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한 상 차려놓고 / 김주선
경남 삼천포항 근처에 사는 친구로부터 아이스박스에 담긴 택배가 도착했다. 태양력의 절기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흙냄새로 자란 친구였다. 조선소 근처에서 청춘을 보내더니 바닷가 사람이 다 되었나 보다. 태음력을 꿰고 물 때를 헤아리는 걸 보니 제법 갯내가 난다. 상자에는 꾸덕꾸덕 말린 가자미와 새끼 딱돔이 해조류 위에 끼리끼리 포개져 누워있다. 입덧 때 즐겨 먹던 다시마 부각처럼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내면 바다가 한 상 차려지겠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바다를 본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첩첩산중 내륙지방 감자바위 출신이라 대관령의 명태덕장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바다는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밭을 닮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싸릿가지로 엮은 지게 소쿠리가 보리밭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면 창창 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일 것이라 막연히 동경하며 자랐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에서 포항제철로 견학을 하러 가면서 처음 바다를 보았다. 낭만을 느낄 나이는 아니었지만 처음 바다를 보는 것이라 흥분되고 설레었다. 담임은 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워 찬물에 세수를 시켰다. 수십 명의 학생이 세면장으로 한꺼번에 모이자 북새통이었다. 여관의 앞마당에 받아놓은 염수가 수돗물인 줄 알고 머리를 감았다가 수세미처럼 뻣뻣하게 엉켜버린 머리카락 때문에 온종일 속상했다. 가뜩이나 멀미로 지친 여린 몸뚱아리를 해풍이 어찌나 물어뜯던지 치마를 움켜잡고 종종거리기 바빴다.
아침 녘 강물처럼 반짝거리는 물결이 넘실거릴 줄 알았는데 바다도 하늘도 내 마음처럼 먹색이었다. 포항 앞바다에서 단체 사진 찍은 기억 외에 그 흔한 등대 하나 못 보고 돌아왔다. 청보리밭이라니, 엄마의 거짓말이 하얗게 부서졌다.
농부는 농사짓는 일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자식들을 대처로 보냈다. 서울로 보낼 여건이 아니면 공고나 공대를 보내 대기업의 산업현장에 세우거나 울산이나 거제지역의 조선소로 많이 보냈다. 농부에게는 바다만 한 넓은 세상이 없었던 모양이다. 섬사람은 그리운 서울을 가고파도 못 간다고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랫말이 생겼을 터다. 농부나 어부나 너른 세상에서 자식을 크게 키우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았으리라.
조선소에 취업한 형부를 따라 작은언니는 울산으로 이사 갔다. 신혼집에 놀러 갔다가 방어진과 주전 몽돌해변에 홀딱 반했던 때가 아마 스물이었을 것이다. 바닷물에 검은 돌이 사그락사그락 콩 씻기는 소리를 내고 몽돌을 품은 솔숲에서 향기가 날아왔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에 비치어 일렁거리는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상상하던 은빛 모래밭이 아님에도 마음을 씻고 귀를 씻어 주고 싶을 땐 몽돌을 씻어내는 파도 소리를 들으러 갔다. 주워가지 말라는 몽돌 두 개를 기어이 주머니에 숨겨와 호두알처럼 몇 년을 굴렸더니 짠물 같은 갈증을 느꼈다. 바다로, 바다로 자꾸만 가고 싶었다.
강원도 최북단 고성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 7번 국도를 시작으로 전국의 해안도로를 누비기 시작했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변에서 갯내와 솔향을 온몸으로 느끼고 품었다. 어느 포구를 가든 흰 포말이 이는 방파제 끝에 등대가 서 있었다. 다정한 연인이 등대를 끌어안고 어찌나 사랑을 속삭이는지 주변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나도 가만 등대를 끌어안고 귀를 대보면 옛사랑이 그리운지 기분이 간질거렸다.
삼십 대의 아홉수에 이별 수가 껴 어쩔 수 없이 혼자 살게 되었다. 헛헛한 마음 둘 곳 없어 여행동아리에 가입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위로받고 싶었다. 생각과 달리 여행의 컨셉은 풍경, 사람, 음식, 그리고 어촌이나 섬을 취재하여 리뷰를 쓰는 노동에 가까운 동아리 활동이었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모여있는 서해와 달리 파도가 거친 동해에서 만선의 배가 강구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치열한 해전이었는가를 알리듯 바닷바람에 찢긴 반쪽짜리 깃발이 휘날리면 수산물 위판장에 중개인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싱싱한 어물들의 경매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서울에서 동해까지 새벽에 도착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 마리라도 흘린 생선이 있으면 주워 먹으려고 갈매기조차 치열한 눈치싸움을 하며 달려들었다. 위판장의 분주한 모습에서 어부의 애환과 활력이 느껴졌다.
아기자기하게 섬이 떠 있는 통영 앞바다와 삼천포, 여수 오동도까지 차창 밖으로 일렁이는 봄날의 바다가 참 좋았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출어를 기다리는 배들이 포구에 정박해 있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남도 갯마을의 풍경은 산촌의 그것과 달랐다. 어디를 가나 빨랫줄에 생선이 걸려있거나 오징어가 걸려있고 더러 여인의 낡은 속옷이 미역 줄기처럼 흔들릴 때도 있었다. 아낙들의 억센 손이 그물코를 여미느라 쉴 틈이 없고 대나무 발에 널린 멸치와 잡어가 한창 마르는 중이었다. 먹어줄 사람도 없는데 말린 수산물을 기념품처럼 사다 나르며 허전한 냉장고를 채웠다. 어촌이라고 어부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어민이 땅을 일구어 해풍을 맞아가며 농사를 짓기도 했다. 배 한 척 없는 집도 태반이었다. 서울 촌놈들은 물 때를 몰라 배를 기다리기 일쑤였고 인정 많은 누군가 조류 시간표를 쥐여주면 여행의 고단함을 잠시 잊었다.
한 달에 보름 간격으로 초승달이 채워지고 보름달이 비워지는 달의 시계가 있다. 달 모양에 따라 바다가 채워지고 비움을 반복하는 ‘사리’와 ‘조금’의 물 때가 알고 보니 욕심부리지 말라는 자연의 가르침인 것이다.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다가 설령 공선(空船)으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을 알고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 어부인 것이다. 인생에도 채운 욕심을 비워내야 할 때를 알았다면 나의 사랑은 온전했을까. 하루에 두 번씩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벌거벗은 갯벌이 다시 차오르는 만조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저녁 밥상에 삼천포 앞바다를 한 상 차려놓고 보니 새삼 미역을 불리던 노모가 생각난다. 혓바닥에 낀 백태를 벗기듯 소금기 묻은 딸애의 마음을 씻기려 미역을 치대고 있었을 것이다. 막막한 세상에 등명기를 켜 나를 인도했던 불빛이 엄마였다는 것을 알기에 바다를 그리며 떠돌다가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미역국 한 사발과 구운 가자미, 멸치조림, 다시마부각 그리고 오도독 씹히는 톳무침까지, 생일날 같은 한 상이었다. 벅차오르는 설렘보다는 위로가 절실했던 서른아홉의 생, 엄마가 차린 바다는 맛 못 할 뭉클함이 있었다. 위로받고자 찾아다녔던 바다는 결국 갯내 나는 엄마의 밥상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나의 주방엔 6인용 식탁이 놓이고 가족이 늘었다. 가자미 살을 발라 밥숟가락 위에 올려놓는다. 온 가족이 바다를 삼키듯 밥을 먹다 보니 어느새 붉은 노을이 어깨너머로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