셈이다. 이를테면 사슴의 뜨거운 맹점에서 “사슴은 오래도록 불탄다”라는 구절은 사슴의 생태와 실재와는 무관한 시인의 판타지를 보여준다. 사슴은 “목이 말라 어둠 저편의 물길을 찾는 소리”와 짝을 이루는 어떤 사유의 표상이거나, 삶의 탕진을 암시하는 기미(機微)로서의 자연이다.
보르헤스의 「호랑이들의 황금」이 외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면, 「호랑이 감정」은 내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꿈인지 생시인지/내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혼돈”에 빠진 자의 시선이다. 사람-짐승의 시선으로 자기 내부를 훑어가는데, 이때 이 내부는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호랑이 감정”에 빠진 자의 내부다. 자기 관찰자의 시선이 훑어내는 것은 “호탕과 소심”의 사이, 혹은 “참음과 굶주림”을 헤쳐 돌아온 지점이다. 그 사이 몸의 성분적 요소는 호랑이의 강밀도로 바뀌어 감응한다. 호랑이는 “호랑이 감정”이라는 강밀도를 가로질러서 온다. 이 호랑이는 정확하게 ‘몽매’와 ‘내성’ 사이에 위치한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가 가리키는 것은 호랑이의 외관이다. 외관이 사물 안쪽의 형질을 반영한다면, 안쪽은 사물 외관을 결정한다. ‘나’는 호랑이의 골격과 무늬를 뒤집어쓴 채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호랑이-되기란 무엇인가. 이것은 야생동물의 본성과 생태를 흉내내고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몽상 안에서 호랑이를 살아내는 것이다. 또한 “자기 삶을 꽁꽁 싸맨 언어에서 벗어”남이고, 그 방편으로 시, 종교, 자연 세계에 빠져듦이다. 그 결과로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 즉 사냥 본성을 풀무질하며 제 안에 은닉한 발톱과 이빨들을 드러낸다. 이것은 새로운 내면의 생성이다. 이 시의 대담성은 자기 안을 쪼개고 그 틈에 숨은 동물성을 드러내면서 ‘침묵의 시’들을 불러낸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