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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9편 6절-11절: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6절-7절: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원래 진리는 빛을 내는 것인데, 교회가 진리가 저물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어두워지고 세상사상이 충만해진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성도가 그만큼 힘이 없다. 이렇게 되면 성도 자기도 망한다. 세상정신 사상에 덮여서 신앙 믿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신앙정조를 다 팔아먹게 되고, 성도 자기가 추해지고, 이쪽에서도 신용을 못 얻고 저쪽에서도 신용을 못 얻는 인격의 수기가 들어오게 된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정이 진리로 바로 서지 못하면 그 가정은 기울어진다. 물질적으로는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지라도 그 가정은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또 지역적 국가적으로도 보면 교회가 세상화 되면 그 국가는 하나님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사실은 교회를 징벌하기 위한 방편이 이렇게 되는 거다.
사람이 바로 서야 모든 것이 바로 서 나간다. 아무리 가난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부자요 명예영광을 가졌더라도 사람이 넘어진 사람이 있다. 세상 것에 넘어진 사람은 아무 힘이 없고 의미가 없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물질부자라도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형벌만 자꾸 누적이 된다.
등잔에 불을 붙이면 이 등잔을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아무리 밤이라도 등잔의 불이 꺼져있으면 그 등잔을 아래로 내린다. 꺼진 불은 내리게 되어있다. 불이 꺼진 등잔을 높은 곳에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그 등잔을 건드려서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온 방이 기름으로 더러워진다. 그래서 꺼진 등잔불은 내려놓는다. 이치가 그렇다. 진리의 성도가 진리의 불이 꺼지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건 이 사람을 내린다.
어두운 밤이 되면 사람의 피를 빠는 곤충이나 사람을 사냥하는 짐승들이 나와서 자기들 세상처럼 날뛰다가 세상이 밝아지면 숨어버린다. 이건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거다. 그런데 성도들을 보면 이런 것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자기의 신앙 믿음을 생각하며 애타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것이 별로 없구나. 이렇게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거다.
빛이신 주님이 오시는 날에는 악한 자들은 흔적도 없어진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특히 소위 사명자라고 하는 자들이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워왔는지 본질에서 벗어나고 말씀의 이치에서 벗어난 일들을 골목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서슴치 않고 하고 있고, 심지어 일반 사회적 윤리 도덕적으로도 악한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신문에 보니까 수녀 테레사가 죽기 전에 한 말이 나왔는데, 본인은 평생을 불쌍한 사람을 돕고 했지만 한 번도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고, 마음 속에 고통스런 고민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우리 기독교회는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해 주고,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너를 지었다는 이치가 분명한 것인데, 테레사가 이것을 알고 이렇게 믿어 나왔다면 왜 그런 말을 했겠느냐? 그러니 성경을 가지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방인들과 별로 다름이 없는 헛 살고 가는 인생이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룰구원의 도리를 알고 해가 갈수록 이룰구원을 점차적으로 이뤄나가면 그 마음에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이지만 세상을 목적하며 예수를 믿는 것은 비건설적이요 비구원적이기 때문에 세상에 실컷 이용만 당하고 결국은 기쁨이 전혀 없는 고통의 생이 되고 많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런 교인들이 수두룩하다.
각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바로 가르쳐 준다면 기본적으로 바로 가는 거다. 그런데 이걸 알지도 못한 채 이걸 가르쳐 주는 사람을 이단시하는 자들은 마음에 평안은 없는 법이다. 깨달음도 하나도 없는 법이다. 인간 자기를 창조한 원인 동기 목적을 모른다면 아무리 유명한 학박사라도 이 사람은 헛 살고 가는 거다. 이런 자는 불쌍하고 처절하고 가련한 거다.
우리가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자기가 성경에 나오는 악한 자는 아니지만 성질적으로 보면 자기가 성경의 악한 자가 한 짓을 그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바로 하만이구나. 내가 바로 사울이구나’ 이런 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정신 사상의 흐름을 볼 줄 모르면 그것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을 전혀 의식을 못한다.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처절하냐?
성경의 인물을 보면서 이런 게 발견이 되어야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는 이룰구원이 성경대로 되는 것인데 이걸 깨닫지 못하면 남만 쳐다보고 남만 말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비뚤어진 자기 기준으로 이렇게 하는 거다. 이걸 나쁘게 말하면 교만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 이런 상태의 교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 면을 보면 진리가 밝지 못할 때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인 무리들이 많이 나타나서 교회의 주인이 된 것처럼 날뛰며 두루 다니게 된다. 개처럼 운다는 것은 자기의 세상적인 욕구불만을 채워달라고 부르짖는 것을 말한다. 두루 다닌다는 것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현상이다.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으로 악을 토한다는 것은 성경을 가지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성경구절을 붙여가면서 세상소원 목적을 가르친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가지게 하여 생명 길 좁은 길이 아닌 세상 넓은 길 사망 길로 가게 한다는 말이다.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그 입술에는 칼이 있다는 것은 성도의 참 인격의 성장성을 죽이는 말을 한다는 것이고,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라고 하는 것은 사람 위에 자기들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 안의 거짓 인도자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어디를 향한 말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영원 궁극적인 목적에서 이탈이 된 말인지, 그 세계에 열매가 맺어지는 말인지, 어떤 결과가 오는 말인지를 모른 채 겁도 없이 지껄인다. ‘복음인지 아닌지 누가 알리요. 누가 시비를 걸리요’ 라고 하며 마음대로 지껄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누가 듣고 안 듣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척도, 생명법칙에 의해 자기 스스로가 얽매이게 된다. 악인의 말은 이렇게 된다. 자기의 말에 의해 자기가 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때는 사람의 몸을 둘러썼었는데 천국에 갈 때는 옷을 벗듯이 사람의 몸을 벗어놓고 알맹이만 천국에 들어갔다고 한다. 누가 이런 말을 하느냐? 그 유명하다고 하는 장OO목사가 그랬다. 이건 이단소리다. 모르면 이런 소리를 하게 된다.
공부(주-신학생 및 교역자 대상으로 김경형목사님이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하러 오시는 황O철목사님의 형님이 황O관박사인데,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 모임의 목사님들은 먼저 갔다 왔고, 형님인 황o관박사님은 정치계 인사를 많이 아니까 전직 대통령이나 많은 정치인들이 문상을 왔다고 한다. 장OO목사도 거기에 왔는데, 이 분이 나타나니까 초상집에서 일하던 사람이나 심부름하던 사람이나 문상 온 많은 사람들이 ‘우’ 몰려가서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게 초상집에서 할 짓이냐?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자기가 유명한 사람을 알면 이 사람 덕으로 승승장구하는 거냐? 이건 뭣과 같은가 하니 바람이 불 때 한 개의 풀씨가 바람에 날려서 지붕에 떨어지고, 마침 비가 와서 지붕 위에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는 것과 같다. 지붕에 떨어진 풀씨가 땅에 떨어진 풀씨처럼 싹이 나고 열매가 맺을 것 같으냐? 지붕이 풀씨가 뿌리를 박고 자랄 곳이냐? 많은 비가 오면 그냥 씻겨 내려갈 것이고, 비가 안 오면 싹이 텄다고 해도 금방 말라버린다. 자기 노력도 없이 올라가는 것은 요셉이나 다니엘이 올라가는 것과는 다른 거다.
8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왜 저희를 비웃으시는 거냐? 악한 자들은 자신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데도, 영적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고 난 뒤에 없애버릴 이용물인데도, 지금 자기에게 심판이 이르고 있는데도 이것을 모른 채 자기가 하나님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떠드는 것이 우습고 가소로 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거다.
이런 악한 자들은 열방들의 생사고락과 흥망성쇠를 누가 주관하는 것이며, 누구 때문에 열방인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들림 받아 올라가면 세상이 불바다가 된다는 것을 모른다. 성도들이 다 들림을 받으면 이 세상에는 쓰레기만 남아있으니 다 태워버린다는 이치를 모른다, 예수 믿는 사람도 쓰레기처럼 산다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모르면 열방이던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이던 큰소리를 치게 되어있다.
9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산성은 산꼭대기에 있는 성이다. 적군들이 쳐들어 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다.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라고 하는 것은 영적 신앙적으로 말하면 다윗은 진리의 정신으로 분별하면서 살았다는 것이요, 세상열방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세상인 것처럼 날뛰어도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의 뜻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만 살았다는 것이다.
거짓된 교인들이 열방들의 사상을 가지고, 이방사상을 가지고 열방들과 함께 떼를 지어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는 질적 본질적으로 고차원적인 천국사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를 바라는 신앙이다. 신앙의 질이 높이 올라가는 상태가 주를 바라는 거다. 자기의 신앙이 낮은 차원에서는 주를 바라지 못한다. 주를 향할 수 없고 대신 세상을 향한다. 세상을 향한 상태에서 주를 바란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어떤 상태냐? 세상을 달라는 기도를 하는 거다.
주를 바라는 신앙이란 산 속이나 굴 속에 들어가서 ‘주여, 주여’ 하면서 은둔생활, 은둔주의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주님께 기도를 하는 것으로만 보면 안 되고, 문제는 그렇게 하는 자기의 신앙의 질이 세상적인 질인지, 아니면 천국적인 질인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인지, 주를 바라보는 것인지가 결정이 되는 거다.
자기의 신앙의 질이 주를 향해져 있다면 이 사람은 그 삶 자체가 기도가 된다. 반면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를 할지라도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향해 있다면 이 사람이 하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거고, 이런 신앙은 주를 바라는 신앙도 아니다. 자기 세상을 사는 것뿐이다. 실질적이고 실상적인 것이라야 신앙이지 실상을 벗어난 껍데기만을 가지고 이것이 기준인 것처럼 주장을 하게 되면 신앙도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은 없어져 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질이 들어있다. 질을 강력하게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질적인 면으로 볼 때 하나님과 마귀가 무엇이 다르냐? 생긴 모양이 다르냐? 하나님과 마귀는 질적인 면에서 근원적으로 다른 거다. 완전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주권도 그렇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세상주권을, 세상의 소유성을 기준시 한다면 이 사람은 마귀와 하나님을 같은 것으로 보는 거다. 세상 것을 가지고 큰소리치지 말라고 성경에 역사적으로 심판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세상을 기준시 하며 살고 있다. 이러면 그 때 당시에 세상을 소원 목적하던 자들이 심판을 받아 망했던 것처럼 또 망하는 거다.
10절: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9절에서 말씀하는 신앙으로 살면 영접해 주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보게 해 주신다고 한다.
그러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겠느냐? 자기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볼 때 자기 속에서 어떤 마음이 들겠느냐? 첫째는 불쌍하게 보이느냐, 고소하게 보이느냐? 거의가 고소하게 보일 거다. 두 번째는 원수가 얻어맞는 것을 보고 ‘참 불쌍하다’ 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거의 안 나올 거다. 세 번째는 원수가 형벌 받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주의를 해야지’ 이런 사람도 있다. 네 번째는 ‘나도 악한 짓을 해서 저렇게 두들겨 맞아야지.’ 다섯 번째는 ‘알려줄 때 얻어맞기 전에 말씀을 들어야지.’ 자기의 마음은 몇 번째 마음이냐? 세 번째인 나도 주의해야지? 그러면 주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고 절대로 고소하게 여기지 말아라.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볼 때 첫 번째로 ‘너희들도 악한 짓을 하면 그렇게 된다.’ 두 번째는 내가 악한 짓을 하면 후손에게 전가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 세 번째는 내가 얻어맞는 신앙을 가졌는지, 아니면 상급을 타는 신앙을 가졌는지 확인케 해서 자기가 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발견이 되면 감사와 찬송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인자’가 뭐냐? 자비스런 마음이다. 왜 이 용어를 쓰는 거냐?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했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한 마음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이 자기 마음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 일은 참고 기다림에서 되는 거다.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다윗이 이렇게 사니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보게 하셨다는 거다. 그러니까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보려면 내가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겠느냐? 같이 싸워야 하느냐? 참아 기다려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저 놈이 언제 보응을 받나?’ 하고 키며보는 게 아니라, 그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일만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 앞에 인자한 마음을 가지면 된다. 이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편안한 거다.
11절: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왜 악한 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거냐? 그것은 세상은 성도들의 영적 훈련장인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인을 오래 오래 두고 영적 선민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는데, 악인을 성도들의 훈련에 몽둥이로 쓰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에 악인이 모두 없어지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겁도 없이 날뛰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서당 안의 문 위쪽에 회초리를 걸어두면 학생들이 그걸 보고 딴 짓을 못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영적 선민 이스라엘이 세상의 많은 악인들 가운데 사는 것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임을 알고 겸손함을 배우라는 거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목적에 두고 인간 자기를 창조했으니 이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성도 자기를 별의 별 사람들이 있는 틈에 둔 것이니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악한 사람을 보더라도 흉을 볼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보고 깨닫고 갈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부는 자기가 깨달을 거다.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고 간에 어떤 사람을 보든지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른 거다. ‘나쁜 놈, 죽일 놈’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자기 쪽으로 가져와서 깨달아야 한다. 이게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다. 남의 흉만 보는 사람은 속이 좁고, 넓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 은혜를 못 받게 되고, 결국 자기도 버려지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방패는 사람의 몸보다 먼저 나가서 원수의 창이나 칼이나 화살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방패는 남이 아니라 자기가 가져야 한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말함인데, 첫째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는 주권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성도들의 고차원적인 신앙실력을 말한다. 이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거다. 이 신앙실력은 말씀에서 오는 것인데, 그냥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다고 해서 실력이 되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오는 비진리적, 육적, 세상적인 원수들의 주장들을 막고 이길 수 있는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악한 주장들을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막으면 이게 방패다.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저희를 흩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들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이적과 기사로써 악인을 흩어버리는 방법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무기도 되고, 축복도 되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악인들에게는 자기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의 무기가 된다.
애굽사람이 밭에 농사를 잘 지어놨는데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보내서 다 먹어버리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박을 보내서 메뚜기가 먹어치우지 않은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완전히 녹여버렸다. 메뚜기가 먹고 남은 것이 조금 있었는데 이것까지 주기 싫어서 우박을 보내서 다 없애버린 거다.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뺏어가려면 하루아침에 다 뺏어갈 수도 있다. 도선생을 보내서 뺏어갈 수도 있고, 가족이 병이 들게 해서 다 뺏어가 버릴 수도 있고, 집에 불이 나게 해서 다 뺏어갈 수도 있다.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선민 이스라엘을 박해하며 교만하게 큰소리치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달라는 거다. 신앙실력 면으로 보면 진리이치를 가진 성도가 비진리의 육적 세상적인 주장을 압도해서 그들이 할 말을 잃게 해 달라는 거다. 입을 틀어막아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자에게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다가가는 거고, 원수들에게는 무섭게 다가가는 하나님이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