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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과 계발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로 만들어져서 혼동해 쓰는 대표적인 낱말을 살펴보자.
먼저 개발(開發)과 계발(啓發)이 있다. 개발은 '개척하여 발전시킴'을, 계발은 '지능,정신 따위를 깨우쳐 열어 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발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물리적으로 무엇을 '이루러 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광산이나 유전을 개발하다' '신도시를 개발하다'로 쓴다. 이와 달리 계발은 인간의 지적·정신적 능력에 관계된 것으로 '이끌어 냄'을 의미한다. 새롭게 개척해 발전시킨다는 의미가 아닌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을 찾아내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소질을 계발하다' '지능을 계발하다'가 그 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의 내면에 관계된 것이라고 해서 모두 '계발'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습'이라는 인위적 방법을 통해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은 '이끌어 냄'보다는 '이루어 냄'에 가까우므로 '능력 개발'로 써야 한다.
◆ 갱신과 경신
다음으로 갱신(更新)과 경신(更新). '更'은 고친다는 뜻으로는 '경'으로, 다시라는 뜻으로는 '갱'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경신'은 '고쳐서 새롭게 함'을 뜻하고 '갱신'을 '다시 새롭게 함'을 이르는 말이다.
가령 주민등록증을 분실해 단순히 새로 발급 받을 때는 '갱신'을, 이름을 바꿔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때는 '경신'을 써야 한다.
◆ 주관과 주최
주관(主管)과 주최(主催)를 구별할 때는, 전자는 '어떤 일 또는 행사를 계획하고 최종 결정하며 이에 따르는 책임을 질 때' 쓰면 된다. 문화체육부가 '××사이클 대회'를 계획, 최종적인 책임을 지고 대한사이클연맹이 홍보 및 시상식 등 실무적인 일을 맡았을 경우, 전자는 '주최'고 후자는 '주관'이 된다.
◆ 껍질과 껍데기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한 번쯤 흥얼거렸던 귀에 익은 노랫말이다. "귤 껍데기가 너무 두꺼워서 맛이 없겠는데…좀 깎아줘요" 제철을 맞은 귤을 사는 주부들의 흥정이 정겹게 들리다. 하지만 위 예문은 어딘가 어색하다. 왜일까. 바로 '껍질'과 '껍데기'의 쓰임새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껍질과 껍데기는 그 뜻이 서로 다르다. 먼저 '껍질'은 '물체의 거죽을 싸고 있는 딱딱하지 않을 물질의 켜'를 뜻한다. 예를 들어 귤껍질, 바나나 껍질, 사과 껍질 등을 가르킬 때 쓰는 말이다. 이와 달리 '껍데기'는 '달걀, 조개 따위의 속을 사고 있는 단단한 물질'을 이르는 말로 조개 껍데기, 소라 껍데기 등이 바른 용례다.
또 '껍데기'는 '알맹이는 빼내고 겉에 남은 것'이란 뜻도 갖고 있다. 그 예는 '요 껍데기' '이불껍데기' 등이다. 따라서 위 예문을 바로 잡으면 '조개 껍데기 묶어…', "귤 껍질이 너무 두꺼운데…"가 된다.
◆ 다르다와 '틀리다'
일상의 대화에서 무심코 쓰는 말을 듣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다르다'를 써야 할 자리에 '틀리다'를 쓰는 경우가 많다. '틀리다'는 '사실이나 이치, 계산 따위가 맞지 않다', 마음이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고 비뚤어 지다.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고 어그러지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다. '틀리다'는 예를 들어 이치, 계산, 사실, 기준 따위에 어긋나거나 맞지 않을 때 쓰인다. '합계가 틀렸는데요(계산)/틀린 답만 골라 내시오(사실)/하는 짓이 틀렸는 걸(기준)/틀린 까닭을 말하시오(이치); 등이 그 예다.
또 '틀리다'는 일정한 기대(기준)에 맞지 않거나 일이 순조롭지 않고 어그러졌을 때, 감정이나 사이가 나빠졌을 때 쓰인다. '성공하기는 틀렸어/사소한 일로 친구와 틀렸어/ 심보가 틀렸어' 등으로 표현된다. 한편 '다르다'는 '같지 않다. 차이가 있다'를 뜻하는 형용사다. '다르다'는 우선 비교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않을 때 쓰인다. '그들은 형제지만 생김새나 마음씨나 행동이 전혀 다르다'가 그 용례다. 또 '다르다'는 보통의 것과는 다르거나 특출할 때 쓰인다. '역시 기술자라 다르군/행각하는게 다른데' 등이 그 예다.
두 단어는 이렇게 뜻도 다르고 품사도 다르다. 그런데도 심지어 아나운서 출신의 사회자들조차 "역시 신세대는 기성세대와 사고 방식이 틀리군요"와 같은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 "거기에 다른 사람도 있었니?"라는 문장에서 '다른'은 맞는 말일까? '딴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딴'은 타인의 뜻이고 '다른'은 '성질이 다른'이라든가 '얼굴이 다른'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로 한자로 표시하면 '異'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딴'은 관형사이고 '他'의 뜻이며 '다른'은 형용사이고 '異'의 뜻이다.
◆ 들치다와 들추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그 뜻이 비슷해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다음 예문들을 보자. "독거노인을 돌본 장본인이 누구지?" "구두 닦는 김씨가 주인공이래" "어제 집에 가다 취객에게 곤혹을 당해 차까지 놓쳐 곤욕스러웠다네" "무리하게 사업을 벌리다 망했다는군" "이불을 끝을 들추니까 방구 냄새가 나네" 첫 번째 예문은 긍정 가치어와 부정 가치어를 구분하지 못한 경우다. 주인공은 이야기의 중심인물을 가리키는 단어로 대체로 긍정적인 사실에서 쓰이며 장본인은 못된 일을 빚어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면 '미담의 주인공' '사기 사건의 장본인'으로 쓰면 된다.
두 번째 예문에서 곤욕은 '참기 어려운 심한 모욕'을 뜻하고 곤혹은 '곤란한 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모름'을 가리킨다. 대체로 곤욕은 '∼을 당하다'로 쓰이며 곤혹은 '∼스럽다'로 활용된다. 따라서 위 예문은 "어제 집을 가다 취객에게 곤욕을 당해 차까지 놓쳐 곤혹스러웠다네"로 고쳐 써야 맞다.
벌이다와 벌리다도 뜻만 구별하면 된다. 벌이다는 '사업을 벌이다. 일을 벌이다'처럼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실행에 옮길 때 쓰며 벌리다는 '팔을 벌리다, 밤송이를 벌리다'처럼 간격을 넓히는 경우에 쓰면 된다. 또 벌이다는 '물건을 늘어놓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무들을 좌판에 벌여(-이어_(농아)라" '좌판에 벌인(-여 놓은) 무들' 등으로 쓰인다.
들추다와 들치다는 좀 더 어렵다. 들추다는 '책을 들추어보다'처럼 무엇을 뒤지거나 '과거를 들추다'처럼 잊은 일 지난 일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와 달리 들치다는 '물건의 한쪽 끝을 쳐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불끝을 들치다'가 그 예다. 그러나 들치다는 들추다와 그뜻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들추다는 위의 뜻 외에도 '속이 드러나게 들어올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들치다에 '이불 끝을 들치다'라는 예문이 실려 있고 들추다에는 '이불을 들추다'라는 예문이 있다. 결국 이 예문들만 놓고 보면 어떤 물건을 완전히 들어 올려 속을 드러내는 상황이면 들추다, 한쪽 끝만 살짝 들어올리는 것이면 들치다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부분은 학자들간의 논의와 합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 띠다, 띄다, 떼다
"눈에 띠는 행동을 하지 마라" "선거도 끝났으니까 벽보 띠러 가자" "그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갔다" 위의 예문처럼 사람들은 '띠다' '띄다' 떼다'의 뜻을 혼동하여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법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띠다는 '어떤 성질이나 특성, 감정, 표정을 갖다' '직책 등을 맡아 지니다'는 뜻으로 많이 활용된다. 예를 들면 '미소를 띠다/하늘이 붉은색을 띠다/그는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파견됐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띄다는 크게 '특별해서 또는 없던 것이 생겨서 눈에 보이다'는 뜻의 자동사 '뜨이다'와 '편지를 부치다'는 뜻의 타동사 '띄우다', '공간이나 시간을 뜨게 하다'는 뜻의 사동사 '띄우다'의 준말이다. 활용 사례를 들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선생님께 편지를 띄어 소식을 알려야지/알맞게 띄어 써야 읽기 쉽다' 등이다.
떼다는 '붙어 있는 것을 떨어지게 하다' '이제까지 해 오던 일을 그만 두거나 고쳐서 그만 두다' '걸음을 옮기다' '전체에서 일부분을 제하다' '한정된 양을 전부 배우거나 읽혀 끝을 맺다'는 뜻을 지닌다. 예를 들면 우표를 떼다/젖을 떼다/걸음을 떼다/외상값을 월급에서 떼다/천자문을 떼다 등이 그 쓰임새다. 위 예문도 이와 같은 단어의 내용을 잘 숙지하면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다' '자신이 차지할 것이 틀림없다'라는 뜻으로 '떼 놓은(논) 당상'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도 '따 놓은(논) 당상'이라고 잘못 쓰는 일이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 맞추다, 맞추다, 맞히다
"새 양복을 한 벌 입고 싶은데 이왕이면 맞춤전문 양복점에서 맞춰야지" "기성복도 좋은데 뭘 맞추려고 하나"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는 옷을 '마추다'가 맞는 지 '맞추다'가 맞는 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맞추다'와 '마추다'를 혼동하는 것은 두 말이 과거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한글 맞춤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서로 일치하도록 하다' '결합하다' '정도에 알맞게 하다' 등의 뜻으로 '맞추다'가 쓰였고 '주문하다'의 뜻으로 '마추다'가 쓰였다. 그러나 맞춤법을 개정하면서 '주문하다'도 '맞추다'와 '맞춤'으로 표기하도록 통일됐다. 다시 말해 '맞추다'란 동사는 옷이나 음식 따위를 주문대로 만들어 주는 것'도 함께 뜻하게 된 것이다.
'맞추다'의 용례를 들면 '나사를 맞추다/정답을 맞추다/구두를 맞추다/맞춤 와이셔츠'등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정답을 맞추다'는 '답을 알아 맞히다'와는 반드시 구별해 써야 한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보고 정답을 맞춰 보다'처럼 둘을 비교해 정답을 확인할 때는 '맞추다'를 쓰지만 '퀴즈를 맞히다'처럼 어떤 질문에 대해 바른 답을 하는 경우는 '맞히다'를 쓴다.
한편 사람들은 '맞추다'와 관련해 흔히 "내가 돌로 새를 맞췄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동사 '맞히다'를 써야 한다. 이 때 '맞히다'는 '목표를 맞게 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바른 용례는 '총으로 새를 맞히다(맞혔다)/돌로 사람을 맞히다(맞혔다)' 등이다. 또 '눈, 비, 매, 침, 도둑 등을 맞게 하다'는 뜻으로도 '맞히다'를 쓴다. '부주의하여 비를 맞다(맞히다)/도둑을 맞다(맞히다)'가 그 예다.
◆ 빨리 와 '일찍'
5시 'XX식당'에서 갖기로 한 회식자리. 약속 시간이 돼 가면서 하나 둘 동료교사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이런 인사말을 나눈다. "김 선생, 빨리 왔네. 네 시 반밖에 안됐는데" "어이, 이 선생도 빨리 왔군. 나도 늦을까봐 집에서 일찍 출발했지" "다들 빨리 왔군. 나도 학교에서 먼저 나왔더니 일찍 왔어" 그러나 위 대화 중에는 잘못 쓰인 말이 있다.
가만 살펴보면 '일찍'과 '빨리'가 같은 상황을 두고 혼란스럽게 쓰여짐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일찍'과 '빨리'를 모두 '이르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5시가 약속 시간인데 4시30분에 왔다면 "빨리 왔네" "일찍 왔네"를 모두 쓰는 예가 많다.
그러나 '빨리'와 '일찍'은 그 뜻이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다. 예를 들면, 걸어서 한 시간 걸릴 거리를 뛰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해 30분만에 왔다면 '빨리'온 것이지만 '이르게' 떠나서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왔다면 '일찍' 왔다고 해야 맞다. '일찍'이나 '이르다'는 시각의 앞을 가리키고 '빨리'나 '빠르다'는 시간의 길이를 가르킨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러므로 '이르다'의 반대말은 '늦다'이고 '빠르다'의 반대말은 '느리다'가 된다.
그러므로 위 대화는 "김 선생, 일찍 왔네. 네 시 반 밖에 안됐는데 " "어이, 이 선생도 일찍 왔군" "다들 일찍 왔군. 나도 학교에서 먼저 나왔더니 일찍 왔어"로 써야 맞다. 또 사람들은 갑자기 날씨가 서늘해지면 "가을이 참 빨리 왔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가을이 참 일찍 왔군"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 않 과 '안'
사람들 중에는 더러 '않 가다, 않 하다'또는 '가지 안다, 먹지 안다' 등으로 잘못 쓰는 일이 있다.
'않다'는 동사나 형용사 아래에 붙어 부정의 뜻을 더하는 보조용언 '아니하다'의 준말이다. '영수가 하지 않았다, 순미는 예쁘지 않다'에서 '않'은 '하다와 '예쁘다'에 덧붙어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서술어를 구성할 때 쓰인다.
이와 달리 '안'은 동사나 형용사 앞에 붙어 부정 또는 반대의 뜻은 나타내는 부사로 '아니'의 준말이다. '안 먹는다. 안 어울린다'처럼 서술어를 꾸미는 구실을 할 때에는 '안'을 쓰면 된다. 둘을 좀 더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그 말을 빼도 완전한 문장이 되는가'를 살피면 된다. '너는 (안) 예쁘다'너는 예쁘지 (않)다'처럼 괄호 안의 말을 빼도 말이 되는 자리에는 '안'을, 말이 안되는 자리에는 '않'을 쓴다.
◆ 어쭙잖다와 '어줍다'
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어줍잖게 아는 척하네"
② "어줍잖은 솜씨로 뭘 하니"
사람들은 보통 '분수에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①), 또 '서툴고 부자연스럽다'는 의미로(②), '어줍잖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어줍잖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 비표준어로 두 경우 모두 쓸 수 없다. 그 대신 '어줍다'와 '어쭙잖다'를 잘 구별해서 써야 한다. '어줍다'는 '말이나 행동 몸가짐이 둔해 보이고 부자연스럽다' '손에 익지 않아 서투르다' '근육이 저려서 제대로 놀리지 못하다'는 뜻의 형용사다. 따라서 흔히 '서투르거나 부자연스럽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는 '어줍잖다'가 아닌 '어줍다'는 말을 써야 한다. '몸가짐이 어줍다' '솜씨가 어줍다' 등이 그 예다.
이와 달리 '어쭙지않다'는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하므로 비웃을 만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다. '어쭙지않다'는 준말인 '어쭙잖다'로 보통 쓰인다. 바른 용례는 '어쭙잖은 인사를 차리다' '한 사람의 어쭙잖은 실수로 계획을 망쳤다' 등이다.
◆ '오' 와 '요'
어미 '-오'와 '-요'는 3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혼동을 피할 수 있다.
그 중 첫째는 종결형에서는 '-오'로 연결형에서는 '-요'로 적는다는 원칙. '이것은 책이오.' '그쪽으로 가시오.'처럼 종결형에서는 '-오'를, '이것은 책이요, 저것은 연필이다'처럼 연결형에서는 '-요'를 쓴다.
두 번째 원칙은 '-십시오' 형태에서는 항상 '-오'로 적는다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가 그 예다.
마지막으로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의 경우에는 문장의 끝에서 '-요'로 쓴다. 이때의 '-요'는 위에서 살펴본 연결형 어미 '-요'가 아니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아주세요'에서 '-요'는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이와 관련 서술어 '아니오'와 감탄사 '아니요'도 잘 구별해서 써야 한다. "숙제 다했니?" "아니요, 조금 남았어요"에서 '아니요'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쓰인 경우다. 이와 달리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오"에서 '아니오'는 서술어로 쓰인 경우다.
◆ 왠지 와 '웬일'
"오늘은 웬지 눈을 보고 싶다" "사장님, 어제 왠 사람이 왔었습니다" '왠'과 '웬'은 발음이 비슷해서 그 쓰임이 자주 헷갈리는 말이다. 위 예문도 '왠'을 써야 할 자리에 '왠'을 써야 할 자리에 '웬'을, '웬'을 써야 할 자리에 '왠'이 쓰인 경우다.
두 말의 뜻을 잘 이해해야 구별해 쓸 수 있다.
왠지는 '왜(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의 뜻을 가진 부사다. 부사 '왜'와 어미'遁지'가 결합한 꼴이다. 반면 '웬'은 관형사로서 그 뜻은 '어떠한, 어찌 된'이다. 왠과는 분명한 의미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품사가 관형사이므로 여러 명사 앞에 두루 쓰인다. "웬 차가 이리 많으니?" "이게 웬 떡이냐?" "저 사람이 오늘 웬일이지" "언덕에 웬 나무가 한 그루 있었어" 가 그 예다.
웬이 명사 앞에 쓰일 때는 띄어 쓴다. 단 웬+일은 두 낱말이 붙어서 별도의 합성어, 즉 독립된 명사가 된 경우여서 붙여 쓴다. 위 예문을 고쳐 쓰면 "오늘은 왠지 눈을 보고 싶다" "사장님, 어제 웬 사람이 왔었습니다"가 된다.
◆ 일절과 일체
"오늘은 어디서 밥을 먹지" "요 앞 가게 어때. 먹고 싶은 건 일절 있던걸" "그럴까. 요즘은 일체 입맛이 없어서…" 사람들은 흔히 일절과 일체를 혼동해서 쓴다. 그도 그럴 것이 음식점이나 문방구 등을 둘러보다 보면 '안주 일절' '사무용품 일절' 등의 말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절과 일체는 그 의미가 전혀 달라 구별해 써야 한다.
일절은 사물을 부인 또는 금지할 때 쓰는 부사로 '도무지' '전혀' '아무 것도'의 뜻을 갖는다. 예를 들면 '수업 시간 중에 잡담을 일절 금하다' '범행 사실을 일절 부인하다' '일절 소식이 없다'가 바른 쓰임새다.
반면 일체는 일절과는 반대로 긍정적인 표현에 쓰인다. 일체는 '모든 것' '모든 사물'을 뜻하는 관형사로, 그리고 '통틀어' '모두'를 뜻하는 부사로 쓰인다. 바른 용례는 '필요한 것 일체를 다 갖추다' '일체 비용을 다 책임지다' '회사 운영을 일체 너에게 맡긴다' 등이다. 위의 예문도 이런 원칙에 따라 "요 앞 가게 어때 먹고 싶은 건 일체 있던 걸" "그럴까. 요즘은 일절 입맛이 없어서…"로 고쳐 써야 한다.
◆ 한번 과 '한 번'등
소홀히 생각하는 띄어쓰기 사례를 살펴보자.
'한번'과 '한 번'='번'이 차례나 일의 횟수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로 쓰일 때는 '한 번' '두 번'처럼 띄어 쓴다. 그러나 '한 번'이 '일단'이라는 뜻의 부사로 쓰일 때는 붙여 쓴다. 어디 한번 해 보자/한번 속아 본 사람은…등이 예다.
'데' '바' '뿐' '수' '지'=의존명사는 모두 띄어 쓴다. 먹었는 데도 또 먹었다/그곳에 가 본 바가 없다/좋을 뿐 아니라 즐겁다/이젠 만날 수 없게 됐다/죽은 지 얼마나 됐지? 등이 용례다. 그러나 이것들도 띄어쓰지 않고 붙여 쓸 때가 있다. 서둘렀는데 늦었다/그곳에 가 본바 사실이었다/귀찮을뿐더러 밉다/만날수록 보고 싶다/집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등에서 '데' '바' '뿐' '수' '지'는 홀로는 뜻을 갖지 않는 어미로서 앞말에 붙여써야 한다.
단위 띄어쓰기=단위를 나타내는 원, 개, 대 등 명사는 띄어 쓴다. '한 개/차 한 대/ 금 서 돈/ 연필 한 자루/ 옷 한 벌/집 한 채' 등. 이와 관련 '십만원' '십만 원' '십 만원' 중 어떤 게 바른 표기 일까. 한글로 수는 적는 것과 관련, 맞춤법 제 44항에서 '만' 단위로 띄어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십칠억 육천삼백이십사만 오천삼백이십구로 써야 한다. 따라서 '십만'은 붙여 써야 한다.
그 다음 단위 명사 '원'은 숫자와 어울려 쓸 경우 띄어 쓰는게 맞다(관련 규정 43항). 천원, 이만 원, 십만 원 등. 단 순서, 연월일, 시각을 나타낼 때나 아라비아 숫자 뒤에서는 붙여 쓸 수 있다. '두 시 삼십 분/ 두시 삼십분, 칠십 년 오 월/칠십년 오월, 1,000원' 등이 예다.
드리다, 시키다=명사와 결합해 접미사로 쓰일 때는 띄어쓰지 않고 붙여 쓴다. '감사드리다/인사드리다/훈련시키다'로 써야 맞다.
◆ 해님 - 햇빛 - 햇볕
① "애야!" 일어나야지. 햇님이 중천에 떴단다"
② "벌써? 햇빛이 따갑네"
③ "방안에 햇볕이 들어와 너무 밝구나"
예문 ①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햇님'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때 햇님은 '핸님'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준 발음이 아니며 올바른 표기도 아니다. 바른 말은 '해님'이며 발음도 그대로 '해님'이다. 마찬가지로 '아우님'도 '아웃님'으로 쓰지 않으며 '아운님'으로 발음해선 안된다. '-님' 앞에서 '遁'발음이 덧나지 않고 표기 그대로 발음하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첨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더욱이 해님, 달님, 별님, 아우님 등에서 '-님'은 독립적인 낱말도 아니다. 하지만 햇빛과 햇볕은 각각 햇+빛, 햇+볕 등 자립적인 두 낱말이 합쳐져 낱말을 구성하면서 '빛' '볕'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된다.
따라서 사이시옷이 첨가돼 햇빛, 햇볕이 된다. 한편 햇빛과 햇볕은 그 뜻이 달라 잘 구별해 써야 한다. 두 낱말의 뜻의 차이는 '빛'과 '볕'에서 비롯된다. '빛'은 시각을 통해 인지한 수 있는 것, 즉 '광선'을 뜻하며 '밝고 어두움'의 정도와 관계된다. 이에 비해 '볕'은 살갗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 즉 '뜨거운 기운, 곧 열(熱)'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해(태양)는 빛과 볕을 함께 발산하는데, 해가 내는 광선을 햇빛이라고 하고 해가 발하는 뜨거운 기운을 햇볕이라 한다.
이같은 사항에 유의해서 위 예문들을 바로 잡으면
① "얘야! 일어나야지. 해님이 중천에 떴단다"
②"벌써? 햇볕이 따갑네"
③"방안에 햇빛이 들어와 너무 밝구나"가 된다.
이밖에 '햇빛에 눈이 부시다' '찰랑이는 물결이 햇빛이 부서진다' '햇볕에 피부가 탔다' 양지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등으로 쓰면 된다.
◆ 좇다와 쫓다
"유행을 쫓느라 돈이 많이 들어."
"형사는 범인의 자취를 쫓았다."
"그윽한 눈으로 그 사람의 시선을 쫓았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위 문장에 쓰인 쫓다는 모두 좇다를 잘못 쓴 것이다.
이런 사정에는 사전이 한 몫을 한다. 일반 사전에 따르면 좇다는 '남의 뜻이나 성향, 행적, 관례 등을 따라 그대로 하다'로 뜻풀이가 돼 있다. 반면 쫓다는 '있는 자리에서 빨리 떠나도록 몰다', '급한 걸음으로 뒤를 따르다'로 돼 있다.
이 정도의 설명이라면 좇다는 뭔가 추상적인 것을 따를 때 쓰고 쫓다는 직접 뒤를 따라 갈 때 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좇다의 뜻에 '뒤를 따라가다'라는 뜻이 올라 있는 사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뒤를 따르다' 정도로만 뜻물이가 돼 있고 용례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문에 '친구의 뒤를 졸졸 좇아가다.'인지 '친구의 뒤를 졸졸 쫓아가다.'인지 도무지 구분하기 어렵다. 둘 다 인정해 뒤를 따라가다'라는 뜻이라면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일반인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내 표준국어대사전은 좇다와 쫓다를 구분하는 기준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기준은 '물리적으로 공간을 직접 이동하는가'이다. 즉 발걸음을 옮기든, 교통수단을 이용하든지 간에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상황이라면 쫓다를, 공간의 이동이 물리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쫓다를 쓰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윽한 눈길로 그 사람의 시선을 좇았다.'는 '시선의 이동'은 있지만 직접 발걸음을 떼서 옮기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므로 좇다가 된다.
또 '길'이란 단어가 들어갔더라도 '나의 길을 좇아오는 추종자들'에서처럼 '길'이 물리적인 이동이 불가능한 어떤 행적, 자취를 뜻할 때에는 좇다를 써야 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위 예문은
'유행을 좇느라 돈이 많이 들어.'
'형사가 범인이 자취를 좇았다.'로 고쳐야 한다.
◆ 늘이다와 늘리다
"여보, 와이셔츠 소매 길이 좀 늘여야겠어" "너무 급해요. 작업 시간을 더 늘려 주세요." "엿가락을 늘리면 얼마나 길어질까"
'늘이다'와 '늘리다'는 많이 쓰이는 만큼 어느 정도 구분을 잘 하는 낱말이지만 위 예문처럼 잘못 사용하는 일도 많다.' 그 이유는 늘이다는 '길이'에 대해서, 그리고 늘리다는 '양'에 대해 쓴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떄문이다. 이를테면 고무줄의 길이를 길게 한다고 해서 모두 늘이다를 쓸 수는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늘이다와 늘리다의 혼동을 막을 수 있는 열쇠가 잇다. 우선 늘이다는 '본디보다 더 길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잇따. 그 예로 '고무줄을 늘이다.' '엿가락을 늘이다'처럼 쓸 수 잇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늘이다를 쓰려면 더 길게 하는 대상이 반드시 '탄력성이 있는 물체'여야 한다. 즉 고무줄, 엿가락처럼 '탄력성이 있는 물체의 길이'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반면 늘리다는 늘이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그 대상이 탄력성이 있는 물체를 제외한 달리 물체의 길이를 길게 하되 그 물체를 제외한 것'에 한한다.
즉 '소매 길이를/바지 기장을/옷단을 늘리다'가 그 예이다.
늘리다의 두 번째 뜻은 '물체의 넓이, 부피, 무게를 크게 또는 많게 하다'다. 집 면적을 늘려 이사하다/몸무게를 늘리다가 예다. 또 늘리다는 구체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폭넓게 쓰인다. 학생 수를 늘리다/세력을 늘리다./실력을 늘리다/살림을 늘리다/근무 시간을 늘리다 등이 대표적 예다.
결국 '늘리다'는 탄력성이 있는 물체의 길이라는 구체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쓸 수 있는 반면 '늘리다'는 '탄력성이 없는 물체의 길이'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물체의 '넓이, 부피, 무게'를 대상으로 쓸 수 있다. 따라서 위 예문은 "여보, 와이셔츠 소매 길이 좀 늘려야겠어" "너무 급해요. 작업 시간을 더 늘려 주세요" "엿가락을 늘리면 얼마나 길어질까"로 고쳐야 맞다.
◆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새로 온 선생님 잘 가리켜 주시니", "그래 아주 재미있게 가르켜 주셔", "내가 언제 그 쪽을 가리쳤다고 그래" 그 뜻이 무엇인지는 대부분 알면서도 흔히 잘못 쓰는 말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르치다'와'가리키다'이다. 말도 비슷하고 발음도 비슷해 마구 혼동해서 쓰는 일이 많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정확한 뜻과 쓰임을 숙지하는 것이 좋다.
가르치다는 '교육하다', '알도록 일러주다'는 뜻을 갖는다. 선생님은 가르치고 어린이는 배운다/그분은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이다. 등이 그 예다.
이와 달리 가리키다는 '지시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손을 들어 달을 가리켰다/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거라/가리키는 나무를 잘 보아라 등이 예라 하겠다.
이처럼 두 낱말은 뜻과 쓰임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리 학원 강사는 잘 가리켜(가르켜) 주신다." 또는 "손가락으로 날 가르쳐(가르켜)"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인 만큼 서로 바로잡아 주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지시할 때는 가리키다/가리켰다/가리켜 등으로 써야 하고 교육할 때는 가르치다/가르쳤다. 가르쳐 등으로 써야 옳다.
따라서 위 예문은 "새로 온 선생님 잘 가르쳐 주시니", "그래. 아주 재미있게 가르쳐 주셔", "왜 엉뚱한 곳은 가리켜", "내가 언제 그 쪽을 가리켰다고 그래"로 고쳐야 맞다.
◆ 너머와 넘어
"산 넘어 남쪽에는 누가 살까?" "저 너머에 누가 산들 우리가 너머 갈 수 없는 신세군"
간혹 사람들 중에는 너머와 넘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해 쓰는 일이 있다. 그러나 두 말은 반드시 구별해 써야 한다.
너머는 '높이나 경계를 나타내는 명사 다음에 쓰여 높이나 경계로 가로막은 사물의 저쪽. 또는 그 공간'을 뜻한다. 산 너머/ 고개 너머/ 저 너머에서처럼 공간이나 공간의 위치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뒤뜰 돌담 너머, 붉은 지붕의 건물이 바로 그가 경영하는 유치원이다.' '들창 너머, 파랗다 못해 보라색을 머금은 하늘이 눈에 싱싱했다.'로 쓰면 된다.
이와 달리 넘어는 동사 '넘다'에 어미 '-어'가 연결된 것으로 '국경을 넘어 갔다.' '산을 넘어 집으로 갔다.'에서처럼 동작을 나타낸다.
즉 산 너머는 산 뒤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고, 산 넘어는 산을 넘는 동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글맞춤법 제 19항 붙임에 보면 '어간에 이나 음 이외의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미사가 붙어서 다른 품사로 바뀐 것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명사로 된 귀거머리, 까마귀, 너머, 뜨더귀, 마감, 마개 등은 원형을 밝혀 적지 않고 있다. 이는 공간을 나타내는 너머의 경우 넘다의 동사 어간을 밝혀 적지 않도록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