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최초의 전법승 동봉스님 이야기
만년설의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는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제작(1402)된 현존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킬리만자로는 '달의 산'으로 등장한다.
인류에게 '빛나는 산'으로 다가왔던 태산이다.
아프리카 대륙이 뿜어내는 원초적 힘과 고독을 느껴보려 동봉스님도 저 산으로 걸음 했었다.
그러나 정작 여행 중에 마주한 건 아프리카 53개국 어디에도 한국불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땅에 '불교 씨앗 한 알이라도 심겠노라!' 다짐하며 이듬해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갔다.
킬리만자로 최고봉인 키보봉으로 향하는 코스는 모두 7개인데 '마랑구' 게이트(해발 1950m)가 대표적이다.
동봉 스님은 그 곳에서 1.2km 떨어진 작은 마을 '마라외'에 터를 잡았다.
나무 아래 앉았다.
이방인의 명상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전했다.
탄자니아 고유 언어인 스와힐리어로는 '미미 나니(Mimi Nani)'다.
10여명이 앉더니 어느 새 100여명이 명상에 들었다.
한국어 발음이 적힌 '한글 반야심경'도 전했다.
명상에 들기 직전이면 어김없이 킬리만자로 기슭에 '모든 법은 공한 모습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늘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가 울려 퍼졌다.
이 땅에도 법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던 건 그때다.
'우리 절' 지원 속에 1억원을 들여 3에이커 규모의 땅을 매입했고, 이어서 법인 '보리가람 스쿨'도 세웠다.
한국에 잠깐 돌아와서는 '킬리만자로 문화센터 건립과 평화통일 염원 101일 국토 고행정진 대장정'에 올랐다.
인연이 닿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2억원을 지원했다.
그 덕에 동봉스님은 다르에스살람 키캄보니 무와송가의 땅 30에이커를 매입했다.
5년 후 그 땅을 조계종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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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스님은 2017년 11월 대각사 주지로 취임했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과의 인연에서 시작됐습니다."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Tonj)'라는 마을에서 한센병(나병) 환자를 돌보았던 이태석 신부는 지금도 '수단의 슈바이처'로 추앙받고 있다.
이태석 신부의 청으로 케냐 '나이로비(Nairobi)'에서 만났다.
"동봉스님은 탄자니아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학교를 세우려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예수님과 부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교회, 사찰보다는 학교를 먼저 세우실 것이라 믿습니다."
수단에 학교를 건립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태석 신부는 동봉스님과 함께 탄자니아로 건너 와 학교 부지를 살피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
"아마도, 학교를 향한 저의 열망이 은연 중 표출된 게 아닐까 합니다."
동봉스님은 강원도 횡성 갑천에서 태어났다.
동봉스님의 비유 그대로 '칡넝쿨로 산등성이를 이을' 정도의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천자문' '동몽선습' '계몽편'을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동네 서당에서 뗐으니 한글을 알기도 전에 한문을 깨우친 셈이다.
가난했기에 9살에 입학했는데 그마저도 4학년으로 끝내야 했다.
열다섯 살에 '명심보감'을 통째로 암기하자 유학을 지도했던 선생은 "땅 속에 묻혀 있는 옥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며 옥은(玉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 즈음 '논어' '맹자' '소학' '자치통감' '오언당음' '칠언당음'을 다 보았다.
'개천의 용'이 되어 보려 3년 동안 사법고시를 공부했으나 낙방했다.
허한 마음을 추슬러 충북 제천으로 발길을 돌려 1년 동안 머슴살이 했다.
새경으로 받은 건 쌀 여섯 가마니, 돈 10만원으로 바꿔 경기도 양평에 작은 밭뙈기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아랫마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다 길에서 스님을 만났다.
합장을 올렸다.
동봉스님의 속가 이모는 치악산 구룡사의 대보살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모 집 벽장 속에는 '법화경' '유마경' '팔상록' 등의 다양한 불교서적이 꽂혀 있었는데, 지식에 목말랐던 청년은 모조리 읽어버렸다.
"자넨 중이 될 상이야."
"중이 안 되면요?"
"주어진 삶을 다 살진 못할게야."
"출가하면 공부할 수 있나요?"
"그럼, 매일 공부하지."
꽃망울 터지는 이른 봄 구룡사로 들어가 삭발했다.
등산객과 참배객의 발길이 잦아 해우소 청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임했다.
도량 내 잣나무 심고 가꾸는 일도 행자 몫이었으니 수령 40년 잣나무는 거의 다 동봉스님의 손길이 닿은 나무들이다.
사흘 밤낮을 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염불삼매에 들만큼 정진의 힘은 남달랐다.
'큰 산에 거목이 서 있다'고 했다.
절에서 만난 선배·도반의 권유로 그해 가을 해인총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계종 종정과 해인총림 방장이었던 용탑선원 조실 고암스님 앞에 앉았다.
"구룡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고. 한문도 꽤 밝다고 들었네. 용성 큰스님의 사리탑비문을 읽을 수 있겠나? 사흘 후에 보자고."
사흘 뒤 번역한 비문을 들고 고암스님을 뵈었다.
고암스님은 용성스님의 오도송을 짚었다.
금오산에는 천년의 달빛 어리고
낙동강에는 만 리의 물결 일렁이네
고기잡이 배여! 어디메로 갔는가
묵은 갈대꽃만 바람에 흔들릴 뿐
"묵은 갈대꽃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라. 용성 스님도 그리 말씀 하셨는데 딱 맞았네."
고암스님은 그 자리에서 정휴(正休)라는 법명을 내렸다.
동봉(東峰)은 은사스님이 내린 법호다.
3년 후 고암스님은 옛 조계종 총무원 청사 5층의 종정실에서 동봉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우뚝솟은 동봉에는 맑은바람 둘러있고
(東峰大淸風)
잔잔해라 서강물은 밝은달을 머금었네
(西江含明月)
이들주인 누구냐고 입을열어 묻지말게
(莫問誰是主)
예로부터 영원토록 본디객이 없었나니
(自古永無客)
동봉스님은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52개월을 머무르며 말라리아 구제활동을 펼쳤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이 탄자니아도 식량부족 국가입니다.
탄자니아의 정치·경제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건 교육뿐입니다.
학교라는 이름의 공간이지만 부처님의 법음이 시작되는 도량이기도 합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아름다운 동행'에 감사드립니다."
동봉스님의 말라리아 구제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봉정휴선사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