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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대구, 변할 수 있을까? | ||||||||||||||||||||||||||||||
[기고-임성무 대구 정평위 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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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세 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남과 북, 그리고 대구.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구가 ‘이상한 나라’로 인식되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4·11 총선에서도 대구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새누리당을 당당하게 지지했다. 빨강색을 그렇게 싫어하다가도 새누리당이 빨강색을 입으면 그저 좋아한다. 애초 색깔에 대한 호불호는 없었던 셈이다. 이런 현상을 대구에 살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나 또한 35년을 살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경북 또한 마찬가지다. 제수 성폭행을 했다고 해도 국회의원으로 찍어주니 보수의 가치도 없다. 그저 바보거나 꼴통이라고 할 수밖에. 이를 잘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챙기는 인물이 많다.
대구? 권력의 땅? 대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대구만 가진 역사적 경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구가 한반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 온 다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긴 400년 동안 대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5현 가운데 조광조, 정영창을 제외하고 김굉필, 이언적, 이황 선생이 대구·경북 출신이다. 조선 중기 이후 영남 사림을 형성한 곳이다.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주요 대목에 안동 김씨, 대구 서씨 등이 등장하여 조선 정치를 파란으로 몰고 갔다. 한편, 대구·경북은 동학이 일어난 곳이고, 천주교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곳이 대구다. 동학이나 천주교가 뿌리를 내렸다는 말은 그만큼 생명평화 사상을 갈망해온 민중들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우배선 등의 의병장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이 있었고, 민족시인 이육사, 이상화 선생이 있었다. 성주에는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있었다. 현대사로 넘어오면서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항한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일으킨 지역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저항한 4·19 혁명의 도화선인 2·28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고등학생들의 이런 저항의식의 뒤에는 4·19 교원 노동조합 운동의 시초가 되었던 깨어있는 교사들이 있었던 지역이다. 그리고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인혁당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저항의 역사는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군사정권으로 이어져 오면서 단맛과 쓴맛을 보면서 퇴락해 갔다.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대통령 10명 가운데 4명을 두었고, 이들은 모두 33년간 권력을 누렸다. 안타까운 일은 3명의 대통령이 군인이었고, 이들은 모두 총에 맞아 죽거나 감옥을 다녀왔다. 많은 이들이 예측하듯 MB마저 감옥을 간다면 대구·경북은 정말 끔찍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구 경제는 전국 대도시 가운데 재정자립도가 53%로 광주 다음으로 낮고, 경북은 28%로 강원도와 비슷하다. 대구는 3대 도시의 명성을 잃은 지가 오래 전이다. 그래서 꼭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다 새누리당 잠룡들인 이재오, 김문수도 대구·경북 출신이고 원내대표인 이한구가 대구 출신이니 새누리당은 정확하게 말하면 대구·경북당이다. 대구·경북이 보수권력의 본향인 것이다. 이런 대구가 마음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지역이 광주다. 늘 광주와 비교 우위를 갖고 싶어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구는 작은 ‘삼성상회’로 시작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있었지만, 그 흔적은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이름에서만 찾을 수 있다. 대구 시장의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대구를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최근 10년간 대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몇 가지 오명을 갖고 있다. 1995년 4월 28일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로 102명 사망, 117명 부상 등 22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은 같은 해 일어난 삼풍백화점 사고 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건이다. 그리고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으로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8년 초등학생 성폭력 사건, 그리고 2011년 12월 20일 시작한 학교폭력으로 인한 청소년 자살사건은 6월 말까지 8명이 자살하여 '학생 자살 도시'라는 오명까지, 대구는 고담시(Gotham City, 미국 만화 <배트맨> 시리즈에 나오는 가상의 도시)의 오명을 갖게 되었다.
환경생태운동은 어떨까?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4.5km 앞산터널이 준공을 앞두고 있다. 가장 긴 터널로 경북과 충북을 잇는 4.6km 죽령터널이 있지만 앞산터널은 도심 터널이다. 5년간 반대투쟁을 했지만 강행했으며 팔공산터널을 뚫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구·경북에는 4대강 16개 댐 가운데 8개나 가진 낙동강이 있다. 왜 낙동강에만 이렇게 많은 대형 댐을 세웠을까? 그런데 줄줄이 사고를 내고, 비리가 터져 나온 곳도 이상하게 낙동강 댐들이다. 더 심각한 일은 핵의 위협이 코앞에 와 있음에도 경상북도지사는 동해안 원자력 클러스터 계획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우라늄 농축, 고속증식로 개발을 시도하여 동해안을 핵산업단지로 만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천년고도 경주 월성에 핵발전소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두환은 울진에, 이명박은 영덕에 핵발전소를 세우겠다고 하고, 여기에 핵 클러스트까지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런 심각한 일들이 대구·경북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오히려 좋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오욕의 역사 속에서 정의, 생명, 평화의 정신을 이어왔던 인물들과 민중들이 있었음에도 33년간 네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고 차기 대통령까지 대구에서 나와야 한다고 몰표를 주는 대구, 아니 조선 후기서부터 긴 세월을 권력의 부침과 함께 살아온 대구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어도, 한 시도 권력의 땅이라는 오명을 내려놓을 수 없는 심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정의평화 활동, 교구에서 시킨 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교회는 이런 특성을 가진 대구·경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험난한 시대를 살아 온 대구·경북 민중들과 고난을 함께해 왔을까?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는 교구 설정 100년을 맞으면서 사회사목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과거 교회 안에서 노동, 농민, 청년, 빈민, 교육운동을 해 온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활동 내용을 공유하고, 가톨릭농민회와 노동운동을 해 오신 허연구 신부를 면담하여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자료들을 모아 교구 100년사에 그나마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최근 대구 정평위 재출범 1주년 세미나에서 이찬우 신부는 "1970년대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대사회운동에 동참하여 민주화에 크나큰 기대를 모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70~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톨릭교회의 교세가 확장된 것의 주요 요인으로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사회운동 · 민주화운동의 동참을 지적하기도 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대구대교구는 한국 천주교회의 흐름에 맞게 어떤 대사회운동을 펼쳤을까? 이에 대해 이찬우 신부는 "대구대교구는 타 교구에 비해서 대사회운동이 많이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적확하게 표현하면 대구대교구의 대사회운동은 타 교구처럼 교구장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호응보다는 각자 움직여졌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대사회운동의 담당 위원회라고 할 수 있는 대구 정평위의 활동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이찬우 신부는 이렇게 정리했다. "1967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이루어진 정의평화위원회가 1990년 대구대교구에서 설립된다. 하지만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이 현재 대구대교구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처럼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내적인 교육에 치중되었고, 그에 따라 대구대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약 20여 년간 이어져오면서, 자체적인 활동보다는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에 의한 홍보가 주를 이루게 된다. 초창기의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은 사회교리에 대한 이해가 주된 활동이었다. 하지만 이 사회교리에 대한 이해는 활동이 없는 공부에만 치중되었고, 대사회적인 활동은 거의 전무했다. 물론 신자들에 대한 열려진 사회교리 강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사회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이 빠져 있고, 교구에서 시킨 일(?)에 적극적인 사제들이 정의평화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조정헌(신학교 교수) – 최시동(사무처장) - 김경식(본당사목 주교대리) - 이용호(교구 홍보담당 및 대구평화방송) - 최재영(대구평화방송) 신부였다." "귀 교구청에는 정평위가 없지만…" 이는 대구 정평위가 재출범(공식 출범)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2010년 11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2010년 활동을 정리하며 대구대교구에 보낸 공문이 ‘귀 교구청에는 정평위가 없지만…’으로 시작해 교구청를 자극(?)했다. 주교회의에서는 아무런 대사회적 활동이 없었던 대구대교구에 정평위가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대구 정평위가 이런 상태임에도, 2001년 3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은 고(故) 최영수 대주교(제9대 대구대교구장, 2007~2009년 재임)가 맡았다는 사실이다.
이 공문을 계기로 대구 정평위는 기적처럼 급속도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사목국장 김영호 신부(대구 정평위원장)가 급하게 전화를 했고, 나는 대구대교구 사제들의 눈밖에 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정평위가 안착되도록 하기 위해 가능하면 전문직에서 위원들을 찾아 나섰다. 약간 비겁하게 노동, 농민, 빈민, 청년, 여성, 장애 등의 영역에서 위원들이 충분했지만, 추천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출발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동안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지역 전문직 단체의 리더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었다. 인의협(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학계에서 쉽게 정평위 위원들을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 사제와 대구 정평위 대구대교구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지난 5월 23일 5·18민중항쟁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학술대회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5·18과 천주교―역사적 · 철학적 관점'을 주제로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와 이후에 천주교가 해왔던 역할, 특히 정부의 언론통제와 탄압으로 진실이 은폐 · 왜곡되는 상황에서 천주교가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뜻깊은 자리였다고 한다. 이날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의 발표 내용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서 교수는 5·18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가 "어느 때보다도 민중의 고통의 현장에 가까이 가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고 하면서 "당시에 한국 천주교 전체가 광주 지역 민중의 고통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일부 사제가 애쓴 것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교구와 사제들이 침묵을 지켰고, 주교회의도 소극적이었으며, 심지어 대구대교구의 두 사제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원으로 참가해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군부독재권력 수립에 기여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사제들이 구속되기까지 투쟁하는 동안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당당하게 참여한 이 두 사제는 누구일까? 지난 5월 홍보주간을 맞아 한국 천주교의 디테일한 친일 행적과 이를 적극적으로 알린 교회 언론에 대한 김유철 시인의 강의에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대구 정평위원들은 국가내란죄였던 전두환 · 노태우와 함께 그들을 옹호한 81명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에 이름을 올린 두 사제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한 사람은 1978년부터 1996년까지 <매일신문> 사장과 명예회장까지 무려 18년 동안 언론에서 일하신 고 전달출 신부고, 또 한 사람은 그 당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고 지금도 대구 정평위 활동에 대해 다양하게 시비를 밝히시는 이종흥 원로 신부다. 당시 대구대교구장은 이문희 대주교였다. 이 대주교는 제3공화국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6 · 7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아들이다.
이 시대의 엄혹함에 대해서는 2011년 3월 26일 '4대강 되찾기 전국 생명평화 미사'에서의 허연구 원로 신부의 강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 신부는 교구청으로부터 받은 어려움에 대해 ‘박해’라고 표현하며 "오늘 이 미사가 낙동강변, 특히 대구대교구에서 봉헌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2011년 겨울, 대구대교구 사회사목사를 정리하면서 확인한 것은 1989년 전후로 농민, 노동, 청년 활동은 대부분 교회에 의해 해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 활동을 하던 신자들 대부분은 교회 활동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시기 대구대교구는 사회복지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 또한 대부분 국가 위탁이나 지원 사업을 통해 성장해왔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다 할 것이다. 대구 가톨릭농민회는 초기에 교회의 '박해'를 받았고, 곧이어 전농으로 전환하던 시기와 맞물려 교구 농민 운동은 시들어 버렸다. 노동운동의 아픔도 크다. 1990년 노동자 최태욱은 자신이 다니던 청도성당 마당에서 분신했고, 신부님들과 준비했던 장례 미사는 교구청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1991년 파티마병원(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운영) 노동조합 파업으로 19명이 해고되고 구속되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단 한 명도 복직하지 못했다. 이후 교회는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게 되었고 노동사목은 가톨릭이란 이름조차 쓸 수 없도록 압박했다. 이는 현재 대구 정평위의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다. 다행히 대구 정평위는 작년부터 매달 노동 미사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 들어 투쟁하는 노동조합과 함께하는 미사를 드리고, 지난 5월 노동절을 맞아 대구대교구는 교구 설정 100년 만에 처음으로 노동자를 위한 거리 미사를 봉헌했다. 첫 거리 미사이고, 더구나 민감한 노동 미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큰 우려는 과연 얼마나 많은 항의 전화가 있을까 하는 것과 몇 명의 사제가 함께할까 하는 것이었다. 참석하기로 한 정평위원 신부들이 하필이면 이날 또 그리 일이 많았던지……. 하지만 2·28공원에서 봉헌한 이날 미사에는 놀랍게도 일부러 맞춘 듯이 사제 12명이 참여하였고 200명 가까운 신자들과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대구 정평위, 숨통 트이다 대구대교구 정평위가 짜임새 있게 재출범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물론 이런 갑갑한 교구 형편에서도 몇 분 사제들이 노력한 데 있다. 그리고 수도원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생명·정의·평화의 길을 묵묵히 걸어 온 신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신앙의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뚜렷한 촉발 계기는 2010년 4대강 사업 반대 사제 선언과 뒤이은 주교회의의 4대강 반대 입장 발표 덕이 크다. 2010년 4월 10일, '낙동강을 걱정하는 사제들'의 이름으로 생명평화 미사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대구가톨릭생명평화연대의 이름으로 매달 낙동강 생명평화 미사를 드리기로 한 뒤, 11월 구미 해평성당에서 10번째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12월 정평위원들이 교회로부터 임명을 받은 것이다. 정평위는 맨 먼저 사회사목사를 정리하면서 대구에서 정평위가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지속적인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그리고 2011년 5월 30일 재출범 미사를 드리면서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대구대교구에 언제 정평위가 없었느냐? 어떻게 출범이냐?'는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왜관 미군기지 고엽제 문제가 터지면서 분도수도원과 대구 정평위가 함께 논의하여 ‘캠프캐럴 미군기지 고엽제 매립 논란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했다. 대구대교구가 성명서를 통해 사회적 현안이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마도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6월 3일 조환길 대주교가 교구 사무처장과 정평위원장, 그리고 대리구장 신부와 함께 캠프캐럴 미군기지 인근에 있는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아빠스를 전격 방문해 수도회와 대책위의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했다. 이에 대해 김영호 신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의 인터뷰에서 "작은 새의 첫 날개짓처럼 작은 변화의 떨림 같은 것을 느낀다"고 감회를 밝혔다. 체인지, 대구! 대구가 왜 그런지 묻지 마시기 바란다. 누구든지 대구에 산다면 어쩔 수 없이, 별 수 없이 이미 유전자로 고착된 것 같은 대구 문화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대구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대구 시민사회가 먼저 ‘체인지, 대구’를 부르짖고 있다. 대구는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평위가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있고, 또 대구 천주교회가 있다는 비난을 이제 거두어 주시기 바란다. 대구 정평위가 있고, 개신교, 불교와 함께 종교가 힘을 모으고 나서서 시민사회를 지원하면서 대구를 정의·생명·평화의 마을로 부활시킬 것임을 믿어 달라. 대구가 바뀌면 한국이 바뀐다고 한다. 그만큼 이제는 대구를 욕하지 말고 격려해 달라. 우리도 대구에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대구를 고향으로 둔 분들은 대구를 자주 찾아오기 바란다. 교회에 대한 어떤 기대나 희망도 하지 않던 지역사회가 교회의 역할을 요청하고 있다. 정의·생명·평화를 바라는 교구민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암흑 같은 세월을 지내왔다. 그리고 교회는 수많은 잘못을 했고, 아직 아무런 고백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교회 언론사 내부 문제가 불거져 괴롭다.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대구 정평위와 시민사회는 그만큼 희망이 크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오신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상이 그리 행복하게 바뀌지 않았다. 대구 정평위가 겨우 3년 정도 활동해 온 셈인데 너무 조급하게 가지 말자고 다짐, 다짐을 한다. 우리가 먼저 지치지 않도록 기도하고 공부하려고 한다.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요청 드린다. 임성무 (도미니코,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초등학교 교사) * 이 글은 <기쁨과희망> 제9호(2012. 6)에 게재됐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