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에 죽림칠현의 고사가 있다. 위(魏)나라에서 진(晋)나라로 왕조가 바뀌자(266년경) 그 혼란을 피하여 죽림으로 들어가 세속과 교제를 끊고 술잔을 나누며 청담(淸談)에 열중했다고 하는 완적(阮籍)·산도(山濤)·혜강(嵇康)·향수(向秀)·유령(劉伶)·원함(院咸)·왕융(王戎) 등 7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를 죽림칠현 또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불렀다.
죽림은 탁한 속계와는 멀리 떨어진 장소로서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담론, 이른바 청담(淸談)을 논의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이후 죽림은 속진(俗塵)을 싫어하는 고결한 선비가 애호하는 것으로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 죽림칠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죽고칠현(竹高七賢, 海東七賢)이 있었다. 죽고칠현이란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黃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를 말하며 이들은 죽림칠현의 풍류운사(風流韻事)를 사모하여 화조월석(花鳥月夕)에 시주(詩酒)를 벗삼아 진외(塵外)에 초연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죽림고회(竹林高會)라 하였다고 한다.
죽림고회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의 〈열전〉,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또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등에 보인다. 이규보의 〈칠현설(七賢說)〉에 보면 이들은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호탕하게 즐겨서 세인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는데, 무신정권하에서의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세재가 죽은 뒤 이담지가 이규보에게 가입을 권하자 이규보는 이를 거절하면서 "칠현 가운데 핵심이 될 인물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여 좌중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림칠현(竹林七賢)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3.10, (주)넥서스)
중국 문학에 있어 위대(魏代) 마지막 20년 동안의 문학을 총칭하여 정시문학(正始文學)이라고 한다. 정시(正始, 240~249)는 위 제왕(魏齊王)의 연호로 이 기간 동안의 문단을 대표하는 완적(阮籍) · 혜강 · 산도(山濤) · 향수(向秀) · 유영(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 등을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하였다. 당시의 사회상은 점차 퇴폐에 기울어 권신(權臣)들이 서로 다투고, 그 때문에 죄없는 죽음을 당하는 자도 많아 뜻있는 선비들은 스스로 보신양명(保身養命)의 길을 찾아 산림에 숨어들게 되었고, 노장지도(老莊之道)에 몸을 기탁하여 세상 일을 경시하고, 혹은 일부러 광태(狂態)를 연출하여 액운을 면하려는 자도 있었으니 죽림칠현이 바로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시풍(詩風)은 일반적으로 표일청원(瓢逸清遠)한 바 있고, 사구(辭句)는 전대에 비하여 많이 화섬(華贍)하여졌으나, 그 뒤에 곧 이어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모의천박(摸擬淺薄)한 통폐는 아직 없었다. 이들 7현 중 특히 완(阮) · 혜 두 사람이 뛰어났었다. 완적(阮籍, 210~263)의 자는 사종(嗣宗),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완우(阮瑀)의 아들이다. 성미가 촉락불기하여 조금도 상궤(常軌)에 얽매임이 없었다. 그 용모가 훌륭하고 지기(志氣)가 고상하였으므로, 천자(天子)가 사위로 삼으려 하자 일부러 몇 달을 계속 술만 마시고 취한 채 갖가지 광태(狂態)를 연출하여 혼사를 피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또 항상 예속(禮俗)에 얽매여 사는 선비를 만나면 눈을 흘겨 흰 눈망울로 상대를 멸시하고,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바른 눈으로 대하고 반겼다 하여 <진서(晋書)> 완적전(阮籍傳)에 보면 백안청안(白眼青眼)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항시 마음에 억누르기 어려운 강개(慷慨)를 지녀 이를 그의 시 <영회(詠懷)> 82수 가운데 서술하고 있다. 그의 뜻인즉 사마씨(司馬氏)의 찬탈(簒奪)과 위제(魏帝)의 암우(暗愚)를 개탄하는 데 있었던 듯 비흥(比興)의 수법을 교묘히 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의 애원비통(哀怨悲痛)의 정과 소아(小雅)의 원비하면서도 문란에 흐르지 않는 작풍을 지녔고, 또 그 묘사가 완곡(婉曲)하여 조금도 세속을 미워하는 말투가 표면으로 두드러져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후인들이 특히 추찬(推贊)하는 작품이다.
그가 지은 부(賦)에는 <동평(東平)> · <수양(首陽)> · <청지(清志)> 등이 있고, 문예는 <달장론(達藏論)> ·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이 있다. 혜강(嵇康, 223~263)의 자는 숙야(叔夜). 그 성미가 염담과욕하고 박학했으며, 특히 노장(老莊)을 즐겼다. 일찍이 죄없이 그의 친구의 사건에 연좌하여 옥졸에게 욕을 당하고서 <유분시(幽憤詩)>를 지었는데, 고원청준(高遠清俊)함이 그야말로 시삼백편(詩三百篇)의 풍(風)이 있다고 평판되었다. 이 밖에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있다. 기타 유영(劉伶)의 작품으로 <주덕송(酒德頌)>이 알려져 있다. 술에 기탁하여 속세를 욕하고 의례지사(儀禮之士)를 비웃는 내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림칠현 [竹林七賢]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죽림칠현은 삼국위진(三國魏晉)시기의 7명의 명인인 혜강 ․ 완적 ․ 산도(山濤) ․ 향수 ․ 유영(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을 일컷는 말이다.
그들은 늘 산양(山陽, 지금의 河南 修武)에 있는 대나무숲에 모여 호방하게 살아 죽림칠현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들은 노장지학(老庄之學)을 숭상하고 예법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천성이 대범하였다. 정치적으로 완적 ․ 유영 ․ 혜강은 사마(司馬)씨 집단에 대해 협조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혜강은 피살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왕융 ․ 산도 등은 사마씨 집단에게 참여하여 고위직을 역임하고 정권의 심복이 되었다. 문학적으로는 혜강과 완적이 뛰어났다. 예를 들면 혜강의『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에서 혜강은 노장이 자연을 숭상한 것을 논점으로 하여 자신은 벼슬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면서 공개적으로 사마씨에 협조하려 하지 않는 정치적 태도를 표명하였는데 이 문장은 높은 명성을 날렸다. 또 완적의『영회(永懷』에 있는 82수의 시는 비유와 기탁 등 여러 기법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최고 통치 집단의 악행을 폭로하였으며 허위적인 예법지사(禮法之士)를 풍자하였다. 이렇게 칠현의 문학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지향과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칠현은 모두 술을 즐겨 마셨는데 술버릇은 각자 달랐다. 어느 사람이 그들의 술 마시는 특징에 대해서 평을 남겼다.
가장 품위가 떨어지는 자는 유영이다. 유영은 즐겨 마시고 또 양껏 마시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에서 으뜸갈 정도로 주량이 대단했다. 가히 중국 고대의 “취성(醉星)”이라 불릴 만하다. “두강(杜康)이 술을 빚고 유영이 취한다.”는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유영의 술버릇은 최하급에 속한다. 유영은 늘 술 주머니를 차고 다녔는데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도 꼭 술을 마셨다. 땅을 파헤칠 도구를 챙긴 사람을 늘 수레 뒤에 따르게 하여 언제든지 죽으면 바로 매장하도록 하였다. 유영은『주덕송(酒德訟)』을 쓴 적이 있는데, 행동에는 종적이 없고, 거주할 방이 없어 노숙하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서든지 걷든지 수시로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며, 음주만이 정당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지 그는 관계치 않았으며 그를 평가할수록 더욱 많은 술을 마셨다. 취하면 자고, 깨어났으나 정신은 맑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서 우레가 울릴지언정 듣지 못하였으며 태산같이 일이 쌓여도 걱정하지 않고 날씨와 온도의 변화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세상감정도 몰랐다.
하급에 속하는 이는 완적과 완함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완적의 집 근처에 작은 술집이 있었는데 여주인이 미인이었다. 완적은 늘 그 술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하면 늘 여주인 옆에 드러누워 흔연히 잠들곤 하였다. 비록 취기가 있었지만 무리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완적의 어머님이 세상을 떴을 때 그는 마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같이 바둑을 노는 친구가 그더러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지만 완적은 바둑을 끝까지 다 놓고 다시 술을 세 바가지나 마시고 통곡하면서 입으로 선혈을 토해냈는데 거의 쓰러질 뻔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諸阮皆飮酒 咸至 宗人間共集 不覆用杯觴斟酌 以大盆盛酒 圓坐相向 大酌更飮 時有群豕來飮其酒 咸直接去其上 便共飮之.”고 한다. 즉 완적이 종인(宗人)과 술을 함께 할 때마다 항상 술잔 대신에 술독(酒盤)을 사용하였으며 술을 담그는 도구도 사용하지도 않고 술독에 에워싸서 손으로 마시곤 하였다. 때론 돼지들이 와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내쫓기는커녕 덩달아 같이 마셨다.
중급은 산도와 향수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산도는 술을 여덟 바가지까지 마시면 더 이상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황제가 산도를 청하여 술을 마셨는데 산도의 여덟 바가지 주량을 시험해 보려고 사람을 시켜 술 여덟 바가지를 마시게 하였는데 산도가 한 눈을 판 틈을 타서 가만히 술을 더 따랐다. 산도는 술 여덟 바가지를 마셨다며 더 마시지 않았는데 황제도 아주 재미있게 여겼을 정도였다. 향수의 버릇은 이렇다 할 특징이 하나도 없었고, 벼슬을 하였기에 중급에 넣는다.
상품(上品)에 속하는 이가 혜강이다.『진서(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완적의 눈동자는 청안(靑眼)과 백안(白眼)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禮)가 바르지 않는 자를 만나면 백안으로 대하였다. 혜희(嵇喜)가 찾아 왔을 때 완적(阮籍)이 백안(白眼)으로 대하여 혜희(嵇喜)은 기분 나빠 떠나 버렸다. 혜희의 아우 혜강(嵇康)이 이를 알고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 갔더니 이번엔 완적이 크게 기뻐하여 그를 청안(靑眼)으로 대하였다.” 혜강은 완적을 알아주는 벗임에 틀림없다. 혜강은『주회시(酒會詩)』에서 “벌판에서 산책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끝이 보이지 않으리. 꽃은 향기를 내뿜고 정각은 먼 곳에서 높이 솟아 있다. 나무는 무성하고 붕어는 못에서 돌아다니며 탄환(彈丸)으로 짐승을 쏘아 잡고 정교한 낚시로 전어와 상어를 낚는다. 앉은 자리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며 서로 다른 여러 소리지만 같은 화음으로 들려온다. 산천을 향해 술을 들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 새하얀 이(牙)를 보인다. 소박한 거문고에서 훌륭한 곡이 나오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람을 따라 울러 퍼진다. 어찌 기분이 상쾌하지 않으랴. 아쉬운 것은 동야자(東野子)가 곁에 없어 술 마실 때도 그를 그리워한다. 고인(故人) 곁에 서서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면 마음이 저절로 지기(知己)에게 간다. (樂哉苑中游 周覽無窮已 百卉吐芳華 崇台邈高跱 林木紛交錯 玄池戱魴鯉 輕丸斃翔禽 纖綸出鱣鮪 坐中發美贊 異氣同音軌 臨川獻清酤 微歌發皓齒 素琴揮雅操 清聲隨風起 斯會豈不樂 恨無東野子 酒中念幽人 守故彌終始 但當體七弦 寄心在知己.)” 매번 술자리에서 모여 마음과 술만으로도 천고의 절음(絶音)을 지어낸다. 죽림칠현 중 왕융의 술버릇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출처] 167. 죽림칠현(竹林七賢)|작성자 초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