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7-16 03:00
한중일 공통 콘텐츠 ‘서예’ 보급 확대되길[이즈미의 한국 블로그]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한국에서는 서예(書藝),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화선지에 글을 쓰는 행위와 이를 작품으로 여기는 것은 동일하다. 이 때문에 서예야말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공통 문화 콘텐츠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교수님 연구실에 가면 서예 작품이 있었다. 지인의 집에 가도 그랬다. 공공장소에 한글 서체로 쓰인 글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일본에는 다다미방에 도코노마(床の間)라는 공간이 있어 계절마다 서예 족자를 걸었다. 삶을 비춰 볼 만한 큰 경구나 마음을 울리는 소소한 글. 쓰임과 형식은 달라도 서예가 생활 속에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나는 무척 반가웠다.
얼마 전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소지도인 강창원’전을 봤다. 또 서울 인사동에서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一中, 시대의 중심에서’전, 한양대 박물관에선 서예가 박진우 작가의 ‘먹으로 그린 우주’ 전시를 연이어 관람했다.
소지도인 강창원 선생(1918∼2019)의 작품은 문기가 넘치고, 욕심 없이 자유롭고 온순했다. 특히 그의 서예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중국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서권기(書卷氣)가 녹아 있어 무척 반가웠다. 작품을 통해 삶을 보는 듯했다. 그는 어릴 적 중국에서 서예를 배웠고, 이후 한국의 대학이나 서실에서 서예 교육자로 지내며 서예계의 파벌 다툼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국전에 출품하지 않았다고 한다. 닮고 싶은 글씨고, 닮고 싶은 분이다.
일중 김충현 선생(1921∼2006)은 모든 서체에 능한 분이셨다. ‘일중’이란 호처럼 그 시대 서예계의 중심에 계셨던 어른이다. 선생의 서예 인생은 한국 근현대 서예계 변천과 발전을 두루 담고 있다. 특히 교육과 보급 업적이 크다. 1957년 ‘동방연서회’라는 서예연구회를 설립한 창립 멤버로 서예 교재를 만들고 교육을 주도했다. 한글 서체를 확립시켜 책과 잡지의 제목, 회사명, 공공장소의 제자(題字) 등으로 서예 보급화에 노력했다. 내가 한국에서 많이 본 글씨들로 익숙하게 느꼈던 것이다.
두 전시를 통해 훌륭한 작품들을 본 것은 물론이고 근현대에 서예문화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켰는지 그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다. 전시를 보러 온 관객층이다. 전시장에 머무는 동안 대부분 고령의 관람객들만 만날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서예가 다가가는 길은 없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박진우 작가의 전시에는 젊은 감성이 살아 있었다. ‘모두가 낡고 고루하다고 여기는 서예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목표가 전시에서도 엿보였다. 전시에서 작가는 우주세계를 먹으로 표현했는데, 퍼포먼스처럼 보이는 ‘씨앗 우주’ 작업 영상을 함께 보니 더욱 이해가 쉬웠다. 생명의 근원인 씨앗과 먹을 이용한 작가의 작업은 심오한 우주를 닮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전시를 보며 현대 서예가로서의 고민이 느껴졌다. 그는 서예의 현대적인 해석, 먹(墨)과의 소통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전시 기간에 한양대 서예동아리 학생들과 워크숍도 했다고 한다. 앞서 두 전시에서 젊은이들이 없어서 들었던 아쉬움이 조금 해소되는 듯했다.
일본에서는 최근 ‘서도 퍼포먼스 고시엔(書道パフォ一マンス甲子園)’이라는 재미있는 서예 행사가 화제다. 고등학교 서예부 소속인 15명 이내 학생들이 4×6m의 커다란 종이를 두고 음악에 맞춰 춤추며 서예를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대회다. 다양한 주제에 미술, 음악, 춤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2008년 일본 시코쿠 지역에서 시작된 이 대회는 순식간에 퍼져 전국 행사가 됐다. 2010년에는 ‘서도걸즈(書道ガ一ルズ!!わたしたちの甲子園)’라는 청춘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다. 2019년 제12회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나가노현 학생들의 작품에는 커다란 스마트폰이 등장한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미를 주는 서예를 더욱더 아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중일 3국의 공통 콘텐츠인 서예 문화가 디지털 세대라는 젊은층과 더욱 소통을 넓힐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 어느 극작가의 불치병 (따뜻한 편지 2321)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항상 죽음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병에 걸렸다고 판단한 그는 여느 때처럼 주치의를 호출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으니 빨리 회진을 와주십시오!”
평소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의사는 진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고
간파했습니다.
그의 집을 찾은 의사는 일부러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습니다.
버나드 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오?”
“급히 오느라고 심,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놀란 그는 벌떡 일어나 응급약과 마실 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간호하다 보니 시곗바늘이 한 시간을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의사는 그제야 옷매무새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버나드 쇼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진료는 끝났습니다. 회진비를 부탁드립니다.”
“진료라니 무슨 말이오? 내가 의사 양반을 간호하지 않았소.”
버나드 쇼가 눈이 동그래져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버나드 쇼는 깨달았습니다.
간호에 집중하는 동안 그를 둘러쌌던 알 수 없는 통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버나드 쇼의 병은 단지, 죽음에 대한 걱정에서 온 우울과 무기력이었던 것입니다.
‘의식(意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느끼거나 특별히 염두에 둔다는 뜻입니다. 반면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의식'할수록 건강에 대한 염려로 더욱 우울하고 무기력해집니다.
물론,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제때 치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병을 ‘의식’하여, 그 생각에 매몰되어 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가 생각을 제대로 변화시킬 때만 다른 것들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 존 맥스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