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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출입문
출 27: 13-16, 요 14: 6-7, 롬 10: 13-15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진입하여 나아가는 군대는 성막을 중심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서남북에 3지파씩이 나누어져 있는데 그들은 늘 성막을 중심하여 진을 치기도 하고 진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한 문으로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막을 향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막을 갈 수 있는 문은 한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길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게 됩니다.
이 길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길 한길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언은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길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하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은 378평이고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만이 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오직 하나의 문만을 운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서는 제물을 가지고 이 성막문을 들어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의 선생 되시는 구원의 주를 섬기고 있었지만 그의 선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구원의 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의 대상으로 예수를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익이 없어지면서 그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체험을 하고 난 후에 그의 신앙적인 구원관이 바꾸어 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행4:12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치고 있는 그 광야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문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구원의 주 되시는 그 예수로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그 문 되신 예수로만 꼴을 얻을 수가 있고 그 문 되시는 예수로만 풍성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직 그 예수로만 복을 받을 수가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작은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문은 참으로 큰문입니다. 동쪽으로 난 한 벽의 길이가 25m 인데 그 중에 한 10m 가 문으로 되어있다면 이 문은 참으로 큰문입니다. 이 성막의 한 면은 모두가 문으로 되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문입니다. 무엇을 성막은 우리들에게 전하여 주는 의미입니까? 아마도 이문은 어느 사람에게 만을 한정을 짓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가 있고 어떤 사람들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입니다.
어떤 종교는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을 하여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는 수고에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루터도 그의 문제를 깨달으려고 성베드로의 성전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행으로 해결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문제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나의 문제를 고민하여 홀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분은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이문은 예루살렘의 예수를 잡아죽이는 일 앞장을 섰던 유대인들, 스스로 그들만의 구원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 주님의 그의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외면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도 와야 합니다. 제한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문을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 문으로 통과케하여 구원으로 초청하는 복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롬10:13-15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만 부르십시오.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는 구원에로 초청을 받고 영생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은 그 문을 동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이유입니까?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성문을 동쪽으로 내었습니다. 동쪽으로 그 성문을 동쪽으로 내면 어떤 유익이 오는 것입니까? 들어 올 때는 서쪽을 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는 동쪽을 보고 나가게 됩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입니다. 어둡고 쓸쓸한 곳을 이야기합니다. 음산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곳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접어둡니다.
그러나 동쪽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그곳은 찬란한 해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어둠이 물러가고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마귀의 무너지고 쓰러뜨리는 세력이 묻혀진 곳입니다. 이곳은 사망을 짖누르고 생명을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참으로 부활을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이기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절망이 아니라 절망 너머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기독교는 안 되는 일도 될 수 있다고 믿음으로 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안 되는 일인 죽음을 지배하는 종교입니다. 더구나 동쪽의 문 앞에는 유다 지파가 있는 곳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지파 입니까. 그 지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던 특별한 지파 입니다. 이 지파는 승리가 이미 얹혀진 지파 입니다. 이 지파는 이미 될 수 있다고 고백을 하며 나아가는 지파 입니다.
동쪽의 가장자리에는 유다 지파가 자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지파의 족장이 누구입니까? 갈렙 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있을 때에 당시에는 다 정복하지 않은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땅은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당시의 토착민 원주민이었던 가나안 사람은 그들의 수도가 산지의 정상에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성은 본래 너무 막강하여서 감히 어느 누가 공격을 한다던지 정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졌던 때입니다. 여호수아 14:을 보면 성경은 당시에 이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갈렙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들이 즐거움을 맛보고 있을 때에 갈렙은 말하기를 내 나이 85세이지만 이 산지를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아낙 사람들이 있고 성읍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이 산지를 나에게 허락만을 한다면 내가 그 산지를 취하러 가겠나이다. 이 땅은 대단한 땅이라고 할지라도 그 땅을 취하러 가는 갈렙이라는 사람의 신앙은 더 대단합니다.
그 땅을 갈렙은 취하게 됩니다. 우리시대에도 이런 영적 거성들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동쪽의 정문에 유다지파가 자리를 잡았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창49: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더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에 오시기 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동쪽 문은 유다 지파가 있다는 것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소망을 허락을 하시는 줄로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성막안에 거하면 그는 용서를 선언을 받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는 곳입니다. 성막은 죄를 가지고 왔다가 죄를 버리고 가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는 가지고 왔다가 응답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는 곳입니다.
한나도 성전에서 기도를 하다가 응답을 받고 돌아 갈 곳입니다. 성막은 병을 가지고 왔다가 건강을 소유하고 나아가는 곳입니다. 성막은 문제를 가지고 왔다가 해결을 받고 나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서쪽을 보고 들어왔다가 동족을 보고 나가는 곳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성도가 이사를 하고 난 후에 교회를 찾아야 하는 데 막상 어느 교회를 선택을 하여야 할지를 몰라서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마침 교통경찰이 있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주변에 좋은 교회가 있으며 소개를 하여 주십시오. 그랬더니 그 교통경찰이 말하기를 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당신이 그 교회를 나가십니까? 안다 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좋은 이유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19년째 교통경찰을 하고 있는데 그 교회를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은 다 웃으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교회는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성막은 서쪽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으로 들어 갈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혹은 괴로워하면서 혹은 엉금엉금 갔다가 서서 똑바로 기쁨으로 어쩔줄 모르는 자세로 나오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 수 있는 은총이 이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예배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웃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웃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병들거나 문제가 있습니다. 웃기면 웃으세요. 응답을 기다리면 응답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응답을 하세요. 교회가 좋으면 좋은 표시를 하세요. 성도가 좋다면 좋다는 감사을 하세요.
이번 성탄절에는 서로의 인사를 나누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선물을 줄줄 알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훈련이요 교육입니다. 성도에게 감사를 할줄아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쪽지를 나누어 드립니다. 그곳에다 써서 선물과 함께 입구에 놓으면 나누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성막의 문은 4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가는 베실로 짜여 있는 흰색입니다.
그 중의 청색은 생명의 색깔입니다. 생명은 하늘에서부터 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진정한 생명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세워가시는 복 받은 성도들이 도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을 소유하고자 참으로 많은 몸부림을 쳐봅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처럼 기쁨을 얻을까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것들은 잠깐의 생명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왕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분은 왕이 되십니다. 그분의 왕권에 도전을 할 수 있는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그분은 만나면 귀신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각양 병든 자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그분이 계시면 광풍노도도 잔잔하여 집니다. 그분은 이런 왕의 권세를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왕 되시는 그분을 통하여 날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둠의 세력은 그들의 왕처럼 보이는 위장을 하고 우리들에게 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왕권 앞에서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가는 줄로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색은 피 색깔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듯합니다. 그분의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분의 고통으로 우리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면서 우리자신의 왕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저 고난과 인간적인 모욕과 괴로움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분의 왕의 권위로 우리를 세워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동참자만이 성막에 거하는 복을 얻는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백색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백색인데 그 백색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죽음의 어둔 그림자를 거두어 내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여론조사에 의할 것 같으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던 이는 예레미아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 본 것입니다. 예수는 성막으로 대답을 하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왕으로 인도를 하십니다.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그분은 왕으로 우리의 권세를 인도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지시고 그분은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양의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리고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 성탄을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홍색으로서 고난을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영광인 왕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문은 들어가는데 문턱이 없는 문입니다. 문턱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턱이 없다는 것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것입니다. 문턱 때문에 자유롭지 못 할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이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바로 지금 그분을 인정을 하시면 됩니다. 그분을 나의 왕으로 인정을 하십시요. 그분을 지금 나의 주인으로 인정을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진나라의 6개국 통일 이때에 공을 세운이가 효공이라는 사람입니다. 효공을 도와서 나라를 부강하게 한 이가 상앙이라는 사람입니다. 상앙은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정치를 잘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묘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남쪽의 문에다 이런 방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남쪽에 문 앞에 있는 나무를 북쪽으로 옮겨다 심는 자는 금 10근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웃기만 하지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0근으로 올렸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하지를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쉬운 일에 누가 금을 50군이나 주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사람이 옮겨다 심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상앙이라는 사람이 근50근을 주었습니다. 그 소문이 전국의 각지로 퍼지면서 상앙이 어떤 말을 하던지 다 믿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 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분의 지도와 위안과 그분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문턱이 없는 넓은 문을 생각을 하여 보십시오. 그 얼마나 힘있게 들어 갈 수가 있습니까? 어른도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아이들도 들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유롭게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든지 가능합니다.
이 문은 그러나 영원히 열려있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은 항상 열려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언젠가는 닫히는 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이 닫히면 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는 그 문을 열어보려고 하였지만 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은 금속으로는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열 수가 있는 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에도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을 하였지만 노아의 방주는 굳게 닫혔고 그 문을 열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만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요. 밖에 있는 자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가능성입니다.
삶과 죽음 구원과 버림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 문에 와있습니까? 아니면 그 문밖에 있는 존재입니까? 바깥에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안에서 즐거워하고 잔치에 참여하는 자입니까?
기회를 잃지 마시고 그 문안으로 들어가는 복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할 때에 그 문에 들어가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안으로 들어 온 것만이 제물로 하나님이 아무리 아름다운 제물이라고 할지라도 이 문을 통과하여 문안으로 들어와야만 합니다.
이 성막 문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제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신앙의 아름다움으로 늘 예수 안에서 열납되는 제물로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입문의 구조와 영적 의미
27: 13-16
13. 동을 향하여 뜰 동편의 광도 오십 규빗이 될찌며
14. 문 이편을 위하여 포장이 십 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 문 저편을 위하여도 포장이 십 오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찌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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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7-9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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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에는 세개의 문이 있습니다. 울타리 밖에서 뜰로 들어가는『출입문(gate)』과, 뜰에서 성소를 들어가는『성막문(the door of tab)』. 그리고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휘장(veil)』입니다.
오늘은 울타리 밖에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의 문, 곧 동편의 출입문의 구조와 영적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며 은혜 받기 원합니다.
1. 출입문의 구조입니다.
본문에『동을 향하여 뜰 동편의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38장 18절에 보면『뜰의 문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짰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 곧 고는 뜰의 포장과 같이 오규빗이며』라고 했습니다.
동편에 위치한 이 출입문은 길이가 20규빗(10m), 높이가 5규빗(2.5m)으로 큰 문입니다. 그리고 포장은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의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2. 출입문의 영적 의미입니다.
성막 동편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유일의 출입문은『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출입문은,
1. 유일한 문입니다.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의 문,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도 단 하나 오직 예수로만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요 10:9).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다른 문이 없습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온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출입문은 왜 하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문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절도요 강도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일신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문만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신앙을『편협한 신앙』이라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만을 옹호하는 것을『독선』이라하며『좁은 마음』이라고 낙인을 찍고, 신자나 비신자 비록 신앙이 다르다 할지라도 양심껏 살면, 선하게 살면, 무엇을 믿든지 신앙만 있으면 다 똑같다는 복음아닌 복음으로 미혹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잃어진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 없습니다. 양보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천국입니다.
2.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성막의 출입문은 폭이 10m, 높이가 2.5m의 큰 문입니다. 또한 문턱이 없는 문입니다. 그리고 문지기가 없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누구나의 문입니다. 이 문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들어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이 누구든지의 문, 하나님의 사랑의 문으로 예루살렘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온 유다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땅 끝의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여기에 전도와 선교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문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도 인도해야 합니다. 젊은이도 인도해야 합니다. 늙은이도 인도해야 합니다. 이 문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천한 자나, 귀한 자나 차별 없이 다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조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오늘 당신도 들어가야 할 문입니다.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들어가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머뭇거리십니까? 하나님은『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고 말씀하셨습니다.
돈 때문에 머뭇거리십니까? 하나님은『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고 초청하십니다.
세상의 염려 때문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우리 예수님 약속하셨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고통에서 찬송으로, 사탄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3. 아름다운 문입니다.
성막 출입문의 색상이 청색, 홍색, 자색, 가는 베실로 짠 아름다운 문입니다. 물론 이 아름다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청색』은 하늘의 색상으로 소망과 생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 예수를 의미합니다.
『홍색』은 피가 연상되는 색상으로서 그리스도의 피 곧 보혈을 뜻하며 이것은 고난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백색』은 완전과 의의 상징으로서 사람으로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구약은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이며,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4가지 방향에서 바라본 기록이요, 4종류의 독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말씀입니다. 그럼 청색, 홍색, 자색, 백색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적용해 봅시다.
첫째, 유대인을 향한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향하여『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로 시작한 마태복음을 통하여『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그래서 동박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2:2)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요, 만왕의 왕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색상으로는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자색이므로『자색복음』이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 중에 사자가 동물의 왕을 상징하므로『사자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로마인을 향한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는 로마인을 향하여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닌『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곧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족보도 없고, 서론도 없이 세례 받음과 동시에 사역(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행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간결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긴박감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곧」「바로」「즉시」바쁜 일과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홍색복음』이요,『송아지 복음』입니다.
세째, 헬라인을 향한 누가복음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로서 사변적이고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는 사건을 예리한 과학자의 눈으로 분석하여 유창한 문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렸을 적의 모습을 소개하는가 하면 족보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출처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고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나『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상징하는『백색복음』이요, 『사람복음』입니다.
넷째, 대중을 향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1장부터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을 표적으로 보았고, 모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심을 표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또 믿음과 생명에 대해서 강조했으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생명을 상징하는『청색 복음』이요, 하늘을 나는『독수리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성막의 출입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성을 입고 오신 사람이십니다. 바로 그 분만이 우리를 영광의 보좌 앞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성막 출입문의 색상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내가 믿어야 합니다. 출입문으로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유일한 구원의 문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문은 아름다운 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을 통한 구원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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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