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청주] 내 말을 잘 지켜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15, 1 - 2. 22 - 29
† 제2독서 : 묵시 21, 10 - 14. 22 - 23(또는 22,12-14.16-17.20)
† 복음 : 요한 14, 23 - 29(또는 17, 20 - 26)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왔는데,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뜻이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남기신 평화를 얼마나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 성찰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당신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에 참평화를 이루어 주시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대한다. 그리고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안티오키아에 바오로
사도의 일행을 파견한다(제1독서).
★ 파트모스의 요한은 환시를 통하여 천상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곳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났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어 비추어 주고 있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며, 보호자 성령과 함께 평화를 남기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번역에 한 삶을
오롯이 바치고 꼭 10년 전에 하느님의 품에 안긴 제주교구의
임승필 요셉 신부가 남긴 마지막 강의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남부군』이라는 책을 보면 빨치산과 정부군 사이의 총격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들판
한가운데에 강아지 한 마리가 총소리에 놀라 어쩌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때 강아지 주인으로 보이는 한 꼬마가
그 강아지를 데려가려고 들판 한가운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빨치산과 정부군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격을 멈춘 것입니다. 총소리가
진동하던 그 들판에 한동안 침묵이 흐릅니다. 그 꼬마가 강아지를
데리고 들판을 빠져나갈 때까지 말입니다.
무엇이 그들의 총을 멈추게 했습니까? 그것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힘없고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그 작은 꼬마둥이였습니다. 오히려 아이 하나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이념을 잠시 포기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가 강한 힘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평화는 강한 무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군사력이 가장 강한 미국 시민들이 가장 평화로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총기 사고와 강도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 미국이 가장 평화로운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강한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패배와 용서,
희생과 낮춤을 통하여 당신의 평화를 남기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 말을 잘 지켜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2013년 다해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요한 14,23-29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내 말을 잘 지켜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하고 그로 인하여 내적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됩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하느님과
아들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왜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안에 온갖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안내되어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거기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여정에서 주님의 말씀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을 빌미로 상대의 얘기를
듣기보다 오히려 내 뜻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술에는 주세, 물에는 물세가 부과된답니다. 그런데 말을 함부로 하면
말세랍니다. 우리는 말을 잘 해야 하고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집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게 되면 육으로는 고달프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행하였기에 내면의 기쁨은 크고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밖’을 지키는 데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쟁준비를 잘해야 평화가 오는 줄 압니다.
제주강정마을을 가보면 담장을 치고 감추면 평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쌍용자동차해직자들을 비롯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매스컴에 내보내지 않으면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감추고 속이는 이들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당하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평화는‘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먼저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2,14-17).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은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죄악으로부터 자비를 입어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평화의 기도'(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St. Francis of Assisi>
Prayer For Peace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양심의 박수갈채를 얻어내는 그리스도의 계명
2013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복음 : 요한 14,23-29
< 양심의 박수갈채를 얻어내는 그리스도의 계명 >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 ‘그 한 사람이 그대의
커다란 바다다’란 단락에서 참 사랑은 불안해하여 여러 사람을
놓고 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연애용어로 ‘어장관리’란 말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장관리: 실제로 사귀지는 않지만 마치 사귈 것처럼 친한 척하면서
자신의 주변 이성들을 동시에 관리하는 태도, 형태를 의미하는 신종
연애용어.’
남자나 여자가 ‘이 사람이다’ 싶을 때까지 자신의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자기 범위 안에 가두어 놓는 연애
행태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여자와 친해져서 데이트도 여러 번
하고 영화도 보고 손도 잡아서 남자가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면
여자는 이내 냉랭해지며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싫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도저도 아니게 자신의 주위에 맴돌게
만들어 놓은 다음 다른 남자를 또 사귀어보는 것입니다.
김난도 교수가 사례로 들고 있는 A란 여자도 매우 인기 있는
여성이었고 이런 식으로 주위에 남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A양은
집안의 권유로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결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장관리를 하면 선택권이 많아서 가장 좋은 사람을
고를 것 같지만 대부분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A란 여자도 그 많은 남자가운데 선택하여 결혼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이혼해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선택권이 있어서 선택을 해도 최상의 선택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신의 수준이
그런 얕은 수준에 머물러있기에 그런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그 수준에 맞는
상대를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져있다는
말이 됩니다.
전에 얼굴에 천연두로 생긴 상처로 가득한 그레이스란 여자가 결국엔
하버드 대학의 가장 멋진 남자와 결혼하여 둘이 모두 미국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레이스는 자기 얼굴의 상처가
하느님께서 전염병에서 자기만 살려주신 징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매우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도 예쁜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떤 좋은 일에 쓰시기
위해서 그렇게 마련하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먼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장관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많은 이성 친구를 둔 것에 만족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만 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느끼기에 불안하여 다른 보험을
들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존감이 떨어져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자신
안에 풀지 못한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싸움을 자주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싸우면
아이들은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약 20년 전에 이경규씨가 진행했던 몰래카메라에서 이승환씨가
크게 당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축제에서 노래를 하는데 미리 짜놓고
그가 나올 때부터 관객들이 박수를 하나도 치지 않습니다. 첫 노래를
부를 때는 노래와도 전혀 맞지 않는 춤을 추는 사람이 나오고, 두
번째 곡을 할 때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승환씨가 받았을 충격은 몰래카메라가 끝난
뒤에도 틀림없이 계속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수가
노래하는데 관객의 호응도 없고 그 사람들이 노래를 듣다가 나가
버린다는 것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버려지는
두려움’이 현실화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을 합니다. 그
관객이 박수를 쳐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그 관객이 이렇게 야유를
하거나 자리를 뜨는 등의 안 좋은 반응을 보이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 평화를 잃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기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가 평화이고 엄마를 잃고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이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평화를 깨지게 만드는 ‘관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나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관객이 ‘양심’
이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박수를 받기도 하고 야유를 받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께 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평화를 잃게 된 것은 이 양심이 자신들 안에 있으면서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근래에 경찰에서 자주 사용하는
‘거짓말 탐지기’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탐지기의 원리는 ‘신체의
자율신경계는 의식적으로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혈압, 호흡, 맥박, 땀의
분비, 피부에 흐르는 전기의 양 등에 영향을 주어 그것이 그래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제주올레길 여행객 살해범, 1월 강원 원주시에서
이삿짐을 나르다 물건을 훔친 이삿짐센터 직원, 7월 통영에서 노인
세 명이 지적장애 여성을 수년간 성폭행해 온 혐의 등이 거짓말탐지기로
그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난타 공연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서로
박자를 맞춰가는 그 모습과 리듬에 저절로 몸이 들썩이게 됩니다.
연극도 노래도 이런 난타 공연도 다 ‘대본’이 있습니다. 그 대본대로
하지 않으면 관객은 하나 둘 자리를 뜰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평화를 빈다!’라고 인사하신 이유는 바로 그 평화를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동요를 가라앉히실 분은 당신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겐 이미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가
바로 하느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브라디가 평화를 찾은 것은 지금까지 받은 대본대로가 아니라 자기
맘대로 대사를 읊으며 살아왔지만, 수녀님이 옳은 대본을 다시
쥐어준 것이고 오랜만에 그 대본대로 따라 읽어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대본이 주어져있습니다. 계명이고
말씀이고 그리스도 자체이십니다. 관객은 양심이고 그 양심은 사실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니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나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박수를 받으며
사는 것이 평화의 삶이고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고
그분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써 주신
사랑의 대본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세상에 기준에 젖어 사는 우리가 아닌
여러분에게 2개의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10초
이내에 말해보십시오. 즉, 곧바로 생각나는 대로 답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어느 옷 공장에서 다섯 벌의 셔츠를 만드는데,
다섯 대의 기계가 돌아갈 경우 완성하는 데 정확히 5분 걸립니다.
그렇다면 100벌의 셔츠를 만드는데, 100대의 기계가 돌아간다면
몇 분 걸릴까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어느 작은 연못에 수련이 자라고 있습니다.
자라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서 매일 수련이 덮은 늪의 표면이 두
배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연못이 수련으로 완전히 덮이는 데
48일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연못 표면 면적의 절반이 덮일 때까지는
며칠이 걸릴까요?
곧바로 우리 마음속에 떠오른 답은 아마도 100분, 24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는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5분, 47일입니다.
왜 그런지는 조금만 생각하시면 아시겠지요? 글 쓰는 지면이 적어서
그 이유는 적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머릿속에 즉각 떠오르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정답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여전히 심사숙고하지 않고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 답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평화도
그렇지 않을까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총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총기 휴대가 가능한 나라에서
오히려 총기 사고와 강도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전혀 평화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평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가십니다.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렇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더 큰 힘을 추구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평화를 위해 당신을 더 낮추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힘이 없는 분처럼 보이지요. 사실
이렇게 힘없음으로 어떻게 평화를 세상에 전해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폭력을 가져오는 막강한 힘이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에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했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를 떠올려 보세요. 그 나라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라는
거의 없지요. 하지만 반해 십자가라는 가장 힘없어 보이는 사랑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면서 진정한 평화를 계속해서 전해주고 계십니다.
세상에 기준에 젖어 사는 우리가 아닌, 주님의 기준에 젖어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닌,
사랑과 평화로 우리를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습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관심을 끌려고 하지 말고 관심을
보여라(마크 고울스톤).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때의 순수함이 영원하길...
내 안에 사랑 채우기
변호사 사무실을 새롭게 개업한 형제님께서 간절히 첫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유능하게 보이려고 바쁜 티를 내기
시작합니다. 우선 전화기를 들고 사건 해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전화기에서 손을 떼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분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중요한 사건에 대한 대화
때문에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전화를 끊고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요...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새로 전화 신청해서 전화 놓아드리려고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되나 봐요? 누가 먼저 와서 설치했어요?”
바쁘고 유능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상대가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전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요? 결국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간 꼴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 역시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힘주어 강조하셨던 사랑. 그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랑이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제로는 없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면서도, 안으로는
많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세속의 기준만을 따르고 있지요.
이러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으로부터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안을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순풍에 돛 단 듯이
2013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3-29(또는 17,20-26)
순풍에 돛 단 듯이
만사가 술술 잘 풀릴 때 우리는 ‘순풍에 돛 단 듯이’ 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오면 애써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순리입니다.
언젠가 젊은 혈기에 형제들과 함께 조잡하게 만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썰물 때여서 바다로 나갈
때는 엄청 쉽게 큰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썰물을 타고 나가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엄청나게 빠른 조류에 힘입어 순식간에 큰 바다로
나갔습니다. 큰 바다로 나가보니 파도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근해와는 달리 엄청나게 높은 파도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 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우리는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조류를 거슬러
겨우 겨우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만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불기 시작하면 애써 갖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손쉽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를
쓰지 않아도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활기차게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평화, 지상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영적인 평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관건은 우리가 어떻게 바람 같은 성령을 우리 안에서 활기차게
활동하시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것이니 우리의 힘을 빼는 작업, 하느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 하느님의 섭리에 우리 인생 전체를 맡기는 작업, 내가 주도권을
쥔 인생에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쥔 인생으로의 변환...이런 노력을
통해 활발한 성령의 움직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실 자리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잡다한 것들을 비워
내야겠습니다.
쓸 데 없는 걱정거리들, 괜한 두려움들, 우리가 억지로 지고 가고 있는
무거운 짐들...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 출발하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찬찬히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일들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대상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이것 저 것 너무
많은 곳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어내고 좋아하셨지 뭐가 되고 나서 좋아하시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너무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하려고 하면 넘어집니다.
우리는 작고 가난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뿐이지요. 우리가 해야 하고 오직 하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의 먹을 것, 우리의 입을 것, 우리의 시간과 선의를 그것이 모자라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지요.”
“슬픔의 잔을 고즈넉이 마시는 일이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입니다.”
“젊었을 때 나는 평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하나 알게 되었어요. 평화는 고통 가운데서, 혼란
가운데서, 병과 늙음 그리고 죽음 가운데서 하느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는 걸.”(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한겨레신문)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
2013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일 복음묵상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요한14,29)
----
오늘은 조금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거는 이미 떠난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결국 우리는 현재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현재는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동시에 만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늘 우리에게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쁨도 아픔도 두려움도 그 어떠한 감정의 단편들도 현재에만
허락된 움직임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며 현재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균형이 필요하며 그
균형은 현재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여기서 균형이라 하면, 지금의
나를 위해 과거를 올바르게 뒤돌아보고, 미래라는 다양한 가능성에
자신을 던져보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기에 현재가 좀 더 풍요롭기
위해서는 시간을 하나의 선상에서 보고 이해해만 한다.
균형을 잃을 때, 우리는 쉽게 과거에 묶여 살게 된다. 또한 미래에
대해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기도 쉽다. 그러니, 과거도 미래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과거를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거가 지금을 살아가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잘못된 방법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래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이 아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과 같은 요행이 희망으로 둔갑되어, 지금의
상황이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는 유치한 상상을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참된 의미의 희망이 될 수 없으며, 그저 현재의 시간을 죽이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현재의 내 모습과 연관될 수 없는 자신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현재이다. 현재 안에서 만나는 모든 감정의 단편들, 마음의
움직임들, 관계들,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미래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 모든 것의 열쇠는 현재에 달려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미래만 바라보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미리 알려주셨다
함은 바로 지금을 제대로 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말씀이 현재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를 위한 시간일
뿐이다. 그럴 수 있을 때 미래는 복음적으로 보장된다. ‘지금 바로
여기’가’ 내가 잘 살 수 있는 기회의 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사랑을 제대로 배워서 쓰려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결혼했으면서 왜 그리 쉽게 이혼하지요?
당신만을 사랑한다 했으면서 왜 한눈팔고 바람까지 피우는 거지요?
사랑이란 말을 할 줄 모르거나 그 의미를 모르고 쓰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이란 말을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사용하면 안 되지요.
사랑은 예수님이 내려주신 계명 곧 대자연의 법칙에서 이해해야지요.
사랑을 제대로 배워서 쓰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한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부활 제6주일
2013년 다해 5월5일 생명 주일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 중에는 일상의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
피정 중에는 주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피정과
휴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피정은 수동적인 면이
많습니다. 교구에는 사제 평생 교육원이 있고, 그곳에서 사제들의
피정 신청을 받습니다. 사제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피정을 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휴가는 능동적인 면이 많습니다.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갈
동료를 구하고, 장소를 정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휴가는 내가
좋아서, 원해서 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휴가를 다녀오면 몸도 마음도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비용도 많이 들곤 합니다. 수동적인
피정은 오히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마음이 맑아지고,
정화되는데, 능동적인 휴가는 지치게 하고, 간혹 친구들과 다투기도
하고, 후유증이 남기도 합니다. 제가 제대로 된 휴가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능동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수동적인 것일까요? 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내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힘을 주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이분은 40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이집트의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야 했고, 미디안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장인의 집에서 양을 돌보면서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낸 모세는 이제 또 다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모두
뺀 모세에게, 앞날에 대한 희망까지도 포기한 모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했다면
광야에서의 40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모세는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피정을 하는 것은, 신앙을 갖는 것은 이제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영화관에서 영화 보듯이 일주일에 한번 성당 구경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화는 미리 와서 좌석 확인도하고 예고편도 보고, 예매를
하기도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하는 자세가 적어도 영화 보는 정도의
정성보다는 더 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선과 아집, 권위로
군림하려는 일부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밤을 새워 우리를 지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 신음하는 형제들 보다는
외형적인 성장에 만족하는 교회의 장상들이 있습니다. 신도 수가 몇
명인지, 헌금은 얼마인지, 교구 납부금은 얼마인지 이런 숫자에는
민감하지만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은 몇 명인지, 고통 중에 방황하는
사람은 몇 명인지, 가정 방문이 필요한 교우는 몇 명인지 모른 경우는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제 1독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말을 잘 지키는 협조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칙은 사랑, 겸손, 희생입니다.
둘째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셋째는 소중한 것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부모, 가족,
이웃, 본당 공동체, 건강입니다.
넷째는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2개이고, 입은 하나인
이유는 한번 말하기 전에 두 번 들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갈등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다섯째는 몸과 마음을 단련 시켜야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는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영적으로 강해진 우리는
주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그동안 계속 이야기 하였듯이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 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