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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의 윤리적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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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의 유전자를 도입하여 만들어진 GMO는 인류가 그동안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식품, 즉 인간이 먹어본 적이 없는 미생물이나 세균의 유전자가 포함된 식품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수천 년 동안 먹어옴으로써 검증되어 온 다른 식품들과는 달리 근본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검증 없이 버젓이 우리 식탁에 오르고 있다. 지금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누구도 그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악영향을 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GMO의 인체 유해성 관련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밝혀진 인체 유해성만 해도 다음과 같다.
① 한 유전자가 다른 종에 도입되는 경우 새로운 물질이 생산되므로 독성을 나타내거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짐
② 항생제내성 표시유전자가 장내 박테리아와 병원균에 확산되면서 인체 내 항생제 내성 증대
③ 수평적 유전자 이전과 재조합에 의해 다양한 병원균 사이에 병독성이 확산됨과 동시에 새로운 병원성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창출 가능
④ 세포 감염으로 인하여 질병 바이러스를 재활성화시키거나, 운반체(벡터) 자체가 세포 내로 들어가서 치명적인 효과(암 포함)를 야기 가능.
여기서는 유전자 조작의 윤리적인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유전자 조작 행위의 근간이 되는 생명공학의 세계관에 내장된 논리를 해명할 것이다. 그다음, 생명공학에 나타난 경제윤리적 문제, 즉 경제적 불평등․부정의의 문제를 검토할 것이며, 생명공학의 생태윤리적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생명윤리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생명공학의 세계관
오늘날의 생명공학은 근본적으로 기계론적인 유물론적인 세계관 기계적 유물론은 이미 고대 희랍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형이상학이나 홉스(Hobbes) 등의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볼 수 있으며,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의 천문학에 암시되어 있고, 뉴턴에서 더 확실해졌고 최근의 과학기술로서 더욱 실증되고 있다. 적어도 자연 안에서 생성되는 물질적 현상은 한결같이 물질이라는 동일한 실체의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며, 그러한 현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 인과법칙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일어난다는 신념이 기계론적 자연관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데카르트에 의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에는 두 가지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 그는 그것을 연장적 실체(res extens)와 사유적 실체(res cogitans)로 부른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이원론적 존재론을 확립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물질로 환원될 수 있으며, 모든 물질현상은 기계적 인과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데카르트적 사고는 오늘날 급진적인 기계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사유하는 실체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특수성마저 부정되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물질적 실체에 불과하며 모든 물질현상은 한결같이 같은 기계적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고이다.
거기에는 기계론적으로 본 우주 현상과 그것에 포함된 생명현상은 어떤 주체적 인격자의 의지나 목적 등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환언하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물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조차도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존재하고 생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맹목적인 현상이고 작동일 뿐이며 자율적 인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장 쉽고 선명하게 보여준 학자가 자크 모노(Jacques Monod)이다. 그에 의하면 생명의 발생은 물론 가장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라는 종의 탄생도 역시 우연의 결과이고, 철칙같이 믿는 자연법칙의 필연성 또는 우연의 결과다. 우주 그 자체는 물론 그 안의 모든 현상도 어떤 형이상학적 주체의 욕망과 목적과 의지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연적 발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유전자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결정하며, 유전자를 해석하기만 하면 생명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GMO식품은 물론, 인간의 질병치료뿐 아니라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기계로 간주하고, 그 설계도나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분석하기만 하면 사람의 정신적 특성 나아가 "인간다움"의 본성까지도 낱낱이 밝혀질 수 있다는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분자생물학적 교의(dogma)의 절대화로 분자화가 생명인식과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마치 유일한 방식인 양 오해되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풍부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생명연구를 편향되게 환원시킴으로써 다른 접근방식들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다. GMO의 철학적인 문제는 출발에서부터 이러한 유전자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셈이다.
생명활동은 여러 유전자들이 서로 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주변환경의 요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의 특성이나 생명현상 자체를 다룰 때에는 하나의 유전자가 지니는 유전정보를 하나씩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보다 전체를 조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생명체의 특정한 특성은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와 발생과정, 그리고 주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유론적․기계론적 자연관의 문제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 현상이 양적으로만 측정할 수 있는 물질적 실체로 환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기계론적 자연관과 같은 유물론적 형이상학은 인간의 의식현상을 비롯해 도덕적 경험 그리고 그 밖의 복잡한 생명 현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생명공학과 경제윤리
현대 생명공학은 분자생물학의 영역에서 급진전을 보여 왔으나 계속되는 연구과제를 뒷받침할 만한 막대한 경제력을 소유한 국가의 과제로 축소되었다. 미국과 일본과 영국이 주로 이러한 경쟁에서 주도적인 국가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독재정권에 의하여 오용되었던 경우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윤을 추구하는 제약회사들이 일확천금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서 생명공학 연구에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Michael D. Lemonick and Dick Thomson, "Racing the Map Our DNA," Time Jan./11, 1999.
생명공학 연구 프로젝트는 경제 대국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대과학" "거대과학"이란 다음과 같은 공통의 요소를 갖는다. 첫째, 연구에 동원되는 물적·인적 자원의 규모가 크다. 둘째, 과학자 개인의 연구동기나 목표보다는 국가나 대기업이 연구주제의 설정, 진행 등을 주도한다. 셋째, 연구과정의 중앙집중화, 관료화, 연구조직의 위계화가 강화된다(김동광, "DNA 독트린: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녹색평론』통권 54호 (2000년 9-10월호), 22).
이 되었다.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품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경우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에 앞서서 제약회사들은 인간의 유전적 정보를 먼저 분석하여 이를 특허 냄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즉 돈벌이가 될 중요한 유전자의 특허를 얻기 위한 시도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유전자 특허가 러시를 이루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유전자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유네스코의 "게놈헌장"은 힘을 잃었다. 현재 인간 유전자와 연관해서 가장 많은 특허를 획득한 기관은 미국정부이다. 김동광, op. cit., 24.
가난한 인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부자 나라의 선의에서 출발한 과거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역설적이게도 가난한 지역의 기아 인구를 집중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병상,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서울: 책세상, 2002), 59-63 참조.
그 덕분에 지역 환경에 적합한 전통 농법과 종자는 거의 사라졌고, 농약과 관개 농업에 적합한 값비싼 종자만이 넓은 경작지를 뒤덮게 되었다. 노동 집약적 가족농이 다품종 소량 생산의 자급자족 농촌을 주도할 당시, 농가들은 경작지 상태에 따라 다양한 품종을 채종하고 파종할 수 있었으나, 관개 농업으로 경작지의 차별성이 사라지고 기계화로 가족농이 해체되면서 농촌 인력이 도시로, 공장 지대로 빠져나면서 농촌은 전통 종자도 농법도 거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종자를 채종하던 시대에서 소출은 좋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결여된 씨앗을 종자회사에서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시대로 바뀌자 농촌은 환금작물, 즉 소품종 다량 생산으로 돌아서야 했다. 먹고 살기 위해 종자 권리를 기업에게 팔고 다양한 농작물로 풍성했던 농촌은 획일화되고 만 것이다. 녹색혁명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식량증산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과 소비자에 그 이익이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국적기업들이 고스란히 챙겨감으로써 식량 지배는 더욱 심해져 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다국적기업들은 이제 녹색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이 토양침식, 생물다양성 파괴, 농약오염 등의 환경문제에 의해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생명공학기술이라는 신기술로 GMO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이윤 창출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생명공학과 GMO를 매개로 종자, 농화학, 제약, 식품, 곡물유통, 동물약품 분야를 하나의 기업으로, 또는 제휴의 형식으로 수직통합하어 독점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유전자조작 콩은 다국적 기업들이 어떻게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현재 종자산업 세계 2위이자 농화학산업 세계 3위인 몬산토(Monsanto)는 자사의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조작된 "라운드업 레디 소이빈"이라는 콩을 개발하여, 이를 제초제와 한 세트로 같이 농민들에게 팔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몬산토는 종자와 농약 둘 다 판매함으로써 엄청난 이윤을 챙길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종자가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조작하는 "터미네이터 기술", 그리고 자사의 농약을 뒤집어써야만 싹이 트도록 유전자조작하는 "트레이터 기술"을 개발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거둬들여서 다시 뿌리는 양(전세계적으로 50%)만큼의 종자시장을 더 차지함과 동시에 농약도 계속 팔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따라서 현대 생명공학을 위한 연구에 쏟아 붓는 막대한 비용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부유한 국가들과 기업들을 위한 몫으로 고스란히 전환되기 쉽다. 극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쓰여지는 그 막대한 연구비용이 만일 인간 이하의 삶의 환경에서 굶주리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민중들의 생명권을 되찾는 데 쓰여질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도덕적이고 고귀한 일이 될 것이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유전공학이 불러오는 혜택이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정차, 경제 그리고 사회적 권력의 틀과 형태는 유전공학 시대에 더욱더 소수자의 것이 될 것이 우려되는 것이다.
생명공학과 생태윤리
생명계(ecosystem)는 생명 개체의 자존능력을 지닌 독립성을 가진다. 이러한 독립성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종의 균형을 형성함으로써 자연의 평형을 유지한다. 이러한 평형은 자연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기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삶을 향한 투쟁관계구조를 보이고 있는 생명계의 먹이사슬도 이러한 생존환경인 자연적 조건을 벗어나서는 평형을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생태학적 균형은 개체 종(species)의 자존적 독립성과 자연환경의 유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생태학적 정의를 외면하고 무한한 개발을 통하여 인간중심적인 풍요를 지향한 결과이다. 대기와 대지, 그리고 지하자원이 오염되고, 천연자원이 고갈된 현실은 결과적으로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생명의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적 평형 속에서 살아가던 무수한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과학을 통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상업주의가 오늘의 생명공학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적 평형을 깨고, 생명계의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기존의 생명의 질서를 흔들어 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만의 이익을 위한 생명공학 기술이 인간만의 생존적 조건만을 극대화시켜 인간 중심적인 생명환경만을 강화시킨다면 결과적으로 맬더스의 인구론이 예측했던 인구증가를 따라 잡을 수 없는 자원의 한계로 인하여 인간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되고 급기야는 생존적 위기가 초래되는 비극에 직면할 우려가 크다. 더구나 현대 생명공학이 인간에 대해서는 다소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하여 동식물에 대해서는 그 생명의 자존적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되어 결과적으로 생명의 자존적 독립성을 파괴하는 변형체들을 만들어 낼 경우 자연이 이루어 온 변화와는 달리 급속한 생태계의 변화를 초래할 우려가 큰 것이다.
한스 요나스는 생명공학을 인류의 미래를 걸고 벌이는 거대한 도박(실험)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실험에서는 단 한 번의 실패라도 용납될 수 없다. 이필렬, "과학의 민주적 통제를 위하여,"『녹색평론』통권 제37호, 1997년 11-12월, 28.
사소한 실험에서는 수많은 실패가 허용될 수 있다. 그 실패가 인류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운명이 걸린 실험에서는 단 한차례의 실수라도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실패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성공 가능성이 99.9퍼센트이고 실패할 가능성이 0.1퍼센트라고 해도 실험은 저지되어야 한다. 실패로 인해 대재앙이 도래할 가능성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대한 실험을 즐기는 과학자들은 이러한 우려를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돌리고 만다.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해서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형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일년에 10만분의 1이고 이때 사망자 수가 100만명이라고 할 경우, 연평균 사망자 수는 10명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동차사고 사망자 수의 1000분의 1에도 못 미치니 핵발전이 자동차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숫자를 통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해마다 10명이 죽는 것은 우리 일상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꺼번에 100만명이 사망할 경우를 상상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생명공학자들은 생명공학이 인류의 운명을 바꿀 만큼의 파괴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0.1퍼센트의 실수는 대단치 않은 것이라고 무시하면서 실험의 당위성을 옹호한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의 책임의식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과학의 순수성이나 중립성을 내세우거나, 과학 발전의 엄청난 함의에 무지한 일반인에 불만을 갖는다. 과연 실패한 유전자 조작으로 발생한 생물체들이 환경에 누출이 될 경우 발생할 문제를 과학자들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가? 자본 권력은 거액을 들여 수행한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성공한 유전자 조작 생물체, 즉 연구자 입장에서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한 생물들은 환경에 방출해도 안전한가?
생명공학자들은 안전을 강변하고 있지만, 이질 유전자를 담고 있는 벡터가 숙주 유전자에서 다른 생물체의 유전자로 이동할 수 있고, 2차로 이동해 들어간 생물체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만일 사람의 유전자 속에 삽입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삽입된 위치에 따라 치명적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통계학적으로는 무의미할 정도로 낮은 확률일지라도 생태적으로 또는 진화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치명적일 수가 있다. 1999년 4월 25일 방영된 한국방송의 <일요스페셜>은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의 꽃가루가 유기농의 보통 옥수수에 수정될 확률이 4만분의 1에 불과하므로 유기농장을 경영하는 원고의 손해 배상 소송을 영국 대법원이 기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것은 생태에 대한 무지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4만분의 1의 확률로 정상 옥수수가 돌연변이가 된다면 세대마다 4만 분의 1의 확률로 오염이 누적될 것이며, 4만 세대가 지나면 완전히 뒤섞여버림을 의미한다. 한 세대가 1년인 옥수수에게 그 영향은 미미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진화의 역사는 4만년을 초월한다. 더욱이 돌연변이 유전자가 세대가 매우 짧은 미생물들을 오염시킬 경우 문제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다.
호프만 같은 비교적 양심적인 과학자들은 과학자들이 보다 철저하게 책임적일 것을 요구한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Roald Hoffmann, The Same and not the same, 이덕환 역,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서울 : 까치, 1996).
하며, "새로운 물질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오용의 가능성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화학자들이나 산업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또는 해가 없다고 사용한 화학물질들 중 상당수가 호르몬 유사물질이고 이것들이 동물들의 내분비계를 혼란에 빠뜨린 현실을 짚어 볼 수 있다. DDT, 다이옥신, 에스트로겐 유사물질 등 여러 가지 화학물질들이 동물들의 호르몬 분비체계를 어떻게 교란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뼈저린 반성과 책임의식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생명윤리를 지향하며
슈바이처의 말대로, 적어도 사고하려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생물에 대해 자기의 생명처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자라는 생명을 끝없이 뻗어나게 할 것이다. 사고할 줄 아는 인간이 나쁘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며 생명을 억압하는 것이다. A. 슈바이처, 류해인 역, 『나의 생애와 사상』(서울: 하서출판사, 2001) 참고.
즉 거창하게 종교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도, 최소한 생각할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해되어야 하고 도달해야 하는 도덕의 절대적 근본 원리는 자신의 생명의 힘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생명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생명이란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모두 동일하게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생겨난다. 인간 이외의 생명은 인간에게 먹히고 이용당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살기 위해 다른 생명들을 희생할 수밖에는 없지만, 이런 모순적 상황에 대해 줄곧 윤리적으로 고민할 때, 그때야 말로 참된 인간,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동식물을 희생시키더라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최소한의 희생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살려고 하는 생명 가운데서 살려고 애쓰는 생명”일 뿐이다.
21세기 생명공학의 혁명적 발전 속에서 생명을 더욱 경제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생명의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생명에 대한 위협, 생태계 교란 등은 생명윤리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와 생명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는 문제는 자연의 생명에 대한 문제이기 보다 인간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의 생명이든 동식물의 생명이든 책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오늘날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윤리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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