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10 기획 <향후 10년간 버리고 채워야 할 10가지들> (2)스토리 문화를 일구자
▶▶버려야 할 것
허 영만 화백의 ‘타짜’와 ‘식객’,박소희씨의 ‘궁’,정혜나씨의 ‘탐나는도다’ 등 최근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이 된 한국 만화들은 탄탄한 서사 구조를 과시하며 문화콘텐츠의 주춧돌 역할을 톡톡히 했다.그러나 이는 한국 만화 단행본 시장의 열악한 구조속에서 가까스로 버텨온 극히 일부의 사례다.
한국만화 단행본 시장에도 ‘르네상스’가 있었다.약 20여년 전,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만화에는 폭넓은 저변의 독자들이 있었다.당시 구조는 만화잡지에 연재된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흐름이었다.‘아이큐점프’ ‘윙크’ ‘나나’ 등의 만화잡지가 인기를 끌었고,이 잡지에 연재된 만화들은 단행본으로 나와 시장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인기 만화가들은 팬사인회 등을 열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이때 출간된 만화들 중 김진씨의 ‘바람의 나라’나 신경숙씨의 ‘리니지’ 등은 인기 온라인 게임의 모태가 될 정도로 상품성과 대중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폐간¨절필의 세월
그 러나 10여년 동안의 활황기는 곧 된서리를 맞았다.가장 큰 요인은 만화 저작물의 불법 유통이었다.속칭 ‘스캔본’으로 통하는 불법 저작물은 만화 잡지 연재분이나 단행본을 한장 한장 스캔해 압축파일로 만든 형태로 P2P 사이트 등을 통해 유통됐다.만화저작권보호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스캔 파일 유통으로 발생한 피해규모는 240억원으로 추정된다.
주독자층인 학생층은 더 이상 구매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고,만화잡지 시장과 단행본 시장은 급격히 위축됐다.여기에 과거 조악한 ‘해적판’으로 돌아다니던 일본만화가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정식 라이선스판으로 들어오면서 한국 만화의 위상은 더욱 추락했다.
수익 성이 떨어지자 만화잡지 폐간이 잇따랐고 단행본의 숫자도 줄어들었다.작품을 연재할 공간인 잡지의 개수가 줄어들자 만화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절필을 하게 되는 상황에 몰렸다.신인 등용문도 좁아져 독자들은 더욱 멀어져갔다.여기에 잡지 폐간 등으로 장기 연재 만화가 퇴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아무리 만화가 재미있어도 완결판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소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져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 상 만화가 완결됐을 때도 전권을 구입하려 해도 몇년 전에 나온 1권이 이미 절판돼 구할 길이 없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단행본 시장에는 이미 만화계의 ‘고전’으로 자리잡아 어느 정도 기본 판매 부수가 보장된 만화 작품의 ‘애장본’들이 많이 출간됐고,대신 새로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만화평론가인 선정우 코믹팝 대표는 “‘문고본’과 ‘애장본’을 구분해 출판하는 방식을 확대해 다양한 수요를 충족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신진 작가들을 과감하게 발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화는 소프트산업의 기초
오 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 만화의 돌파구로 최근 떠오르는 공간은 웹이다.웹툰을 통해 가장 성공을 거둔 작가로 꼽히는 강풀씨의 ‘순정만화’‘바보’‘아파트’ 등은 연극 무대에 올랐고 영화화되기도 했다.역시 웹에 연재됐던 강도하씨의 ‘위대한 캣츠비’는 드라마와 뮤지컬의 원작이 됐다.
신경순 한국만화가협회 사무국장은 “만화 시장이 살아나려면 스타 작가의 탄생이 절실하다”며 “만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것,교육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성인들 사이에 ‘만화도 여가시간에 즐길 만한 문화상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게 패착 중 하나라는 분석이다.
만화비평가 김남훈씨는 만화의 질 문제와 창작자들의 수익성 문제를 지적했다.그는 “만화를 사서 보는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만화는 빌려보거나 공짜로 보는 것’이란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씨는 또 “보통 만화 단행본 시장에서 1만권이 팔리면 ‘대박’인데,이때 수익이 10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며 “작가가 공들여 한 권을 그릴 때 소요되는 시간을 1년으로 잡으면 문화콘텐츠 중에서도 수익성이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상력을 매개로 방대한 콘텐츠가 펼쳐지고 있는 만화 시장을 이런 상태로 방치할 경우 한국 소프트산업 전체의 기초체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실제 만화콘텐츠가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으로 진출 영역을 확대해나가고,그 중에 상당수는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최근 세계 문화계의 흐름이다.
따라서 단순히 침체된 한국의 만화시장을 살리는 차원이 아니라 서비스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우리 만화시장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한다는 얘기다.
전 황수 한국출판만화협회 사무국장은 “한국 영화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나 661만명을 동원해 역대 한국영화 관객수 14위에 랭크된 ‘미녀는 괴로워’ 역시 만화가 원작”이라며 “저작권에 대한 인식 확산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를 한 것처럼 만화 시장에도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하루빨리 자리잡아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토리 산업은 부가가치가 높다.제조 금융 서비스 관광산업 모두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준다.제대로 된 스토리 기업 하나만 일궈도 해당 국가 전체의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효과가 있다.
세 계에서 가장 많은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 만화의 경쟁력은 ‘재미있다→많이 팔린다→시장이 커진다→더 재미있는 작품이 나온다’의 선순환 구조에서 나온다.일본에서 전철을 타보면 승객의 절반 정도는 책을 손에 들고 있다.그 중 절반은 만화책을 본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전혀 거리낌 없이 만화 잡지를 탐독한다.이유를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재미’다.
◆경험을 담는 스토리
일 본 만화 중엔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접해봤을 만한 만화로 ‘드래곤볼’도 있고 지난해 한국에 ‘F4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꽃보다 남자’도 있다.최근 초·중·고 학생들을 사로잡고 있는 ‘원피스’나 ‘나루토’도 일본 만화다.
장르도 판타지 순정 닌자 등으로 다양하다.연령층에 맞는 다양한 장르 개발도 일본 만화의 강점이다.직장인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시마과장’이나 도박꾼이 주인공인 ‘도박묵시록 카이지’같은 만화는 한국에서도 성인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경험과 스토리 라인을 가진 작가들의 역량이 작용하고 있다.일본에서 1억부,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농구선수였다.이 만화에 등장하는 각종 농구 기술과 용어는 농구 입문서로 쓰일 정도로 적절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다.
사채업자의 얘기를 그린 ‘나니와금융도’의 작가 아오키 유지는 44살까지 술집이나 파친코 종업원으로 일하며 소위 ‘뒷골목’ 경제를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10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만화도 국격을 높인다
신 의 물방울만 해도 스토리 라인이 풍부하기 이를데 없다.대결구도의 주인공들인 이복형제는 아버지가 남긴 엄청난 와인 컬렉션과 유산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아버지는 ‘신의 물방울’로 표현한 궁극의 와인과 그에 필적하는 12가지 와인인 ‘12사도’를 찾아내는 아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유언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와인을 마시고 난 다음의 느낌을 그림이나 풍경,음악 등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감상법을 제시하고 거기에 맞는 와인을 맞히라는 것이다.
1 년의 기한 동안 더 많은 정답을 찾는 아들이 대결에서 이겨 수천억원대에 달하는 아버지 와인 컬렉션을 비롯한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다.퀴즈에는 밀레의 ‘만종’같은 그림이나 일본의 전통시인 ‘하이쿠’ 등이 키워드로 등장한다.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문화적 소스를 즐기며 작가가 깊이있게 취재한 지식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쿨 재팬(매력적인 일본)’이라는 문화 흐름도 만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쿨 재팬’이란 일본인들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패션 등으로 대표되는 자국의 대중문화를 자부심을 섞어 부르는 말로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쿨 재팬’운동을 통해 전 세계에서 국가 브랜드를 굳히면서 아울러 국부를 창출하겠다는 21세기 국가전략을 펼치고 있다.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의 만화잡지 ‘모닝’의 쓰카하라 가즈유키(塚原克之) 부편집장은 “일본에서도 성인이 만화를 보는 문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됐고,직장인들이 만화잡지를 하나씩 들고 타는 풍경은 1990년대 들어서부터 본격화됐다”며 “사람들이 만화 게임 등 일본의 독특한 대중문화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만화 시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거대 만화기업
일 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드래곤볼’은 연재를 마친 1995년 1억1000만부가 팔렸으며,이후로도 판매량을 지속적으로 늘려 연재 종료 10년이 지난 시점인 2005년에는 1억9000만부를 기록했다.전 세계적으로는 3억5000만부가 팔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현재는 2000년대 최고 히트작으로 꼽히는 ‘원피스’가 누적 판매량 1억7600만부로 드래곤볼을 추격중이다.
‘꽃보다 남자’는 6000만부가 넘게 팔려 역대 순정만화 판매량 1위를 지키고 있다.덕분에 시마과장의 출판사 고단샤와 드래곤볼의 슈에이샤는 일본 1,2위 만화 출판사인 동시에 종합 출판사로서도 1,2위를 다투고 있다.
1909 년 설립된 고단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한국명 상실의 시대)과 같은 순수 문학 단행본에서부터 50여종의 잡지까지 출판의 전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2008년 매출은 1350억엔(약 1조6000억원)이며 종업원 수는 1000여명에 이른다.한국의 웬만한 중견기업보다도 많은 매출이다.쓰카하라 부편집장은
“일본에서 인문계열 학과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 고단샤나 쇼하쿠칸같은 대형 출판사”라며 “입사 후 7~8년차가 되면 연봉 1천만엔 정도를 받는다”고 말했다.
고단샤나 슈에이샤는 만화 제작에 엄청난 자원을 투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주간 만화잡지인 ‘모닝’에는 편집자만 50명이 넘는다.국내 만화잡지인 ‘찬스’나 ‘챔프’의 편집자가 5명 내외인 것에 비하면 10배가 넘는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에서는 한 만화당 5명 정도의 편집자가 작품 회의부터 취재까지 참여해 작가를 지원한다”며 “요리나 의학만화 같은 특정 장르의 만화를 생산할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