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최동훈 감독이 말한다..‘암살’ 키워드 “김원봉부터 의열단까지, 잊지 말아야..”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제작 케이퍼필름)은 영화적 완성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가치 부여로 또 다른 감동을 낳았다.
31일 오전 기준 502만5037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여 1000만 관객 고지를 향해 순항 중이다. 1930년대 강제병탄의 치욕에 빠졌던 영화 속 당시 역사는 미·일·중 3국의 치열한 외교 전쟁이 벌어지는 현재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영화 ‘암살’이 요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준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암살’ 속 곳곳에 숨어 있는 신흥무관학교, 간도참변, 의열단, 지청천부대, 김원봉, 김구, 데라우치 등 키워드로 알아본다.
① 신흥무관학교
‘암살’의 메가폰을 잡은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의 단초를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됐다. 바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이다. 우당 이희영은 한 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섯 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밀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했다.(이상 두산백과 출처)
‘암살’에 생계형 독립군 ‘속사포’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의 마지막 멤버로 표현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만주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다. 독립군 지청천(일명 이청천)이 300여 명의 신흥무徨閨� 졸업생과 생도들로 부대를 구성,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일제가 1920년 5월부터 대대적으로 독립군 탄압에 나서면서 같은 해 폐교되었다.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고 독립운동의 꿈을 키운 속사포의 자부심 넘치는 모습은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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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실제로 독립군 이야기를 품게 된 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 때문이다. 나 같은 범인들은 갖지 못한 어떤 위대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겠지만 결단이나 행동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걸 영화에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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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간도참변을 겪은 안옥윤 역을 맡은 전지현. | |
② 간도참변
간도참변은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국인사회·항일단체·학교·교회 등을 초토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1921년 4월까지 수많은 한국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약탈을 일삼고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컬어 ‘간도참변’이라 한다.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국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출처 두산백과)
‘암살’에서 신념의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분)은 간도참변으로 어머니를 잃은 인물로 그려진다. 극 중 담담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는 ‘안옥윤’(전지현 분)의 모습을 통해 끔찍했던 간도참변의 실상은 물론, 그녀의 신념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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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만주에서 독립군들과 함께 살았던 안옥윤은 어떤 일들을 겪으며 컸을까? 그녀가 가진 신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나라를 잃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 그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희망. 어린 안옥윤은 그 속에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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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활약을 다룬 당시 기사. | |
③ 의열단
의열단은 아나키스트 성격을 띤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이었던 3·1운동의 실패가 일본의 폭력으로 인한 것이라 판단하여 ‘암살’을 해방을 위한 정의로 삼았다. ‘암살’에서는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등장해 암살 작전에 대한 그들의 투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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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일제 강점기에 의열단은 친일파나 일본 관료들을 암살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이 쓰신 의열단 창단 선언문은 힘찬 어조와 기개가 빛나는 명문으로서 깡패일본에 무장투쟁으로 항거함이 정당하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김구와 김원봉이 힘을 합친 건 역사에선 1939 이후의 일이다. 그 역사적인 배경을 놓고 허구의 인물들이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암살’의 배경이 1933년이니 더 앞당겨 만들어낸 이야기다.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 내건 현상금이 100원이다. 김구가 60원이었고, 그때 일본의 만주철도회사가 세운 조선호텔 건설비용이 120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친일파를 처단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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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장군 | |
④ 지청천 부대
1930년 지청천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1933년 7월 3일 한중연합군은 대전자령에 매복,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암살’에서는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이 한국독립군 이청천 부대 제 3지대 저격수 소속으로 등장한다.
△최동훈 감독 曰,
“1933년은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의 한 국면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광복군이 만들어졌을 때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했던 지청천 장군은 당시 만주에서 무력조직을 이끌고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인물이고, 실제로 그 해에 지청천 장군이 대전자령전투에서 중국군과 함께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더욱 영화 속 배경 즈음인 1933년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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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였으나 사회주의자인 약산 김원봉. | |
⑤ 김원봉
김원봉은 김구와 필적할만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6년여에 걸쳐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했고, 이후 김구와 함께 공동으로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문을 발표하는 등 연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일제는 ‘김구’에게 60만원의 현상금을,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기준으로 따지면 약 200억~300억에 달하는 금액이다.
‘암살’에서는 김구와 함께 암살작전을 계획하고 해방 이후 조국의 운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추억하는 김원봉(조승우 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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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김원봉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했던 존재였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을 정도로 일본 입장에서는 꼭 잡고 싶은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고 정말 잘생겼었다. 부인 박차정 여사가 중국에서 죽었는데, 김원봉이 한국에 올 때 박차정 여사의 옷을 가슴에 품고 왔다. 부산에서 ‘암살’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박차정 여사의 생가가 있더라. 그 때, ‘과거에 있었던 사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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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 |
⑥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는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14년 탈옥하였고,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으며,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였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암살’에서는 임시정부의 지도자로서 김구의 암살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리더로서의 진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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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이봉창과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상하이 일본영사관은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김구선생은 항저우 인근 가흥에 은거하고 있었다. 영화 ‘암살’의 시작은 김구 선생의 가흥 시절에서 시작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김구선생의 너털웃음을 짓는 호방함과 동시에 냉철하고 단호한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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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데라우치 암살 시도로 영화 오프닝을 여는 이정재(가운데) | |
⑦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
‘데라우치 총독’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실존인물이다. 그는 무단통치를 자행하여 순사와 헌병을 거리에 배치해 국민을 감시하고 모든 정치활동과 언론을 중지시켰다. 1910년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진영은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를 계기로 총독부는 김구 등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고문을 통해 거짓 진술을 받아냈다. 이를 통해 105명을 기소하여 독립운동을 차단하였는데 이를 ‘105인 사건’이라 한다. ‘암살’의 오프닝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염석진’(이정재 분)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작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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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曰,
“일제 강점기가 막 시작된 1911년. 권력의 핵심에 있는 데라우치 총독과 이완용과 손을 잡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친일파가 되어가는 강인국의 캐릭터를 여기서 시작하고 싶었다. 동시에 24살의 염석진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홀홀 단신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한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참지 못하는 당시 어린 청년들의 모습도 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