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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 [원풍(元豊)] 8년(A.D.1085; 高麗 宣王 2)에 [운(運)이] 그의 아우인 승려(僧侶) 통(統)을 보내와 조근(朝覲)하고서 불법(佛法)을 묻고, 아울러 경상(經像)도 바쳤다. [송(宋)]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고려(高麗)에서] 김상기(金上琦)를 봉위사(奉慰使)로, 임기(林曁)를 치하사(致賀使)로 보내왔다. 『형법서(刑法書)』[註183]·『태평어람(太平御覽)』·『개보통례(開寶通禮)[註184]』·『문원영화(文苑英華)[註185]』 등을 구입해 가겠다고 요청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문원영화(文苑英華)』 한 가지 책만 하사하게 하고, 명마(名馬)· 금기(錦綺)· 금백(金帛) 등을 주어 그 예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운(運)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졸(卒)하자[註186] 아들 회왕(懷王) 요(堯)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였으나,[註187] 1년도 지나지 못하여 병(病)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자 국인(國人)들이 그의 숙부(叔父)인 계림공(鷄林公) 희(熙)에게 섭정(攝政)하도록 하였다.[註188] 그 후 얼마 안되어 요(堯)가 졸(卒)하고 희(熙)가 바로 즉위하였는데, 수년 동안 사신이 오지 않았다.
○ 원우(元祐) 4년(A.D.1089; 高麗 宣宗 6) 에 그 왕자(王子) 의천(義天)이 승려(僧侶) 수개(壽介)로 하여금 항주(杭州)에 와서 망승(亡僧)[註189]에게 제(祭)를 올리도록 하였는데,[註190] [수개(壽介)가] “국모(國母)가 두 금탑(金塔)을 가지고 가서 양궁(兩宮)의 장수(長壽)를 위하여 바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지주(知州) 소식(蘇軾)이 이를 거절하자고 상주(上秦)하였는데, 그 말이 「소식전(蘇軾傳)」에 실려 있다.[註191] 희(熙)가 뒤에 요주(遼主)의 휘(諱)를 피하여[註192] 이름을 옹(顒)으로 고쳤다. 옹(顒)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註193] 상인들의 이익을 빼앗기를 좋아하였으며, 부자집이 법을 범할 적마다 오랫동안 구류시켜 속전(贖錢)을 요구하여 아무리 하찮은 죄일지라도 은(銀) 두어 근씩을 바치도록 하였다.
○ [원우(元祐)] 5년(A.D.1090; 高麗 宣宗 7)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註194] 은기(銀器) 5천벌을 하사하였다. [註195] [원우(元祐)] 7년(A.D.1092; 高麗 宣宗 9)에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책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식(蘇軾)이, “고려(高麗)가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註196]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아뢰니, 조칙(詔勅)을 내려 금박(金箔)만을 수매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册府元龜)』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 원부(元符) 연간(A.D.1098~1100; 高麗 肅宗 3~5)에 [고려(高麗)에서] 선비를 빈공(賓貢)으로 보냈다.[註197]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임의(任懿)· 왕하(王嘏) 등을 보내와 조위(弔慰)도 하고 축하도 하였다. 숭녕(崇寧) 2년(A.D.1103; 高麗 肅宗 8)에 조칙(詔勅)을 내려 호부시랑(戶部侍郞) 유달(劉逵)· 급사시중(給事中)[註198] 오식(吳拭)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옹(顒)이 졸(卒)하고 아들 우(俁)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자 조공(朝貢)하는 사신들이 연달아 왔다.[註199] 또 선비 김서(金瑞) 등 5명을[註200] 태학(太學)에 들어가도록 하니, [註201] 조정(朝廷)에서 그들을 위하여 박사(博士)[註202]를 두었다.
○ 정화(政和) 연간(A.D.1111~1117; 高麗 睿宗 6~12) 에 고려(高麗)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註203]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 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註204]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睿謨殿) 안에서 고려(高麗) 사신을 위하여 연회(宴會)까지 베풀었다.[註205]
○ 선화(宣和) 4년(A.D.1122; 高麗 睿宗 17) 우(俁)가 졸(卒)하였다. 본래 고려(高麗)의 풍속은 형이 죽으면 왕위(王位)가 아우에게 넘어가는데,[註206] 이때에 이르러서도 여러 아우들이 서로 임금이 되려고 다투자 고려(高麗)의 상(相) 이자심(李資深)이 우(俁)의 아들 해(楷)를 임금으로 세웠다.[註207] 그리고 와서 국상(國喪)을 고(告)하니 급사중(給事中)[註208] 노윤적(路允迪)· 중서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墨卿) 등에게 조칙(詔勅)하여 위문하도록 하였다.[註209] 우(俁)가 왕위(王位)에 있을 적에 조정에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여, 의원(醫員)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도록 하였다.[註210] 그들이 2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귀국하게 되자 해(楷)가 그 의원(醫員)들에게, “조정(朝廷)이 앞으로 병사를 일으켜 요(遼)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들었다. 요(遼)나라는 형제(兄弟)의 나라로서 그들이 있다면 충분히 변방의 방패가 될 수 있지만 여진(女眞)은 낭호(狼虎)와 같을 뿐이어서 사귈 수 없다. 사태가 그러하니 두 의원(醫員)들은 귀국하거든 천자(天子)에게 아뢰어 마땅히 조기에 대비 하도록 하기 바란다.” 고 하였다. 귀국하여 해(楷)의 말대로 아뢰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註211]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高麗)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려(高麗)의 사행(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宋)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高麗)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註212] [고려(契丹)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契丹)에서는] 항상, “고려(高麗)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高麗)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고려(高麗)의] 사신이 거란(契丹)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高麗)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契丹)이] 한번은 고려(高麗)가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高麗)는 표(表)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契丹)이 깨달아 [고려(高麗)가]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高麗)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 [건염(建炎)] 2년(A.D.1128; 高麗 仁宗 6) 에 절동로(浙東路)[註213] 마보군도총관(馬步軍都總管)[註214] 양응성(楊應誠)이 상언(上言)하기를, “고려(高麗)에서 여진(女眞)까지의 길이 매우 가까우므로 신(臣)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과 우호를 맺어 [여진(女眞)으로 잡혀간] 삼성(三聖)을 영접하여 올 것을 도모하겠습니다.” 하니, 곧 양응성(楊應誠)을 가형부상서(假刑部尙書)로 삼아 고려국(高麗國)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절동수신(浙東帥臣)[註215] 적여문(翟汝文)이, “양응성(楊應誠)은 폐하(陛下)를 속여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웠을 뿐입니다. 만약 고려(高麗)가 오(吳)· 월(越)을 엿보기 위하여 금(金)나라 사람도 나루터를 물어 왔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폐하(陛下)의 명을 욕되게 한다면 원방(遠方)의 오랑캐에게 조소(嘲笑)당할 터이니 [양응성(楊應誠)을] 파견하지 마십시오.” 하고 아뢰었다. 양응성(楊應誠)은 이 말을 듣고도 끝내 부사(副使) 한연(韓衍)· 서장관(書狀官) 맹건(孟健) 등과 함께 항주(杭州)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서 갔다. 6월에 고려(高麗)에 도착하여 고려왕(高麗王) 해(楷)에게 하고 싶은 계획으로 효유(曉諭)하니 [註216] 해(楷)가, “대조(大朝)는 본시 산동(山東)에 길이 있는데 어찌 등주(登州)를 경유하여 [여진(女眞)으로] 가지 아니하였습니까?”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이, “귀국(貴國)의 길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해(楷)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얼마 후에 그 나라 문하시랑(門下侍郞)[註217] 부일(傅佾)에게 명하여 객관(客館)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과연 적여문(翟汝文)의 말처럼 대답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이, “여진(女眞)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하니, 부일(傅佾)은, “여진(女眞)은 항상 바닷길로 왕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진(女眞)이 옛날에는 신하(臣下)로서 본국을 섬겼지만[註218] 지금에는 우리가 도리어 신하로서 여진(女眞)을 섬기고 있으니, 그 강약(强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 [해(楷)가] 다시 중서시랑(中書侍郞) 최홍재(崔洪宰)· 지추밀원(知樞密院) 김부식(金富軾) 등을 [양응성(楊應誠)에게] 보내어 전일의 의사를 변동 없이 견지하면서, “이성(二聖)이 현재 연운(燕雲)에 계신 이상[註219] 대조(大朝)에서 국토를 [여진(女眞)에게]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성(二聖)을 맞아 올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병사를 훈련시켜 여진(女眞)과 싸우지 않습니까?” 하면서 끝내 조서(詔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은 2개월여를 [고려(高麗)에] 체류하다가 하는 수 없이 수창문(壽昌門)[註220]에서 해(楷)를 접견하고 그가 올린 표(表)만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 [건염2년(建炎二年)]10월에 대궐에 이르러 입대(入對)하여 그 상황을 아뢰니, 고종(高宗)은 해(楷)가 국은(國恩)을 저버렸다고 대단히 노하였다. 상서우승(尙書右丞)[註221] 주승비(朱勝非)가, “고려(高麗)가 금(金)나라 사람과는 인접하여 있고 중국과는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이해(利害)가 매우 분명합니다. 과거에 고려(高麗)를 너무 후하게 대우하였지만, 지금 어떻게 그 보답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아뢰자, 우복사(右僕射)[註222] 황잠선(黃潛善)은, “큰 전함(戰艦)에 정예병(精銳兵) 수만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高麗)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승비(朱勝非)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연산(燕山)의 사적이 가까운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하고 아뢰니, 상(上)이 노여움을 풀었다.
11월에 해(楷)가 그의 신하 윤언신(尹彦頣)를 보내와 표(表)를 올려 사죄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이성(二聖)이 아직 귀국하지 못하였으므로 연회(燕會)에 음악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전문(殿門) 밖에다 막(幕)을 설치하여 객성관(客省官) 오득흥(吳得興)에게는 술과 음식을 반사(伴賜)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징(張澂)더러는 그를 압반(押伴)하여 예(禮)에 따라 환국(還國)하도록 하였다.
○ [건염(建炎)] 3년(A.D.1129; 高麗 仁宗 7) 8월에 고종(高宗)이 보좌하는 신하에게, “상황(上皇)이 내신(內臣)· 궁녀(宮女) 각각 2인씩을 보냈는데, 그들이 고려(高麗)의 조공(朝貢)하는 사신을 따라서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짐(朕)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픔과 기쁨이 겹친다.” 하자, 여신호(呂頣浩)가 아뢰기를, “이것은 필시 금(金)나라 사람의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려(高麗)로서는 필연코 [그런 일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고려(高麗) 사신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高麗) 사신이 오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그 조서(詔書)는 대략 다음과 같다. “왕(王)은 유구(悠久)하게 기업(基業)을 지켜 옛날부터 문자(文字)와 거궤(車軌)가 우리와 똑같았으며, 뗏목을 탄 사신에게 부명(付命)하여 조공(朝貢)하는 예를 계속 수행하여 왔소. 그 충성이 변함이 없는 것이야말로 신명(神明)에게 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으로서, 마침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쁘게 여겼소. 짐(朕)의 만년에 실로 변고가 많아 온 중국의 백성들이 강적인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았소. 그들은 이미 국경을 깊숙이 짓밟고서도 병사를 일으켜 침입을 중지하지 않고 있어 장위(仗衛)를 잠시 강호(江湖)로 이주(移駐)시켰소.[註223] 만약 이 때에 사신이 정말 온다면 관원(官員)이 [그 신변을] 경호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니 변방의 난리가 그침을 기다려 빙문(聘問)할 시기를 묻겠소. [사신의] 수레를 들여 놓기 위하여 진관(晉館)을 무너뜨림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한관(漢關)을 닫고서 조공(朝貢)를 거절한 것은 전례(前例)를 따른 것이 아니오. 평소의 고려(高麗)의 마음을 헤아리건대 나의 뜻을 이해하리라 믿소.”
○ 소흥(紹興) 원년(A.D.1131; 高麗 仁宗 9) 10월에 고려(高麗)가 들어와 조공(朝貢)하려고 하자, 예부시랑(禮部侍郞) 유약(柳約)이, “사명(四明)이 깨뜨려진 뒤로 황폐하고 미약하므로 침입할 마음을 품을까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많은 병사들을 주둔시켜 고려(高麗) 사신이 오는 것에 대비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11월에 유약(柳約) 에게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가도록 조칙(詔勅)하였으나 결국은 보내지 못하였다
○ [소흥(紹興)] 2년(A.D.1132; 高麗 仁宗 10) 윤(閏)4월에 해(楷)가 그 나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註224] 최유청(崔惟淸)· 합문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 등을 보내와 금(金) 백냥· 은(銀) 천냥· 능라(綾羅) 2백필· 인삼(人蔘) 5백근을 조공(朝貢)하였는데, 최유청(崔惟淸)이 바친 것도 그 3분의 1은 되었다. 상(上)이 후전(後殿)에 나아가 그들을 불러들여 접견하고서 최유청(崔惟淸)· 심기(沈起) 등에게 금대(金帶) 2개를 하사하는 동시에 따뜻한 조서(詔書)로 답하여 돌려보냈다. 이 달 정해현(定海縣)[註225]에서 아뢰기를, “[송(宋)나라] 백성으로서 고려(高麗)로 도망하여 들어간 사람들이 약 80명쯤 되는데, [고려(高麗)에] 표(表)를 올려 그들을 환국(還國)시키기를 원합니다.” 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그들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고려(高麗)의 강수(綱首) 탁영(卓榮) 등에게 적절한 은혜를 베풀도록 하였다.[註226] 12월에 고려(高麗)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홍이서(洪彝敍) 등 65명을 보내어 조공(朝貢)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안(臨安) 부학(府學)[註227]에다 고려(高麗)의 사신들을 유숙시키기로 의논하던 중 누가 아뢰기를, “아무리 전쟁 중에 있더라도 학교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정탐하는 바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법혜사(法惠寺)[註228]를 동문관(同文館)으로 꾸며 고려(高麗) 사신들을 기다렸다. 뒤에 결국 오지 아니하였다.
○ [소흥(紹興)] 6년(A.D.1136; 高麗 仁宗 14)에 고려(高麗)의 지첩관(持牒官) 김치규(金稚圭)가 명주(明州)에 이르자 은(銀)· 백(帛)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이는 그가 금(金)나라의 간첩일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소흥(紹興)] 32년(A.D.1162; 高麗 毅宗 16) 3월에 고려(高麗)의 강수(綱首) 서덕영(徐德榮)이 명주(明州)에 이르러,[註229] “본국(本國)에서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고자 합니다.” 하고 말하니, 수신(守臣) 한중통(韓仲通)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오불(吳芾)이, “고려(高麗)가 금(金)나라와 국경이 인접하기 때문에 과거에 [고려(高麗)의] 김치규(金稚圭)가 왔을 적에는 조정(朝廷)에서 그가 [금(金)나라의] 간첩일까 염려하여 속히 귀국시켰습니다. 지금 우리와 금(金)나라가 전쟁하고 있는데, 서덕영(徐德榮)의 청이 어찌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를 진실로 오게 한다면 예측하지 못한 변이 생길까 염려스럽고, 만에 하나라도 오지 아니한다면 원방(遠方)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라고 아뢰니, 조서(詔書)를 내려 중지시켰다.
○ 융흥(隆興) 2년(A.D.1163; 高麗 毅宗 17) 4월에 명주(明州)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이] 들어와 조공(朝貢)할 것이라고 아뢰었는데, 사관(史官)이 [고려(高麗) 사신을] 인견(引見)한 날짜를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도 [과거에] 홍이서(洪彝敍)가 [조공(朝貢)이 온다고 말해 놓고 오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속인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로 [고려(高麗)의] 사신의 발길이 마침내 끊어졌다.
○ 경원(慶元) 연간(A.D.1195~1200; 高麗 明宗 25~神宗 3) 에 조칙(詔勅)을 내려 상인(商人)들이 동전(銅錢)을 가지고 고려(高麗)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는 대체로 고려(高麗)와의 관계를 단절한 것이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사신이 들어옴에 있어 명주(明州)·월주(越州)는 그들의 대접으로 시달리고, 조정(朝廷)에서는 관우(館遇)· 연뢰(燕賚)· 석여(錫予) 등의 비용이 수만냥을 헤아렸는데, 이것도 고려왕(高麗王)에게 하사한 예물은 포함되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 사신이 [고려(高麗)에] 갈 적에는 언제나 두 척의 신주(神舟)를 탔는데, 그 비용 역시 막대하여 삼절(三節)에 관리(官吏)들이 자기 직위(職位)에 따라 녹봉(祿俸)에서 덜어 내놓은 돈을 모두 현관(縣官)에게 의뢰하였다. 예전에 소식(蘇軾)이 선조(先朝)에 아뢰면서, “고려(高麗)에서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은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고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생각하니 오회(吳會)로 천도(遷度)한 후부터는 형편이 동도(東都)[註230] 때와 달라졌다. 과거에 고려(高麗)가 사신을 들여보낼 적에는 등주(登州)· 내주(萊州) 등지를 경유하여 길이 매우 멀었었지만, 지금은 바로 사명(四明)[註231]으로 오니 사명(四明)에서 행도(行都)까지의 거리는 절수(浙水)[註232] 하나만이 경계가 될 뿐이다. 바닷길로 사행(使行)이 고려(高麗)에 가자면 바다가 망망하고 섬들이 험하여 폭풍(暴風)을 만나면 배가 암초(暗嶕)에 부딪쳐 파손되었다. 급수문(急水門)을 빠져나가 군산도(群山島)[註233]에 닿아야만 비로소 무사히 도달하였다고 하는데, 수십 일이 걸리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배가 남쪽이나 북쪽으로 운행하여 순풍(順風)을 만나면 험한 곳을 평지처럼 통과하여 며칠 안 걸려서 도달할 수 있다.
○ 고려(高麗)는 동서의 거리가 2천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5백리로서,[註234]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접하니 압록강(鴨綠江)을 견고한 요새지로 삼았는데 강의 넓이는 3백보(步)이다. 고려(高麗)의 동쪽은 가는 곳마다 바닷물이 맑아 물밑이 열길 정도 보이며, 동남쪽에서는 명주(明州)가 바라보이는데[註235] 물이 모두 푸르다. [고려(高麗)]왕(王)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이 곧 개성부(開成府)이다. 큰 산을 등져 궁실(宮室)을 짓고 성벽(城壁)도 쌓으니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백성들의 거처는 모두 띠집으로서 큰 집이라야 2칸 정도이며, 기와로 이은 집은 겨우 2할 정도이다. 신라(新羅)를 동주(東州)[註236]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百濟)를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註237],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는데 서경(西京)이 제일 번성하였다. 통틀어 모두 3경(京)·4부(府)·8목(牧)에 군(郡)이 백 십 8개,[註238] 현진(縣鎭)이 3백 9십개, 섬이 3천 7백개이며, 작은 도읍(郡邑)은 간혹 백호(戶) 밖에 안 되었다.
인구는 총 2백 10만명으로서[註239] 병사·백성·승려(僧侶) 등이 각각 3분의 1씩을 차지하였다.[註240] 기후는 춥고 산이 많으며 토질은 소나무나 잣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고, 메벼(갱,秔)·기장(서,黍)·삼(마,麻)·보리(맥,麥) 등은 있어도 차조(출,秫)가 없어 멥쌀로 술을 빚었다. 잠사(蠶絲)가 적어 겸(縑) 1필에 값이 은(銀) 열냥이므로 삼베나 모시 베를 많이 입었다.
○ 왕(王)이 거동할 적에는 멍에를 맨 소의 수레를 타고, 험한 산(山)을 넘을 적에는 말을 탔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앞에 서서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을 안고서 인도하였다. 명령을 내리는 것을 교(敎)나 선(宣)이라고 하였다. 신민(臣民)들은 그 임금을 聖上이라고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도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註241]라고 불렀다. 백관(百官)의 명칭· 품계(品階)· 훈(勳)· 공신(功臣)· 검교(檢校) 등은 거의 중국과 같았으며, 어사대(御史臺)를 지날 적에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데 이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탄핵하였다. 사인(士人)들은 문벌(門閥)을 중하게 여기며, 유(柳)· 최(崔)· 김(金)· 이(李) 4성(姓)을 귀족(貴族)으로 꼽는다. 환자(宦者)가 없고 세족(世族)의 자제(子弟)들로써 내시(內侍)[註242]와 육위(六衛)[註243]를 충당하였다.
매년 12월 초하룻날에는 왕(王)이 자문(紫門) 소전(小殿)에 좌정하여 관리(官吏)들을 임명하고, 외관(外官)[註244]은 재상에게 위임하였다. 국자감(國子監)· 사문학(四門學)[註245] 등이 있어 학생이 6천명이나 되었으며, 공사(貢士) 3등급이 있는데 왕성(王城)은 토공(土貢), 도읍(郡邑)은 향공(鄕貢), 외국인(外國人)은 빈공(賓貢)이라고 하였다. 3년마다 그 소속된 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2차는 태학(太學)에서 시험을 보이는데, 선발된 사람은 3~40명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한 뒤에 왕(王)이 친히 시(詩)· 부(賦)· 논(論) 등 세 가지 제목으로 시험 보였는데 이를 염전중시(簾前重試)[註246]라 하였다. 제과(制科)· 굉사과(宏詞科) 등의 명목은 있었으나 다만 형식일 뿐이며, 선비들은 성률(聖律)만 숭상하여 경전(經傳)에 통달한 사람은 적었다.
○ 왕성(王城)에는 중국 사람이 수백 명 있었는데, 장사 때문에 배타고 간 민(閩)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비밀리에 그들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벼슬을 주어 유혹하거나 강제로 체류시켜 일생을 마치도록 하기도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사신이 갔을 적에 [그들 중에] 첩(牒)을 올려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귀국하였다. 모든 관리(官吏)들에게는 쌀로 녹봉(祿俸)을 주고 모두에게 논밭을 지급하여 [생산된] 곡물을 받아들여 절반만 지급하고, 관리(官吏)가 죽으면 바로 환수하였다. 나라에는 개인 소유의 논밭이 없고, 백성들에게 식구를 계산하여 직업을 맡겼다. 16세 이상이면 충군(充軍)되었으며, 육군(六軍)· 삼위(三衛)는 항상 수도(首都)에 머물러 있고, 3년마다 군사를 뽑아 서북 지방을 지키도록 하여 반년 만에 교체시켰다. 변란이 있으면 무기를 잡고, 일이 생기면 노역(勞役)에 종사하다가 일이 끝나면 복귀하여 농사를 지었다. 왕(王)도 분배된 토지를 소유하여 사사로운 비용에 충당하고, 왕모(王母)· 비주(妃主)·세자(世子)는 모두 탕목전(湯沐田)을 받았다. 관리(官吏)나 백성들은 모두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 한낮에도 [자리를] 비우며, 쌀이나 베로써 교역하였다. 땅에서 구리가 생산되어도 돈을 주조할 줄 모르고 중국에서 준 돈을 부고(府庫)에다 간직하여 놓고 가끔 꺼내어 돌려가면서 구경할 따름이다. 숭녕(崇寧)(A.D.1102~1106; 高麗 肅宗 7~睿宗 1) 이후에 비로소 돈을 주조하는 기술을 배워 「해동통보(海東通寶)」[註247]·「중보(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註248]등 세 종류의 돈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무기(武器)는 간단하여 강노(强弩)나 대도(大刀)가 없었다.
○ 불교(佛敎)를 숭상하여 비록 임금의 자제(子弟)일지라도 언제나 한사람은 승려(僧侶)가 되었다. 귀신을 신봉하고 음양설(陰陽說)[註249]에 얽매여 병을 앓으면 서로가 보지도 아니하고 감습(歛襲)할 적에는 관(棺)을 어루만지지 아니하며,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들에 그냥 버려두었다. 해마다 건자월(建子月)이면 하늘에 제사지냈다. 고려(高麗) 동쪽에 구멍(혈,穴)이 있는데 수신(禭神)이라고 불렀다. 언제나 10월 보름날이면 [그 수신(禭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냈는데 이를 팔관재(八關齋)[註250] 라고 한다. 이 때의 의식(儀式)이 매우 성대하여 왕(王)은 비빈(妃嬪)들과 함께 누(樓)에 올라 크게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상인(商人)들은 비단으로 장막을 만드는데, 백필이나 연결하여 부유(富裕)함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3년마다 크게 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를 기회로 백성들에게 재물을 거두어 들여 왕(王)과 여러 신하들이 나누어 가졌다.
[왕(王)의] 조상(祖上) 사당은 국도(國都)의 성문(城門) 밖에 있어 대제(大祭)에는 거복(車服)· 면규(冕圭) 등을 갖추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도성(都城)에 사찰(寺刹)은 70군데가 있었으나 도관(道觀)은 없었다. 대관(大觀) 연간(A.D.1107~1110; 高麗 睿宗 2~5)에 [송(宋)나라] 조정에서 도사(道士)를 파견하자 비로소 복원원(福源院)을 건립하여 우류(羽流) 10여명을 두었다. 풍속이 의술(醫術)을 모르다가 고려왕(高麗王) 우(俁)가 [송(宋)나라에]와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뒤로부터 비로소 의술(醫術)에 통한 사람이 있었다.
○ [고려(高麗)] 사람들의 머리는 침골(枕骨)이 없고 등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남자들의 건책(巾幘)은 중국 것과 모양이 같았으며, 부인(婦人)들의 추계(鬌髻)는 오른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풀어 뜨려 붉은 비단으로 묶고 비녀를 꽂았다. [그리고] 치마를 겹겹이 많이 입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남녀(男女)가 자기들끼리 부부(夫婦)가 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여름철에는 한 시냇물에서 목욕하였다. 부인(婦人)· 남승(男僧)·여승(女僧)들이 모두 남자처럼 절을 하였다.
음악은 매우 저급(低級)하여 금(金)· 석(石) 계통의 악기가 없었는데, [송(宋)나라에서] 악기를 하사한 후에야 좌(左)· 우(右) 2부로 구분하여 만들었으니, 좌부(左部)는 당악(唐樂)으로 중국 음악이며, 우부(右部)는 향악(鄕樂)으로 고려(高麗)의 옛날 속악(俗樂)이었다. 마루 위에다 자리를 깔아 놓고, 마루에 올라가면 반드시 거기에다 신을 벗어 놓았다. 어른을 뵐 적에는 무릎으로 다니고 반드시 꿇어앉았으며, 부르면 반드시 즉시 대답하였다. 절을 하면 모두 답배(答拜)하였으니 자식의 절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절반 정도는 답배하는 것이 예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한 까닭으로 살생(殺生)을 싫어하여 짐승을 도살(屠殺)하지 못하고, 양고기나 돼지고기가 먹고 싶으면 그 짐승을 짚으로 싸서 불살라 [잡아먹었다.]
형벌은 참혹한 조항이 없고 오직 역적이나 부모에게 욕한 자만 목을 베었으며, 그 나머지는 곤장으로 갈빗대를 때렸다. 외군(外郡)이 사형수(死刑囚)를 모두 왕성(王城)으로 송치하면 해마다 8월에 사형죄(死刑罪)를 감하여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여러 차례 사면(赦免)을 거쳐 [죄의] 경중(輕重)을 보아 석방하였다.
○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순풍(順風)을 만나면 3일 만에 바다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또 5일이면 묵산(墨山)에 도달하여 고려(高麗) 국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묵산(墨山)에서 섬들을 통과하여 초석(嶕石)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가면 배의 운행은 매우 빨라 7일 만이면 예성강(禮成江)에 다다랐다. 예성강(禮成江)은 양쪽 산 사이에 있는 석내(石崍)로 묶인 까닭에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데, 이것이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으로서 제일 험악한 곳이다. 또 3일이면 연혁(沿革)에 닿는데, [거기에는] 벽란정(碧瀾亭)이란 객관(客館)이 있다. 사인(使人)은 여기에서 육지에 올라 험한 산길을 40여리쯤 가면 고려(高麗)의 국도(國都)라고 한다.
2. ○ 정안국(定安國)
○ 외국열전(外國列傳)[註001]
○ 정안국(定安國)[註002]
○ 정안국(定安國)[註003]은 본래 마한(馬韓)의 종족(種族)인데,[註004] 거란(契丹)에게 격파당하자 그 추수(酋帥)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改元)하면서 자칭 정안국(定安國)이라고 하였다. 개보(開寶) 3년(A.D.970; 高麗 光宗 21)에 정안국왕(定安國王) 열만화(烈萬華)가 여진(女眞)[註005]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표(表)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A.D.976~983; 高麗 景宗 1~成宗 2)에 태종(太宗)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거란(契丹)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정안국(定安國)에 조서(詔書)를 내려 기각(掎角)의 형세를 펼치도록 하였다. 정안국(定安國)도 구수(寇讎)가 침략을 그치지 앟는 것을 원망하던 터에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사(王師)에 의하여 묵은 울분을 씻을 수 있을까 하여 조서(詔書)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A.D.981; 高麗 景宗 6) 겨울에 때마침 여진(女眞)의 조공(朝貢) 사신의 길이 정안국(定安國)을 경유하게 되자, 여진(女眞)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표(表)를 부쳐 올렸는데, “정안국왕(定安國王) 신(臣) 오현명(烏玄明)[註006]은 말씀드립니다. 성왕(聖王)의 하늘과 땅에 두루 미친 은혜를 입어 오랑캐의 풍속을 단속하고 있으니, 신(臣) 현명(玄明)은 정말 기뻐서 손뼉을 치고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합니다. 신(臣)은 본래 고려(高[구,句]麗)의 옛땅인 발해(渤海)의 유민(遺民)으로서, 한쪽 귀퉁이에 웅거하여 여러 해를 지내오는 동안 고르게 감싸준 은덕을 우러러 보고 한량없이 적셔준 덕택을 입어 저마다 살 곳을 얻어 본성(本性)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年前)에 거란(契丹)이 그 강폭(强暴)함을 믿고 국토를 침입하여 성채(城砦)를 쳐부수고 인민(人民)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신(臣)의 조고(祖考)가 지절(志節)을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리를]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 가까스로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부여부(扶餘府)가 일전에 거란(契丹)을 배반하고[註007] 모두 본국(本國)으로 귀속하였으니 앞으로 닥칠 재화(災禍)가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조(天朝)의 은밀한 계획을 받아 승병(勝兵)을 거느리고 가 [거란(契丹)] 토벌을 도와 기필코 원수를 갚을 것이며, 감히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신(臣) 현명(玄明)은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면서 머리 조아려 재배(再拜)합니다.”라고 하였으며, 그 표(表)의 끝에다, “원흥(元興)[註008] 6년(年) 10월(月) 일(日)에 정안국왕(定安國王) 신(臣) 현명(玄明)은 성황제(聖皇帝) 앞에 표(表)를 올립니다.” 하고 기제(記題)하였다.
○ 황제가 조서(詔書)로 답(答)하기를, “정안국왕(定安國王) 오현명(烏玄明)에게 조칙(詔勅)하오. 여진(女眞)의 사신 편에 올린 [그대의] 표(表)를 받았는데, 짐(朕)이 과거에 수조(手詔)를 내려 칙유(勅諭)한 뜻에 감격하여 [그 심정을] 피력하였구료. 그대는 원국(遠國)의 호수(豪帥)이자 명왕(名王)의 후손으로서, 마한(馬韓)의 땅을 다 차지하고 있다가 경해(鯨海) 밖에 있는 탓으로, 강한 적(敵)에게 옛 땅을 병탄(倂呑)당하고도 응어리진 원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쌓인 울분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소. 더구나 저 훈융(獯戎)[註009]이 아직도 전갈[채(蠆)]의 독기(毒氣)를 뿜어내기에 군사를 출동시켜 잠시 정벌하였더니 [훈융(獯戎)이] 하늘의 재앙을 받아 연속 패전하고 있으니 그들의 멸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이제 [짐(朕)의] 국가(國家)가 이미 변군(邊郡)에다 많은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 놓았으니, 추운 겨울을 넘긴 뒤 바로 토벌을 시행할 것이오. 그대가 만약 여러 대(代)의 수치를 생각하여 미리 온 나라의 병사들에게 타일러, 내가 [거란(契丹)]의 죄(罪)를 토벌할 때에 맞추어 그대의 복수(復讎)하고 싶은 뜻을 펼친다면, 북방의 사막이 평정된 후 작상(爵賞)을 내릴 터이니 장구지책(長久之策)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더구나 발해(渤海)가 [송(宋)나라] 조정(朝廷)의 교화에 귀속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부여(扶餘)도 이미 [거란(契丹)의] 적정(賊庭)을 배반하였으니, 그대의 묵은 복수심(復讎心)을 가다듬고 협력하여 진실로 함께 정벌하기로 약속한다면 필연코 큰 공훈(功勳)을 세울 것이오. 이제까지 망망한 바다에 가로 막혀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대에게] 쏠린 간절한 마음이야 자나깨나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고서, 조서(詔書)를 여진(女眞)의 사신에게 부쳐 가지고 가서 정안국(定安國)에 주도록 하였다.
○ 단공(端拱)[註010] 2년(A.D.989; 高麗 成宗 8) 에 정안국(定安國)의 왕자(王子)가 여진(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말(馬)과 새깃으로 장식된 명적(鳴鏑) 등을 바쳤다. 순화(淳化) 2년(A.D.991; 高麗 成宗 10)에 정안국(定安國)의 왕자(王子) 태원(太元)이 여진(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표(表)를 올렸는데,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아니하였다.
3. ○발해(渤海)
○ 발해국(渤海國)[註001]
○ 발해(渤海)는 본래 고려(高[구,句]麗)에서 갈려나온 종족(種族)이다. 당(唐) 고종(高宗)이 고려(高[구,句]麗)를 평정하고서는 그 사람들을 이주시켜 중국에서 살도록 하였다.[註002] 측천(則天) [무후(武后)]의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A.D.696; 新羅 孝昭王 5)에 거란(契丹)이 영부(營府)를 침공하여 함락시키자[註003] 고려(高[구,句]麗)의 별종(別種)인 대조영(大祚榮)이 요동(遼東)으로 달아나 웅거하니, 예종(睿宗)은 그를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註004]으로 삼는 동시에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발해국(渤海國)이라 자칭하고, 부여(扶餘)· 숙신(肅愼) 등 10여국(餘國)을 병합하였다.[註005] 당(唐)· [후(後)]량(梁)· 후당(後唐)까지 조공(朝貢)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 후당(後唐) 천성(天成)(A.D.926~929; 渤海 哀王 26~高麗 太祖 12) 초에 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가 부여성(扶餘城)을 침공하여 함락시킨 다음에 부여(扶餘)를 고쳐 동단부(東丹府)로 삼고서[註006] 그의 아들 돌욕(突欲)[註007]에게 명하여 병사를 주둔시켜 진압하도록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죽자 발해왕(渤海王)이 다시 부여(扶餘)를 침공하였으나[註008] 이기지 못하였다.
장흥(長興)(A.D.930~933; 高麗 太祖 13~16)· 청태(淸泰)[註009] 연간(A.D.934~935; 高麗 太祖 17~18)까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하였다. [후(後)]주(周) 현덕(顯德)(A.D.954~959; 高麗 光宗 5~10) 초기에 발해(渤海)의 추호(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여명이 와 귀부(歸附)하였다. 그 뒤로는 단절되어 중국과 왕래가 없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A.D.979; 高麗 景宗 4)에 태종(太宗)이 진양(晉陽)을 평정하고 유주(幽州)[註010]로 병사를 이동시켜, 발해(渤海)의 추수(酋帥) 대란하(大鸞河)가 소교(小校) 이훈(李勛) 등 16명과 부족(部族) 3백 기병(騎兵)들을 거느리고 항복해 오니, 란하(鸞河)를 발해도지휘사(渤海都指揮使)로 삼았다.
○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A.D.981; 高麗 景宗 6) 에 오사성(烏舍城) 부투부(浮渝府) 발해염부왕(渤海琰府王)[註011]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짐(朕)이 제업(帝業)을 이어받아 사해(四海)를 다 소유하여 온 천하가 순종하지 않는 자가 없소. 더구나 태원(太原) 지역은 [짐(朕)의] 국가의 보장(保障)인데, 과거에 [거란(契丹)이] 빼앗아 차지하여 마침내는 서로 주고받으며 요(遼)나라를 후원(後援)으로 의지하여 여러 대(代)를 지나도록 주벌(誅伐)을받지 아니하였소. 그래서 짐(朕)이 지난해에 정예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들도 대동하여 병문(幷門)의 외딴 성루(城壘)를 함락시켜 흉노(匈奴)의 오른팔을 끊어버리고, 양민(良民)들은 정성스럽게 위문하고 [죄인(罪人)들은] 처단하여 백성들을 소생시켜 주었소. 그런데 어리석은 저 북융(北戎)이 도리에 어긋나게 원한을 맺어 함부로 천식(荐食)하며 우리 국토를 침범하므로, 지난해에 한 번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맞아 공격하여 목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소. 이제 북을 울리면서 깊숙이 쳐들어가 자리를 말듯이 빠르게 말을 몰아, 그 용정(龍庭)을 불사르고 오랑캐들을 크게 무찌르고 싶소.
평소에 들으니 그대의 나라가 구수(寇讎)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병탄(倂呑)되면서도 국력(國力)이 그를 제재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종하여 땅을 떼어 주며 시달리고 있다 하오. [짐(朕)의] 영기(靈旗)가 적(敵)을 쳐부술 때가 되면 이는 곧 인국(隣國)이 울분을 씻을 기회가 되니, 족장(族帳)들을 다 출동시켜 우리의 선봉(先鋒)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오랑캐들을 섬멸하게 되면 성대하게 봉상(封賞)하되, 유(幽)· 계(薊)[註012] 등지는 중국에 복귀시키고 북방의 사막 지역은 전부 그대에게 줄 것이니, 가능한대로 협력하기 바라오. 짐(朕)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하였다. 당시에 [송(宋)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거란(契丹)을 정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조서(詔書)를 내려 칙유(勅諭)한 것이다.
○ [태평흥국(太平興國)] 9년(A.D.984; 高麗 成宗 3) 봄에 대명전(大明殿)에서 연회(宴會)를 베풀고 대란하(大鸞河)를 불러들여 위무하였다. 상(上)이 전전도교(殿前都校)[註013] 유정한(劉廷翰)에게, “란하(鸞河) 는 발해(渤海)의 호수(豪帥)로서 속신(束身)하여 귀부(歸附)하니, 그 충성스러움을 갸륵하게 여기는 바이다. 대체로 오랑캐의 천성은 말달리기로 낙을 삼으니, 하늘이 드높은 늦가을이 되거든 주위를 경비하고 준마(駿馬) 수십필을 주어 교외(郊外)로 나가 사냥케 하여 그 본성대로 만끽하도록 해 주어라.” 이르며, [란하(鸞河)에게] 민전(緡錢) 10만과 술을 하사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